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8-12절(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 이준원

by Preacher 2023. 6. 9.
728x90
반응형

히11장 8-12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준원 목사 2015.4.19.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제가 어린이 주일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찬송곡들 중 한 곡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분들은 아마 아실 겁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대요. 오른팔 들어요, 왼팔 들어요, 고개를 흔들어요, 히프를 흔들어요...” 먼저, 아브라함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었고, 또 나중에 그두라를 통해 낳은 6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창 25:2). 그들 중 하나는 키가 크고 나머지는 작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과 그 아들에 대해 노래하면서 왜 우리가 오른팔, 왼팔, 고개와 히프까지 흔들어야 하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어릴 때 그 노래를 율동과 함께 재미있게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고도 불립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믿음의 근거는 말씀이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에서 이끌어 내어, 그를 가나안 온 땅에 두루 다니게 하였으며, 자손을 많이 보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수 24:2-3, 새)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던 집에서 태어나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을 만큼 어떤 위대한 일을 행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느 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오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들이 나오는데, 구약의 창세기 11장 이후에 주로 나오고 또 신약에서도 몇 군데 나옵니다. 그 중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설교를 한 내용에 아브라함이 언급됩니다. “스데반이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에,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어디든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 하셨습니다.” (행 7:2-3, 새)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먼저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과 부르심은 언제나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심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알아서 찾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 가장 먼저 외우는 암송 구절이 이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롬 3:10-11, 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

 

이때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시는 땅이 어디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미리 정보를 주시고 떠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직 보여주신 것도 아니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신 것도 아니고,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무조건 가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그냥 가라.”

“예? 아니, 갈 텐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그러니까 가라. 무조건 가라.”

 

이게 말이 됩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가라니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8절)

 

이때 아브라함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판단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 땅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떠납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의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환상을 본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둡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당시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라크 지역)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것이 믿음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맹목적인 신앙이나 광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근거하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2. 믿음의 표현은 순종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실제적인 믿음이었고, 그것은 순종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행동을 낳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결단은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기서 조기로 이사 한 번 하는 것도 얼마나 복잡하고 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까? 그런데 전혀 모르는 땅을 향해 떠난다는 것은 정말로 굉장한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는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엄청난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2:2-3, 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떠나라 하셨을 때 분명히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떠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순종의 행위를 낳습니다. 믿을 때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너무나 귀하게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인 이삭에게 동일한 복을 약속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창 26:5, 새)

 

우리 믿는 사람들이 평생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의 교훈은 바로 순종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도 순종을 배웠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완전한 순종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삶의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 그 과정을 통과하는 가운데 순종을 배워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향은 떠났지만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못 떠났습니다. 물론 “친척”이 “난 곳”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은 분명히 집안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창 12:7). 그것은 이곳이 약속하신 바로 그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상하게 점점 남쪽으로 가다가 결국 기근이 오니까 그냥 이집트로 옮겨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온전하지 못한 순종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그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아내를 빼앗길 뻔했고, 나중에 많은 선물을 받아서 나왔지만 그 중 하갈이 있었으며,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아랍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이스마엘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지금까지도 갈등이 있습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자유가 없어지고 나를 옭아매는 것이기 때문에 믿기가 싫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특히 떠나라고 하시거나 버리라고 하실 때는 언제나 대안을 가지고 그렇게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고 버릴 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해지고 행복해지고 더 큰 유익과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땅을 버렸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파산했습니까? 오히려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떠났다고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버렸다고 망한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버려라. 떠나라. 그만 두어라. 이것을 해라.” 하고 명령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기 때문에 망설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왜 이것을 제게서 가져가려고 하십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 더 좋은 가나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아직도 갈대아 우르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버리라고, 떠나라고, 정리하라고 하시는 죄가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라는 부담을 자꾸 주십니까? 왜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더 잘되게 하시려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버려할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끊어야 할 죄를 끊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야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냥 쥐고 있으려 고집을 부립니다. 그 고집 때문에 엄청난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큰 대가를 지불하면서 순종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믿음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믿는다면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젊은 남녀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서로 자주 만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자주 전화를 합니다. 전화할 때마다 서로를 향해 “사랑해”라고 속삭입니다. 하루는 여자가 남자에게 오늘 저녁 만나자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바쁘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하니까 혼자서 저녁식사를 만들어 먹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같이 만들어서 먹자고 하니까 “너랑 같이 먹으면 불편해”라고 합니다. 이게 사랑을 하는 겁니까?

 

다음 날 여자가 남자에게 또 만나자고 합니다. 남자는 또 바쁘다고 합니다. 뭐하냐고 하니까, 같이 노는 그룹이 있는데 거기 예쁜 여자들도 많기 때문에 자기는 거기에 꼭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니까 오빠 믿지?”라고 합니다. 이게 사랑이 맞습니까?

 

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사랑하는데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일부러 아프게 하는 일만 골라서 합니까? 그가 하는 행동이 진짜 그의 마음입니다. “사랑해”라고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 자기 혼자 음식 만들어 먹는 게 편하다는 마음, 다른 여자들과 놀겠다는 마음이 진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심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음과 함께 강조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 14:23, 새)

 

그리고 말씀을 안 듣는 사람들에게 답답하셔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눅 6:46, 새)

 

그런데 어떤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거나 의무감 때문에 순종합니다. 특히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일수록 의무감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빠지고 놀러 가고 싶은데 뭔가 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옵니다. 아니면 괜히 놀러 갔다가 벌 받을까봐 억지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끌려 나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까? 성경이 알려주는 순종은 믿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며 첫 걸음을 내딛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배우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3. 믿음의 결과는 축복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인도하기 원하셨던 곳은 결코 가나안 땅이나 이 세상의 어떤 장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곳은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6절)

 

갈대아 우르에서 그곳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이곳을 떠나라.”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그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민되었겠습니까? 그때는 요즘처럼 이사를 하는 것이 쉬운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 떠나면 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애를 걸고 떠난 행동은 모험이며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3절)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분명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말은 어렵게 살았다는 뜻도 되지만, 본향이 따로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는 천국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언제나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목적도 없이 어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에서의 삶을 거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이단들은 재산을 다 팔아서 자기들에게 바치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닙니다.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를 보면 분명히 물 위에 있지만 물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물에 속해 버리면 물속에 가라앉아 배의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물 위에 떠 있을 때 배로서의 기능을 다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분명히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해석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어리석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지금 당장 눈에 안 보인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막에 거했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9절)

 

당시 유목민들은 물론 장막에 거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롯이 양들이 많아져서 서로 갈라질 때 보면, 롯은 분명히 들을 택하여 갔는데 나중에 보니까 도시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도 마음만 먹으면 도시에서 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도시에 살기로 마음만 먹었으면, 그와 같이 부자가 도시에 큰 기부를 하면 얼마든지 살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막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에 거하기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이 자신의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돌아갈 본향을 바라며 살았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0절)

 

장막은 어떤 것입니까? 언제든지 옮기기 쉽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장막(텐트)에 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성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을 향해 믿음으로 떠났고, 그 과정을 믿음으로 걸었고, 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았던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2절)

 

마지막에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디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하늘나라입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 여행해본 곳들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천국은 거기보다 몇 백억, 몇 천억 배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그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하여 하늘나라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갈대아 우르는 떠났지만 중간에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이 하란 땅에서 아브라함은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반만 순종했을 때, 그것이 그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순종 때문에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을 때 시간을 버는 것 같고 돈도 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생의 낭비인 것입니다. 실제로도 시간 낭비, 돈 낭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온전한 순종이 축복입니다. 가끔 보면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안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특히 불의의 사고나 안 좋은 사건으로 죽은 분들의 장례식은 너무나 침울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이제 그분의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 분명히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됐다고 생각합니까?

 

사실 그 자리에서 가장 안 된 사람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의 시신 앞에서 안됐다고 생각하면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안 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게 될 텐데, 먼저 천국에 간 사람을 향해 안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최대한 천국에 안 가려고 버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만 바라보며 나아갔던 아브라함에게도 수많은 유혹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갈까? 이 길에서 떠날까?’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상급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 믿음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아갔습니다. 다른 모든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는 장막이 편했습니다.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는 장막 안에서 만족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앞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감격해 합니다. 마지막 영광스러운 부르심의 날을 기다리며 오직 하늘나라를 향해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그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시계가 하나인 사람은 시간을 정확히 알지만 시계가 두 개인 사람은 결코 확실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소리가 울려댑니다. 카톡, 삑, 따르릉, 딴따단다다다, 어떨 때는 뽕짝도 울리고...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도 목표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 크게 부풀려져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지도자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초심에서 빗나가버린 삶 때문입니다. 부부가 불행한 것은 첫사랑에서 크게 벗어나버린 마음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토저(Aiden Wilson Tozer)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그렇게 산다면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용암처럼 치솟는 열정의 사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소망의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성공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해주십니다. 하나의 시계만 바라보십시오. 두 개의 시계는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