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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1-10절(미래를 미리 앞당겨 볼 수 있는 눈) - 이준원

by Preacher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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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1-10

미래를 미리 앞당겨 볼 수 있는 눈

이준원 목사 2013.12.8.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우리 중에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고, 얼마 전부터 교회에 처음 다니기 시작한 분들도 있습니다. 또 중간에 쉬다가 다시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의 ‘신앙’은 ‘믿음’을 말하는데,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비신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 뿐이지, 뭔가 다른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믿음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특히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분들이나 성경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영생에 대해 확신이 없는 분들은 이것을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쉬운 예로, 운전을 하고 가다가 빨간불이 켜 있을 때 우리는 그 앞에 멈추어 섭니다. 왜 가지 않고 거기 서 있습니까? 물론 법을 지키느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곧 녹색으로 신호가 바뀔 것을 믿기 때문에 가만히 기다리는 겁니다. 녹색으로 바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못하고, 잘 봐서 차가 안 오면 그냥 갈 겁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빨간불이 몇 초 또는 길어도 1-2분만 지나면 녹색으로 바뀔 것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믿음입니다. 분명히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빨간불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녹색으로 바뀔 것을 미리 앞당겨 볼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리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우리 모두는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맞지요? 배를 타고 온 분은 극소수일 겁니다. 지금도 한국을 가거나 미국 내의 먼 도시로 여행 또는 출장을 갈 때는 비행기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뭘 믿고 비행기를 타셨습니까?

 

혹시 자신이 타는 비행기 기장의 얼굴을 보았을 수도 있고 직접 인사를 나누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행기를 정비하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이 내가 탈 비행기를 완벽하게 정비해 놓았다고 알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그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만나본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릅니다. 또 승객들 중에 테러리스트가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승무원들이 강도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탄 비행기의 기장이 조종 실력이 있어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정확하게 데려다 줄 것을 믿기 때문에, 비행기 정비사들이 정비를 잘했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공항의 TSA 직원들이 승객들을 잘 검사했다고 믿기 때문에, 또 승무원들은 이미 에어라인에서 검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쿨쿨 잠을 자기도 하면서 편안하게 타고 가는 겁니다.

 

아직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지금 보고 있기 때문에 확신 가운데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이고, 그런 믿음 없이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모든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아직 본 것도 아니고 영원한 천국이 완성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를 하고 있고, 또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증언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여 우리도 미래를 미리 앞당겨 보면서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 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라고 하고, 12장은 ‘은사 장’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데, 믿음에 대해서,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 인간의 시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절)

 

이 구절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바로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풀어서 보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신이며, 지금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확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직 시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지금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앞당겨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께는 시간의 흐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태초’라는 시간을 만드시면서 그때부터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전적으로 시간을 다스리시며 시간을 손에 쥐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뛰어넘어 그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머리로는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이해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셨고 그 위에 계시기 때문에 시간 속에 잡아넣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8)

 

천 년이 하루 같기도 하고 하루가 천 년 같기도 한 것은, 하나님이 시간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태어나신 사건은,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며 한계가 있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속에 가두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시간 위에 계시던 분이 시간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공간을 손에 쥐고 계시던 분이 공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죄로 망가진 인류 역사를 고치시고 아름답게 회복시키기 원하셔서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 속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되, 아주 가까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시면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겪으시고 기쁨과 슬픔도 맛보시고, 마침내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원과 회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미 아름답게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정말 찬란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류 역사는 완벽한 회복과 아름다움을 이룬 그림으로 그려졌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새로운 세상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시간에 갇혀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1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물론 머릿속으로 ‘나는 1분 후에 머리를 긁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긁는, 그런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 저 밖으로 나가서 1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9-12)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모세가 자기는 120년 살았으면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하는 걸 보면 좀 이상하긴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참된 지혜는 시간 안에 갇혀 살고 있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인생의 남아 있는 날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시간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이며, 앞을 미리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연수가 길다고 자랑하더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시간 아래 갇혀 살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함께 영원한 여행을 시작하자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우리 손을 직접 붙잡으시면서 함께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여행을 시작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시간의 흐름이 없고 그 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시간 속에 갇혀서 살고 있는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격입니다.

 

그런데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바로 그 통로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시간 위에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붙들고 같이 가자고 초청하실 때 ‘예’라고 대답하며 따라나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세계, 더 높은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로 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고 열어주시며 들어오라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면서 ‘예’ 하고 대답하며 그리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사이에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한계를 지닌 인간의 시간에서 한계가 없는 하나님의 시간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시간을 미리 앞당겨 보는 눈을 가졌던 믿음의 선진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과 선배들은 시간을 앞당겨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즉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2절)

 

시간을 초월하여 그 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믿음의 선진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한참 나중에 나타날 먼 미래의 일들이었지만,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의 시각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하시는 모습을 오늘로 미리 앞당겨서, 마치 하나님이 지금 그 일을 행하고 계시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눈을 히브리서 11장이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즉 바라는 것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믿음은 ‘실상(real substance)’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믿음의 선배들은 증거를 얻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선배들 중에 몇 명만 살펴보겠습니다.

 

1) 노아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7절)

 

노아는 비를 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직 비는 전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에 시간을 미리 앞당겨 자기 눈앞에서 엄청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방주를 열심히 건축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이 세상에 한 번도 비가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노아는 비를 내릴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하나님이 결코 헛된 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현실로 미리 앞당겨 행동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또한 믿음이라고 평가합니다.

 

2) 아브라함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8-10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목적지를 알고 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당연히 목적지가 있지 않습니까? 비행기 표를 사러 갔는데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을 때 “그냥 아무 데나 주세요.”라고 하는 것을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그냥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시간을 앞당겨 마치 자기가 약속의 땅에 벌써 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지금은 하란에 있지만 이미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는 것으로 믿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정의해주시면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칭해주셨습니다.

 

한참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100세에 주신 아들을 이제는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7-19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는 순종을 결심하고 칼을 들어 이삭을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은 이미 죽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이 지금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을 그는 시간을 앞당겨 미리 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정말로 이삭을 죽이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얻고 나서 그에게 푹 빠져서 지냈습니다. 이삭이 우상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리하게 하시려고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믿음으로 잘 통과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계속 읽어보면, 그 외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은 시간을 앞당겨 약속을 현실로 이해하는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완벽한 타이밍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해줍니까? 가장 정확한 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의 표현이 믿음이라고 알려줍니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결정적인 위기에 빠졌을 때 어디선가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서 결국 우리의 주인공을 구출해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보다 더 완벽하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확한 때에 등장하십니다.

 

신호등은 고장이 나서 빨간불에서 녹색으로 바뀌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기가 아예 나가서 작동하지 않음으로 큰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비행기도 고장으로 인하여 불시에 착륙할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추락하거나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위에 계시며 시간을 컨트롤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완벽한 타이밍에 우리의 삶의 위기 속으로 들어와 구해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그 주님을 신뢰하며 연습해 나가는 것이 곧 믿음생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결코 헛된 말을 하지 않으시고, 신실하시고, 절대 지각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력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완벽한 이력서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위대하신 분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기를 자처하신 하나님!

 

때로는 하나님께서 늦게 오시는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우리를 잊으신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신실하심 등, 그분의 이력서를 다시 확인해보면서,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시간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곧 오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나옵니다. 누이가 둘인데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그러는 사이에 나사로가 죽게 됩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이 베다니로 가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도 똑같이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두 자매는 예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자기들의 오빠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으면 그를 충분히 낫게 하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말은 ‘주님, 늦게 오셨습니다. 지각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 안에 서운함도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 그 후에 이제 가자고 하시며 베다니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일부러 기다리신 겁니다. 그래서 마르다에게 미리 “너희가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결코 늦게 베다니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늦었다고 속으로 서운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그 자리에 나타나셔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썩어가는 나사로를 살리시며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죽었다 살아나실 부활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흘이나 죽어서 썩어가던 시체가 살아나는, 전무후무한 사건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많은 아픔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 속으로 찾아와 주십니다. 가난함과 배고픔의 아픔 속에 허덕이고 있을 때 우리 곁에 늘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해주셨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당장 배가 고픕니다. 은행 잔고가 바닥이 났습니다. 그럴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직접 책임져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질병과 좌절의 고통 속에서도, 정말로 힘들어 허덕이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 곁에 와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주님의 성품과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시간을 앞당겨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눈으로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안 보이지만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 가끔 전화벨이 울리는 것은 전파 때문입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전파는 존재합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도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절)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향한 주님의 완성된 그림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을 향한, 우리 각 가정을 향한 주님의 그림은 시간을 넘어 그 위에 초월해 계시는 주님 앞에 그림으로 하늘나라 전시장에 걸려 있습니다. 모두가 다 아름답고 멋진 그림이고 자랑할 만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피 값으로 구원받은 우리와 우리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게 되진 않았습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시간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시간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이 시간 속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주님을 신뢰함으로 시간을 미리 앞당겨 현실을 보도록 해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과정 중에 아픔들이 많이 있지만, 그 스토리의 마지막 장은 이미 다 아름답게 완성되어 하늘나라의 벽에 걸려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만한 자신감을 갖게 되고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그리스도 안의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확인되었고, 완성된 그림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끼는 분이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도 그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를 곧 살리실 주님이 아니십니까. 이제 금방 살아나게 해주실 것을 다 아시는데,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통의 현장 가운데 동참하셨고, 우리의 슬픔과 고통의 현장에도 우리와 함께 해주는 주님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들이 항상 여유가 있고 달콤한 인생이고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락해서 믿음으로 살라고 쉽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상황은 우리보다 훨씬 더 힘들었고 믿음을 포기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신실하심과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을 미리 앞당겨, 마치 그 약속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믿음이란,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의 엄청난 간격을 메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아 있는 우리 인생의 시간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서 시간을 다스리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시간 속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묶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보장된 미래가 없이 오늘의 시간에 평생 갇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세계, 더 높은 차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인생은,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 속에 갇혀 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그려 가는 인생의 화폭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아픔과 실패와 좌절이라는 험한 계곡과 산들이 많이 있을 것이며, 아직 색을 칠하지 못해서 어두운 부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여정을 통과한 후에, 우리는 주님께서 완성하셔서 하늘 벽에 걸어 놓으신 그림,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미 그 그림을 하늘 미술관에 걸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완성하여 걸어놓으신 이 완벽한 그림을, 미리 시간을 앞당겨서 오늘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믿음입니다. 영원을 향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이러한 눈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시간 아래 갇혀 사는 제한적인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쥐고 계신 주님께 우리 시선을 고정시키며 살아야겠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오늘 내 것으로 삼는 이 믿음의 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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