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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0장 19-20절(휘장을 제하라!)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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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0장 19-20

휘장을 제하라!

이삼규 목사 20170319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성 어거스틴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주 안에서 쉼을 찾기까지 우리 마음도 쉬지 못하나이다.” 어거스틴은 이 짧은 문장에서 인류의 기원과 내면의 역사까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우리 내면에 있어야 할 평화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서 쉼을 찾기까지 우리 마음에 쉼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람의 주된 목적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문: 사람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요?(What is the chief end of man?)

답: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for ever)

 

소요리문답은 신앙교육을 위해서 만들어진 교리 문답책입니다. 그런데 이 문답책을 만들면서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본격적으로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전제부터 확실히 정립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먼저 길을 걸어갈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방향을 거꾸로 잡으면 멀리 간만큼 더 헛고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너는 왜 사니?” 정말 인간에게 목적이 필요할까요? 그럭저럭 살면 되지 꼭 목적이 있어야 되나요? 인간에게 목적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면 삶의 목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목적이 없다면 불안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합니다.

 

사람의 주된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①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삶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나의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증거하고 드러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대답의 특징은 관심사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 관심의 초점이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선택 기준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실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는 왜 사니?’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대답을 하지만 그 모든 대답을 종합해보면 결국 “행복하게 잘 살려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라는 요리문답의 대답은 관심사가 나의 행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진 삶,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런 신앙을 소유해야 할까요? 그것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므로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에서 우리 몸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뜻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건강관리도 잘 해야 되고, 필요한 지식을 공부하는 데도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한다.’라는 것은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께만 집중시키고, 그분의 뜻과 행하심을 기대하고 원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뜻에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기분 내키는 대로 일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일생 동안, 아니 인생이 끝난 뒤에도 영원히 즐거워하며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보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한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랑을 하면 즐거워집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항상 그의 곁에 살고 싶고, 그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고,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싶습니다. 그에게 속하며 그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즐거워하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그럼으로써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도 신령하게 교통하며 한 가족의 감미롭고 신비로운 교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러운 반역’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깨져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그를 즐거워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가능한 한 그 앞에서 멀리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 땅 위의 삶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진 삶, 우리가 거해야 할 옳고 바른 자리인 ‘지복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온 삶입니다. 우리는 처음 얻은 땅을 지키지 못했고, 그 상실이 끊임없는 불안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죄가 만족스럽게 처리되고,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지며,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교통함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전처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먼저 일하심으로 우리를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쉬지 못하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는 갈망이 생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첫 번째 역사가 일어난 것을 알아채고 ‘일어나 아버지께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다 탕진한 후에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탕자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기에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죄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곳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내적 여정에 대한 아름다운 실례를 구약의 성막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돌아온 죄인은 먼저 바깥뜰에 있는 놋 제단에서 피의 제사를 드린 후, 가까이 있는 물두멍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휘장을 지나 성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소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금 등대의 은은한 빛 외에 어떤 자연의 빛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성소에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진설병과 끊임없는 기도의 상징인 향단이 있었습니다.

 

예배 자는 많은 것을 누렸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휘장이 지성소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휘장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katapevtasma(카타페타스마)’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가리개 covering, 휘장 veil, 장 curtain’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흔히 사용된 휘장이라는 말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지성소 안 속죄소 위에 하나님이 친히 두렵고 영광스럽게 나타나 거하셨습니다. 성막이 서 있는 동안,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자신과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언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입니다. 그 마지막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뭐라고 설명합니까?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신약성경의 모든 일은 구약 성경의 그림과 그대로 일치합니다. 구속받은 자는 이제 지성소에 들어가길 두려워하며 주저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밀고 들어오길 원하시며 평생 그 앞에서 살길 원하십니다. 믿습니까?

 

성막이 왜 존귀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곳에 임재 하셨기 때문입니다. 휘장 너머 하나님의 임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히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휘장을 뚫고 들어가는 것, 거룩한 임재를 민감하게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휘장을 찢어라!

 

예수께서 이와 같이 그 몸을 찢으심으로 휘장을 제하셨고 하나님 편에서 우리가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우리는 밖에서 지체하는 것일까요? 왜 평생 지성소 밖에 머무는 데 동의하며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신랑은 말씀하십니다.

 

아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는 그 부르심이 우리를 향한 것임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가까이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도록 성막 바깥뜰에 머물며 지쳐 갑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는 것일까요?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그 성전에 휘장이 여전히 드리워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단지 ‘냉랭하기 때문’이라는 평범한 대답으로는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냉랭한 마음보다 더 심각한 문제, 그 냉랭함의 원인이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마음의 휘장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첫 휘장과 달리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빛을 막고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휘장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 휘장은 우리 안에 있는 심판받지 않은 본성,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거부당한 적 없이 여전히 살아 있는 육신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한 번도 진심으로 인정해 본 적 없는 자기 목숨, 속으로 부끄럽게 여겨온 자기 목숨, 그래서 한 번도 십자가 심판의 자리로 가져가 본 적 없는 자기 목숨이야말로 촘촘히 짜여진 마음의 휘장입니다. 이 불투명한 휘장은 그리 불가사의하거나 알아보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꿰매고 깁고 수선했을지언정 엄연히 존재하는 삶의 원수, 영적 진보의 실질적인 걸림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휘장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흔히 언급하고 싶어 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갈급한 영혼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휘장을 과감하게 찢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휘장은 자기 목숨의 실, 인간 정신의 죄들로 촘촘히 이어진 가느다란 실로 짜여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로서, 그렇기 때문에 정교하고 강력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아의 죄란 자기 의와 자기 연민, 자기 확신, 자기 충족, 자기 찬탄, 자기 사랑 등등을 말합니다.

 

자아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불투명한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영적인 경험으로만 제거될 뿐, 단순히 가르침으로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자아에서 해방되려면 자아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초청해서 우리 안에서 자아를 죽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심판의 자리로 자아의 죄를 가져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랬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면 구주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실 때 겪었던 고통과 어느 정도 비슷한 고통의 시련이 닥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휘장을 찢는 것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여겨지거나 시적인 일 내지는 거의 즐거운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휘장을 찢으려면 고통을 각오해야 합니다.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휘장의 재료는 살아 있는 영적 세포조직입니다. 우리 존재 전체를 구성하는 예민한 재료, 즉 감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휘장을 건드리는 것은 아픈 곳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그 휘장을 찢는 것은 우리 자신을 다치게 하고 상하게 하며 피 흘리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를 십자가 아닌 것으로, 죽음을 죽음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태도입니다. 죽음은 장난이 아닙니다. 생명을 이루고 있는 소중하고 부드러운 재료를 찢는 일은 심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예수께 한 일이 그것이었고, 해방시키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하는 일 또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휘장을 찢겠다고 어설프게 내적인 생명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내드리고 맡기면 됩니다. 자기 목숨을 고백하고, 버리고,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여기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역사와 안이한 ‘수용’은 신중히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기다려야 합니다. 자아의 못 박힘에 대한 깔끔한 교리에 만족하고 안주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사울 왕이 가장 좋은 소와 양을 남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이 진정으로 완성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휘장이 찢어질 것입니다. 십자가는 거칠고 치명적이지만 효력이 있습니다. 희생물을 영원히 매달아 두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일이 끝나는 순간, 괴로워하던 희생물이 숨을 거두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광과 능력이 찾아옵니다. 휘장이 사라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영적인 경험의 기쁨이 이전의 고통을 잊게 해 줄 것입니다. 휘장을 찢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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