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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8-16절(아브라함의 믿음) - 서명성

by Preacher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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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8-16

아브라함의 믿음

서명성 목사 2016.1.31.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성화 중에 두 발자국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해변을 따라 두 쌍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찍혀져 있습니다. 주님 품에 안긴 한쪽 발자국의 주인공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여기를 보세요 이때가 제 인생 중에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자기 혼자 걸었다며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발자국을 잘 보아라 이것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네가 제일 힘들었을 때에 내가 너를 안고 걸었단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한번 이 세상에서 나서 살다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해변을 걸은 사람이 모래 위에 흔적을 남기듯이 한번 살다가 간 인생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훌륭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많이 했다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 후세에 귀한 믿음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던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에 이어 오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함께 살펴봅니다.

 

“믿음으로 ... 나아갈 새”(11:1)

 

믿음은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할 때부터 믿음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1-3).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인생여정에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에게 비전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담겨진 약속을 마음에 품으며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따진다면 모태신앙도 아니요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섬긴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공회 중에 앉은 무리들에게 증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7:2-3)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살던 지역은 갈대아 우르로서, 바벨론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우상을 숭배하였고, 죄악이 만연한 곳이었기에 아브라함도 어려서부터 우상에 둘러싸인 채 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있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더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되어 하란을 떠납니다. 아브라함 가족이 하란에 60년을 머물렀으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을 때는 15세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의미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데라가 죽은 후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믿음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사람들이 자기의 삶의 터전을 떠나 잘 알지 못하는 곳으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칫하면 낭패를 당하거나 삶이 불안정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지금까지 살아온 이 세상의 방식을 떠나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무조건 떠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고 하시며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약속이 담겨 있습니까?

 

1) 너는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노년이 된 지금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지 알 수 없었지만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자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네 이름이 창대해질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물질의 복, 현세의 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복, 신령한 복, 영원한 복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됨으로 그가 얻을 명예와 영광을 있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메시아가 날 것이며 그는 온 인류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3)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아브라함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갈 3:9)는다고 했습니다.

 

-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가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본 적도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자기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의 떠남이 대단했던 것은 그가‘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노아도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가야할 곳을 미리 보고, 가야 할 길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기꺼이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75세가 된 할아버지가 정든 고향,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 커다란 모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그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모험을 하게 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습니다. 요즈음처럼 internet를 통하여 갈 곳을 미리 알아볼 수 없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거나 지도를 찾으며 사전 조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직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아직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것처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에 담겨진 약속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루어 질 때까지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다림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의 갭이 너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눈앞에 놓인 현실을 인하여 의심하거나 그 약속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여정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같이 길을 떠났는데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 길을 가는 동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그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사람을 좇아갔던 롯은 낭패를 당했습니다. 나중에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 땅에 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비가 내릴 때 도망쳐 나오던 롯의 아내는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고, 소알이라는 작은 성에 피신했던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부끄러운 관계를 통하여 모압과 암몬이라는 두 아들을 낳고 영원히 저주받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에 기초한 소망을 가지고 길을 떠났기에 그는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 장막에 거할 새”(11:9-10)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난 것도 믿음의 행위였지만 지시한 땅에 도착해서 삶을 시작한 것도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때 가나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한다고 가나안 거민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아브라함에게 호락호락 내어줄리 없습니다. 아내인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할 곳을 확보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서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 동굴을 구입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첫 소유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거주한 것은 그곳이 그의 땅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집을 짓고 정착한 것이 아니라 ‘장막에 거했다’고 합니다. 텐트를 치는 것은 언제든지 걷고 떠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살이를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자와 건축자가 되셔서 지으실 성(하나님 나라)이 있음을 믿었기에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절을 보면 누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까? 사라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개역성경은 사라가 믿음이 있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을 사용하였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집니다. 많은 성경들이 사라를 주어로 번역합니다. 성경에 따라서는 사라를 주어로 하거나 아브라함을 주어로 할 수 있다고 하며 두 가지 번역을 다 소개하기도 합니다. NIV가 그렇고 표준새번역이 그렇습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사라의 믿음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라는 그의 몸종인 하갈과 갈등을 벌어다가 두 번씩이나 그를 쫓아냅니다.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늙었고 아브라함도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며 웃다가 들켜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창 18:9~15). 또한 ‘잉태할 수 있는’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전형적으로 남성의 생식 능력을 가리키는 관용구입니다. 12절에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이라 할 때 ‘죽은 자’나 ‘한 사람’은 다 남성명사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주체로 하여 표준새번역에서 번역한 것을 보면 ‘비록 그는 늙고 그의 아내 사라 역시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그는 생식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아브라함)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수많은’후손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는 수많은 후손이 생겨난 것이 기적적인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늙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면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도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밝히 보여주실 때 믿음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11:13-16)

 

‘믿음을 따라 죽었다’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계속 믿음을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말할 때 주로 땅과 자손의 복을 뜻합니다. 그런데 족장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즉 땅과 수많은 후손을 죽기 전에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끝내 그 땅의 주인이 되지 못했고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원래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사기 위해 헷 족속에게 한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 23:4) 하면서 매장지를 팔라고 하였습니다. ‘외국인’이란 외지인을 뜻하고, ‘나그네’란 그 땅에 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들이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면서도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본향을 찾는 사람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족장들의 믿음과 히브리서 공동체의 신앙을 동일시합니다. 족장들의 믿음도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을 미래의 소망에 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족장들이 바라본 것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떠나온 본향을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은 아브라함이 족장으로 살던 장막과 대조되는 영원한 성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1)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 명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부족사회였습니다. 부족원들의 숫자가 많아야 힘이 강헤서 부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향과 친척 아버지 집은 아브라함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정함에 있어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땅의 번영과 명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않고, 장차 뵙게 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산 그들을 하나님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자기의 갈 바를 알지 모를지라도 자기를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2)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하나님은 이미 늙어 경수가 끊어진 사라의 몸에서 약속의 씨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얻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죽은 자와 같던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와 같은 후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믿음을 가지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나라를 만들고 민족을 이루는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3)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붙들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기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떠나온 고향에 비하면 불편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점입니다. 그는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기업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들뿐 아니라 바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에 들어갈 자격도, 능력도 없는 인간을 위해 그분을 믿을 때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듯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은 참된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리라는 것과 자신이 믿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믿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며 하늘의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의 삶을 깨닫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을 향한 미련과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단지 나그네요 외국인임을 고백한다면 지금 정리하고 비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확신하는 참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교제가 있을 때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믿음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기도하고 헌신하는 가운데 때를 따라 임하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함께 모든 성도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삶을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며 훌륭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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