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0장 1-14
그림자와 실체(實體)
이삼규 목사 20160515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옛날에는 경찰들이 범인을 검거할 때 범인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를 그려서 범인을 검거하는데 활용하였습니다. 물론 요즘도 사용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활용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요즘은 웬만한 곳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영상을 확인하면 대부분의 용의자들은 꼼짝을 못하고 검거됩니다. 실제 인물을 알기에 손 쉽게 검거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여러 가지 모형들이 나타납니다. 율법, 제사제도, 절기, 성전 등의 많은 모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약의 율법은 실제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림자’는 헬라어에 ‘스키아’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그늘(shade), 그늘지게 함(overshadowing), 그림자(shadow)’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여성들의 눈에 퍼렇게 멍들게 칠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shadow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나타난 구약의 그림자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실재(實在) 사이에 나타나는 커다란 차이점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성령의 감동으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반복의 번거로움에 개의치 않고 구약의 그림자와 신약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조시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영광스럽고 영원하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완전한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구약의 의식(儀式)들을 대조 시켜 보여줍니다.
그림자와 실체(實體)
구약의 경륜(經綸), 모세의 율법, 불완전했던 사람들이 감당했던 제사장 직분, 그리고 죄를 위한 희생제사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임시로 세우신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더 좋은 것들, 즉 장차 임할 실체를 상징하는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의식들에는 약속된 메시아의 의미가 담긴 그림자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된 빛이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춰졌고, 그 빛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긴 그림자가 구약의 일시적인 경륜이었습니다.
그림자가 언제 생깁니까? 빛이 비칠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는 떡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림의 떡’입니다. 어제 임실 치즈테마파크 견학을 했는데 치즈 홍보관 안에 치즈로 된 음식을 잘 차려놓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먹음직스럽게 상을 차려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요즘에 마트 같은데 가면 푸드 코트가 있습니다. 거기에 음식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형음식을 만드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실제 음식보다 더 먹음직스럽게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형을 보고 음식을 주문합니다. 아무리 모형이 먹음직스럽게 보여도 그것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주어졌던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10:1)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소망, 그리고 장차 임할 실체를 믿음 가운데 고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히브리서가 증거 하듯이 ‘실체’가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자요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체가 오신 것입니다. 그림자가 상징하던 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림자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히브리서의 처음 몇 장에서 보이듯 성경은 진리를 반복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빠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진리를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애기를 보면 몇 십 번 아니 몇 백번 반복해서 들으면 그 말을 따라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데 아이가 말을 배우겠습니까? 절대로 못 배웁니다. 농아들이 왜 말을 못합니까? 귀가 들리지 않아서 말을 못합니다. 들리면 말을 하는데 들리지 않으니까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육방법은 우리가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배우고 그 진리에서 유익을 얻을 때까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 도다”(사 28:10) 이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소이 세뇌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방법도 되고 이단들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또한 노인들을 상대로 의료기 판매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합니다. 왜 그들이 이 방법을 사용할까요? 효과가 있으니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움의 과정을 지나는 우리에게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먼저는 우리가 지루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분은 성실하시고 꾸준하십니다. 그분은 절대로 그냥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주저앉지 말고 계속 내가 말하는 것을 배우고 믿고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하나님 편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하지만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전까지 희생 제물로 드려진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없이 하지 못했고, 하나님은 그 제사들에 싫증이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실상 “너희 마음이 내 마음과 일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너희의 희생제물과 예물에 싫증이 난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반기(反旗)를 들게 될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작은 교회보다 대형교회를 선호합니다. 대형교회 교인이라는 것에 자부심 즉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사람들이 많으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누가 너희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너희가 내 앞에 나올 때 누가 너희에게 이것을 요구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희생 제사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그것들은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죄를 덮어두는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죄 사함과 순종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형식적으로 예배하자 하나님은 “나는 너희가 반복하는 무의미한 행위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너희의 의식과 축제일을 미워한다. 그것들은 내게 괴로운 것이고 지겨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40편 6-8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영원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속량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이루셨고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났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죄 사함을 받았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위로부터 나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제게 일을 맡기소서. 저는 증인이 될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이다
율법과 은혜 사이에는 대조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제사장이 죄를 없앨 수 없는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날마다 하는 일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임했는데 그것은 새 언약, 영원히 단번에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그리고 완전한 죄 사함의 확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자녀들의 특권을 이보다 더 은혜롭게 그려주는 그림이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최초의 조상의 모습을 그려주는 구약의 그림과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룹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림자만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안식교인들입니다. 안식교에서 나온 안식교 이단인 ‘하나님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율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를 추방하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나 동산에서 나가라!”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아름다운 동산과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자 그분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인류의 고난과 슬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인류는 에덴동산으로, 즉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깊은 갈망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물론 이 말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뜻에 그저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굴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 속에 그들조차 모르는 깊은 그리움과 갈망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동경이 그들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류는 그분께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해 왔습니다. 인도에는 사람들 숫자만큼 많은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부족이나 민족에게든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망만을 안겨준 헛된 시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이 인류에게 오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새롭고 거룩한 길을 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자 중보자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제와 자매인 우리가 하늘에서 그분처럼 하나님을 뵐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이 우리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안으로 피하여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습니다. 물론 이 권리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온전히 대표하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 권리를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
구약의 율법 체계에서, 즉 실체의 그림자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의 죄를 덮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없애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약성경을 주시기 위해 여러 명의 기록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그 글들의 일치된 주장에 따르면, 상징적 의미만 가지고 있던 구약의 그림자는 물러가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게 된 은혜와 용서의 새 언약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분의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을 돌아보며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소망과 기대 속에 그분의 재림을 고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까?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요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자격을 가진 분으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보혈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영광가운데 계신 인자이십니다. 이제는 그림자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실체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림자를 붙들고 그것만이 참이라고 외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드시렵니까? 그림자입니까? 실체입니까? 이제 그림자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체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피하여 안전을 누리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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