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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사도행전

행 25장 13-27절(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 - 권율

by Preacher 202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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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5장 13-27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

권율 목사 2017. 3. 30.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청년부 [부산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어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적극 변호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고관들이 근거도 없는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하여 총독 베스도에게 처벌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울 때문에 폭동을 일으킬 기세가 되니까, 베스도가 바울을 회유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했다는 사실을 어제 살펴봤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로마로 가기 위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찾아왔습니다(25:13). 아그립바 왕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자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2세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버니게는 아그립바의 이복누이로서 변함없는 그의 친구였습니다(ESV Study Bible). 두 남매가 문안 인사하러 찾아온 지 여러 날 후에, 베스도가 바울의 일을 두고 지금 아그립바 왕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14-16절에서 보듯이, 자신의 선임이었던 총독 벨릭스가 구류해 둔 바울을 유대인들이 억지 죄목으로 고소했는데, 자기가 판단하기에는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스도 자신이 지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에 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바울을 데려왔다고 말합니다(17절).

 

그런데 베스도의 말을 자세히 보면, 이전과는 약간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지체하지 않고 이튿날 재판 현장을 열었다고 하는데, 어제 본문을 읽어 보면 유대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거의 10일 정도를 머물렀습니다(6절). 추정하건대 아마 10일 동안 그곳에서 유대인들의 분위기를 실감하며 그들의 호의를 사려고 마음이 점점 기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이사랴에서 열린 재판 자리에서 바울을 회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18-19절에 보면, 자신이 짐작했던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다만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와 예수의 부활 논쟁 때문에 바울을 고발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총독 베스도의 말이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보다 상관의 위치에 있는 아그립바 왕이 찾아오자, 이제는 베스도 자신의 입지를 열렬히 변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얼핏 보기에는 성격이 곧고 주관이 뚜렷한 것 같아도 외압에 의해서 생각보다 쉽게 흔들리는 인물입니다. 어제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의 분위기를 의식해서 바울을 회유하려고 들더니, 이제는 아그립바 왕의 권위를 의식해서 자기의 처신이 올바름을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20-21절에서 그는 자신이 제대로 처신했음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겠냐고 물었는데,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이때까지 잘 보호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베스도가 어떻게 심리할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어제 본문에서 봤듯이, 이미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9절)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거기에서 심리를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했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약간 과장하는 어투로 들립니다. 마치 바울이 베스도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해서 자기가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부풀리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보호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으며, 오직 주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그 말씀에 사로잡혀 지금 로마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아그립바가 비록 유대의 왕은 아니었지만, 성전과 종교 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도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습니다(22절).

 

그 이튿날 아그립바 왕은 이복누이 버니게와 함께 아주 사치스럽게 치장하고서 고관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갔습니다(23절).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이 접견 장소로 나오니까, 드디어 베스도가 바울의 일에 대하여 왕과 청중들 앞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24-2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유대인의 말을 빌려 바울을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24절). 물론 자신이 보기에는 죽을 죄를 범한 일이 없어 보이는데(25절), 같은 유대인들이 볼 때는 바울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매우 섬뜩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사회법적으로도 해악을 끼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낙인찍혀 버렸습니다. 한때 그들보다 더 철저하게 유대주의자로 살았던 사람인데도,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동료들에게 참 진리를 깨닫게 해 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죄로 왜곡된 그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의 노예가 되어 그 율법이 본래 가리키는 의도와 실체를 깡그리 무시하는 상태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이해하는 그것이 유일한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렸고, 율법을 대하는 다른 어떤 관점이나 태도를 수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가 되면 상대방의 선한 의도마저도 자신들의 눈으로 왜곡시켜 무조건 타도의 대상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오늘날 극단적 무슬림이 본문의 유대인들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왜곡된 마음을 가진 교인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회 개혁을 위한 자신의 기준이 죄로 왜곡된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성도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그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태도는 정말 섬뜩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낙인찍어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총독 베스도를 배후에서 움직이시고 이제는 아그립바 왕까지 동원하셔서 당신의 종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일은 바울이 로마로 가야 한다는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이 구류 상태에 처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을 로마로 가게 하려는 하나님의 안전장치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구류 상태에 있는 바울을 불러 매번 심문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소상하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심문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누구보다도 철저한 유대주의자였던 그가 지금 복음 때문에 본의 아니게 소동을 일으킨 것이기에, 심문 때마다 주의 복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선한 의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곤란한 상황에 빠질 때, 혹시 그 상황에서 여러분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한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 때문에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믿는 자로서 선행을 베풀다가 오해를 받아 추궁을 받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말해야 할 때, 내가 믿는 십자가의 복음 때문이라고 담대하게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순수한 마음으로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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