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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1-7절(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 서명성

by Preacher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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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1-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서명성 목사 2016.1.24.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믿음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이해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을 그저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다 보면 입술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그 행동은 전혀 믿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바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자기가 갖고 싶고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까? 11장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모세 등등. 그들은 자기 신념을 따라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살다가 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사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지 믿음의 선진들을 통하여 살펴보며 믿음대로 행함으로써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본질(11:1-3)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11장 앞부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탁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모세보다, 레위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분이라고 합니다. 7장부터 10장까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희생제사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이를 근거로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을 굳게 잡고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인내로써 믿음의 승리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을 알려면‘실상’이라고 번역된 ‘휘포스타시스’와 ‘증거’로 번역된 ‘엘렝콧’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휘포스타시스는 주관적인 ‘확신’을 뜻하기도 하고 객관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본질’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믿음을 주관적인 의미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인 의미로 볼 것인지를 알려면 ‘바라는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는 ‘바라다’는 뜻으로 사용된 동사나 명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은 모두 안식에 들어갈 약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3장과 4장에서 소망에 대한 언급은 출애굽 공동체의 가나안 안식과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인 안식에 관한 것입니다. 10장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종말론적인 안식의 장소인 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믿는 도리의 소망’을 붙들자고 합니다. 종합해보면 1절에서 ‘바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는 소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서 현실적인 실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관점에서‘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보이는 것들의 기초이며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2절에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증거를 얻었다’는 표현은 1절에서 사용된 ‘증거’와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인정함을 받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실재에 대한 믿음은 구약의 선진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환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낸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을 직역하면 ‘보이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현재의 것에서 미래를 보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드러내며, 소망하는 것을 실현되게끔 이끌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믿으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이 믿음입니다.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믿음은 믿는 마음과 행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진리라고 믿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내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적인 확신은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주관적인 ‘신념’과는 다릅니다. 단지 내가 갖고 싶고 하고 싶은 소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어떠한 환경에서도 믿음으로 그분을 의지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을 나타낼 때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맘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현재적인 삶에서 고난과 핍박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간 선진들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격려와 도전이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구속의 내용을 보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만 경험했지만 믿음을 통하여 바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믿음 없는 세대를 향해 어떤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믿음의 선진들(11:4-7)

 

사람을 처음 만나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하는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가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보다는 사람됨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사람됨에 따라 남기는 흔적이 달라집니다. 그 남긴 흔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상급이 달라집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에서 훌륭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의 이름이 연대기순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 중에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려 969세를 살아 기네스북에 나올 만한 무드셀라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기는 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진 인물로서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보이는 세상을 좇아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1) 믿음의 제사를 드리는 아벨(11:4)

 

창세기 4장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쫓겨난 후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가인입니다. 아담의 첫아들입니다. 이어 둘째를 낳았는데 그가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땅의 소산인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서 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럴 듯한 추측일 뿐입니다. 제사 제도는 아벨로부터 한참 후인 모세 때에 생겼습니다. 더구나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 중에는 곡식을 드리는 소제도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피를 흘리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왜 아벨의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제사가 “더 나은 제사”입니까? 아벨이 믿음과 진심이 담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벨, 그 자신을 받으셨고 그 다음에 그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이 제물을 바쳤던 가인은 그 자신부터 하나님께 거부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제물을 드린다고 하여도 믿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올바른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벨은 믿음의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의 제사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을 보면 자기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음을 인하여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분노하며 왜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가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인하여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도리어 아벨을 들에서 쳐 죽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예물을 기뻐하시고 의롭다 여겨주셨으며 그의 죽음이 끝이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비록 아벨의 육체적 고난과 죽음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실패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승리자로 서 있으며 여전히 살아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인데 아벨의 행적이 성경에 기록되었기에 그의 신실한 행동이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에게 전해내려 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아벨의 믿음의 제사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예물의 가치나 수량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물을 드리는 자의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에 있는 믿음을 보십니다. 제사를 드리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 자체보다 우리의 믿음을 먼저 달아보십니다. 의무감으로 하는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감격 속에 하는지 중심을 보십니다. 예배의 중요정신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데 있습니다. 참된 거룩은 우리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향한 후에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는 모든 활동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의 자연스런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2) 믿음으로 동행하는 에녹(11:5-6)

 

소요리 문답 제 1문에서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즉 하나님만을 우리 인생의 으뜸 되는 기쁨으로 여기고 그분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 가치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녀야 합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갔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에녹은 평범한 삶을 살았으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혼의 상태가 믿음이라면 그 믿음을 표현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늘 옆에 모셨습니다. 그분과 자주 교제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녹을 기뻐하시고 그와 영원히 동행하시고자 데려가셨습니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란

 

-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가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임을 알고 그와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에게도 동일한 복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이후에는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이 하늘 저편에서 그저 관망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고, 자신의 영을 보내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사랑하는 자들이 거할 영원한 처소를 지금도 예비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렇듯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으로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3) 믿음으로 순종하는 노아(11:7)

 

노아는 인류의 시조 아담의 10대손인데, 셋의 자손 라멕의 아들입니다. 악이 관영하던 시대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홍수로 멸망당하기 직전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까지 도전하려는 적의에 찬 시대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은 120년 후에 있을 홍수를 가리킵니다.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멸할 계획을 노아에게 알려주시고, 노아의 가족과 모든 들짐승이나 육축을 종류대로 홍수로부터 구원받도록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노아가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세상이 홍수로 멸망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핍박과 조롱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으나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는 구원을 받아 새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인내함으로 심판의 때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미리 준비한 노아의 믿음은 미래에 약속된 것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삶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요구하며 순종은 참된 믿음의 표현입니다. 노아의 순종은 두 가지로 세상을 정죄합니다.

 

1) 불순종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방주를 지음으로 그 시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였고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노아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가 심판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믿음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홍수전에 의롭다고 불림으로써 믿음에 합당한 선물을 받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노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는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벨과 같은 믿음의 예배를 드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그분의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2). 예배는 단지 교회당 안에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로 드려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찾는 이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언제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동행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임재가 다양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아벨은 자신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면에 에녹은 그의 믿음으로 인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는데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아벨과 에녹이 보여준 믿음의 삶이 아주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은 자인 반면에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극복한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벨의 순교적인 죽음은 믿음의 위인들 중에서 불의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자들의 모델이 되며 반면에 에녹은 믿음으로 승리를 이룬 자들의 모델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에녹의 믿음을 통해서 강조되는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믿음의 삶에는 환난과 승리가 모두 동반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노아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을 영화롭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는 문제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과 인내로 방주를 준비하며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자신과 가족을 구원하였으며, 불순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도 참여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나 일상의 삶을 살 때든지 언제나 믿음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경건한 복종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듣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매일의 묵상과 순종도 우리를 향한 방주를 조금씩 지어나가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짓고 있는 ‘우리의 방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에만 순종하려는 이 몸부림이 결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의를 상속받게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맡길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전한 예배를 드리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걷게 하며 순종의 삶을 살게 해주는 동기가 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며 비록 우리가 소망하는 것이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보게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삶을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며 훌륭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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