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장 1-7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준원 목사 2015.4.12.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인도양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큰 해일(쓰나미)이 일어나 수십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또 그 몇 년 후 일본에서도 큰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중에 와서 보니까 사람들의 시체는 많았지만 야생동물의 시체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야생동물은 지진의 진동을 미리 느껴서 대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고 똑똑한 것 같아도 짐승보다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쥐나 새는 지진이 나기 전에 미리 옮겨갑니다. 오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있다가 큰 재앙을 당하여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짐승을 너무 우습게 여기면 안 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무엇인가를 근거로 나름대로 판단해서 행동하고 살아가는데, 그 모든 판단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판단의 기초가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은, 진짜 중요한 핵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진짜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림자를 따라가다가는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별명이 붙은 장들이 있는데,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 장’이고, 13장은 ‘사랑 장’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 장’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뭔가를 믿고 사는데 그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생명과 사망이 나누어진다고 말씀합니다.
1. 믿음의 본질
히브리서가 이해하기 쉬운 책이 아닙니다. 그런데 10장까지는 계속 제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11장에 오면 왜 갑자기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이 제사가 따로 독립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믿음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제사 행위 자체가 그들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가지고 와서 짐승을 죽여 피를 뿌릴 때,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오셔서 이루실 구원을 미리 준비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제사가 너무나 강력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구약의 피의 제사는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 핵심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이제 할 일은 오직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고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되고,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으라면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안 믿으십니까?”라고 하면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확신이 없습니까? 믿는 것은 알겠는데 그 외에 뭔가를 해야 하는 것에 자신이 없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 밖에 없는데, 과연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말을 잘못 사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보통 ‘믿음’이라는 말을 쓸 때는 내가 주체가 되어 내가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내가 무엇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신념이라고 하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교 때 철학을 전공했는데 그렇게 철학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유명한 철학자 중에 데카르트(Descarte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알고 보니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가 아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가 결국 한 가지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입니다. 아주 유명한 말인데, 대학을 다닐 때 교회에서 믿는 친구들끼리 이 말을 가지고 말장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Lovito ergo sum.”이라고 말도 안 되는 언어를 말하던 생각이 납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믿는 것이고 신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너무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심한 병에 걸려서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자신을 완전히 의사에게 맡깁니다. 전혀 의식이 없는 마취 상태에서 의사가 자기 몸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못 맡기면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의사가 마음대로 수술하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 요즘 대리운전이 많은데,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가 운전을 못하니까 대리운전을 부릅니다. 그리고 운전을 잘하는 직원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겁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도 말하는 것이지만, 믿음이란 ‘기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기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 정말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3절)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일단 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땅, 사람, 물건 등, 많은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진짜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이 세상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중요한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건물 안에 있는데, 이 교회 건물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것은 기둥이나 철근이나 콘크리트인데 그것들은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은 벽이나 이런 장식들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그러한 것들은 진짜로 건물을 지탱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부를 장식하는 재료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많은 것들은 모두 내부 장식에 불과하고, 온 세상을 이루는 진짜 실체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인정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집이라든지, 성공이라든지, 학벌이라든지, 그런 것만 믿는다면 결국 망하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라는 말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집안의 장식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붙들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붙드는 사람은, 마치 자기 집도 아닌데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며 엄청나게 비싼 장식으로 꾸며놓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어떤 집에 엄청난 돈을 들여 내부 장식을 꾸몄는데, 주인이 와서 나가달라고 하면 모두 놓고 나가야 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권력이나 학벌이나 직장이나 사업이나 성공 같은 것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좋은 학교를 가려고 하고 좋은 직장을 잡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이 바로 벽의 장식을 붙잡고 사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고 할 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 편의 설교에도 이렇게 많은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많은 내용 중에서 딱 한두 가지만 잡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일주일 동안 직접 적용하며 말씀대로 살아보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삶입니다.
2. 믿음으로 산 사람들
이렇게 말하면, ‘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되는구나. 다른 건 안 해도 되나 보다.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안 보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니까 아무래도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하거나 듣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려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사람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사람을 보면 실망하니까, 하나님만 보고 신앙생활을 하세요.” 이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지만 맞는 말도 아닙니다. 사실 제대로 된 성도이고 교회라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으십니까? 우리를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주님의 몸이라면 주님이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믿는 우리를 향해 미쳤다고 하거나 자기만 잘난 체한다고 하며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은 믿음으로 살았던 세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해줍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1) 아벨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4절) 우리는 아벨이 무엇을 믿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가인과는 다른 제사를 드렸고, 그것 때문에 가인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 가인은 하나님께 인색한 마음으로 드렸고 아벨은 풍성한 마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아벨의 것을 받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농담이겠지만), 하나님이 채식보다는 육식을 좋아하셔서, 곡식을 바친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고기를 바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결코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은 자기 방식대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 자기 안의 감정이나 생각을 가지고 자기 열정으로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나 천주교의 예를 보면, 바로 자신의 정성이나 종교적인 열심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 나와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여 쫓겨난 다음에, 아담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그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겠습니까. 자기들이 죄를 지었고 결국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나 후회된다고 수도 없이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시면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 짐승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혀주셨다는 것도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첫 번째 희생이었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짐승이 대신 죽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짐승을 죽여 바쳐야 한다고 배운 것입니다.
아벨은 아담을 통해 들었던 말씀을 믿고서, 어떻게 보면 야만적이고 끔찍한 방법이지만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 자기 생각에 가장 좋은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의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고 복을 받았지만, 가인은 그 예배 이후에 전혀 은혜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마음이 악해져서 동생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오히려 가인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멋진 예배를 안 받아주시고, 아벨의 저 시시한 제사는 받아주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며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결과에 대해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4)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었으나 말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아벨은 비록 죽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죽었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말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벨이 ‘하나님, 저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저의 원한을 갚아주십시오.’라고 호소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가인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게 막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결코 억울하니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남들은 구원하더니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정말 메시야라면 거기서 내려와 봐라.” 사람이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도 괴롭지만,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사람들이 조롱할 때 예수님이 힘이 없으셨습니까? ‘잠깐 타임아웃!’ 하고서 내려와 다 쓸어버리고 다시 올라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돌아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힘이 있는데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저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옆에 달렸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두 사람이 모두 다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언제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이 용서의 기도를 하셨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받아달라고 했고,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멸망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피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피뢰침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칠 때 피뢰침이 있으면 거기에 떨어지므로 주변에는 벼락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심판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떨어짐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다른 것으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에녹
에녹이 살던 당시는 온 세상이 극심하게 방탕하고 타락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방탕하고 타락하게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실컷 먹고 즐기고 모든 것을 누리고 좋은 데 여행하고 다 해보자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어떻게 살았다고 합니까?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5절)
에녹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창세기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에게 하나님은 실제적인 분이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론이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지만, 에녹에게 하나님은 실제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면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힘으로 살게 됩니다. 자기 능력과 돈과 성공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말씀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이 바로 에녹처럼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라고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데려가 버리셨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진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 진짜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좋은 것은 거기에 다 있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속아 곧 없어질 건물에 다 투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분이 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붙들며 살면 됩니다.
3) 노아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7절)
노아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는 큰 홍수도 없었고 큰 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얼마 후 큰 홍수가 내려 온 세상을 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그런 비가 내린 적도 없고 홍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멸망시킬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모든 삶을 투자하여 홍수를 대비한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노아의 이런 행동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비는 무슨 비냐고, 무슨 방주를 짓느냐고 비웃었습니다. 실제로 120년 동안 다른 일을 했으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무려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7절에서 노아가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죽고 노아 자신과 가족들만 남았으니 이제 이 세상은 정말 노아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은 노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진짜 철근과 기둥으로 된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삶
결국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배웁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믿지 않고, 비록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많아도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절)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이 체험되어야 합니다.
셋째,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고 복이고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을 사랑하여 붙드는 자에게는 기도 응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셔서 세상에서 탁월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그 말씀대로 살아, 참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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