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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3장 14-16절(영구한 도성) - 블레히

by Preacher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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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3장 14-16

영구한 도성

이태영 목사 블레히 목사 2013년 7월 7

베를린선한목자교회 http://www.mogza.com

 

올 한 해의 반의 시간이 지나간 이 시점에서 2013년도 독일교회 금년도 표어를 다시 한번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브리서 13장 14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심으로 장차 올 그것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찾는 것은, 찾을 수 있을 지 없을 지 모르는 불확실한 어떤 보물찾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장차 올 미래의 도성에 관하여 너무나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아씨시의 성자인 프란치스코의 삶을 돌아보며, 왜 우리가 목숨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여 이 도성을 찾아야 하는 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누어 드린 그림을 보시면 설교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1182년 이탈리아 아씨시에 지오바니 베르나르도네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 도시에서는 유복한 가정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는 포목 상인이었고 열심히 재주껏 돈을 벌어 작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리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정치와 종교 사이의 세력 다툼으로 누가 더 위에 있느냐 하는 권위의 문제를 가지고 황제와 교황 사이에 치열한 논쟁과 극심한 암투를 계속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자 전 유럽이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혼란 속에서 법이 악용되고 폭동이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도시들은 제 각기 자체 시민군를 양성하고, 심지어 작은 지역에서까지도 민병대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략질은 다반사였고, 여기 저기에서 무자비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동맹관계도 수시로 변했습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뒤집힌 것입니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세대와 교회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저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땅을 갈망하며, 국교와의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끔직했던 시대로 한번 돌아가 보십시다.

 

집에서는 지오바니를 프라체스코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주 영리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씨시 귀족 자녀 중에서는 귀감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트랜드 세터", 즉 유행의 선도자였습니다. 그는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잘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 돈으로 많은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이 시간에 그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모두 다 살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위기에 처했었는지 그리고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고향 아씨시와 인접 도시인 페르지아 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앞장서 참여합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포로생활을 한 후 풀려나 큰 깨달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전쟁에 나갑니다. 이번에는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신앙을 앞세운 교황군 십자군에 합류하여 전쟁에 나갑니다. 그는 다시 큰 병을 얻어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참회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감금시킵니다. 아버지의 의견에 따르면 프렌체스코는 정신병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상 출타하자 그의 어머니는 프란체스코를 풀어 줍니다. 출장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아버지는 아들을 상대로 정식으로 고소합니다. 그러나 시의 집정관들은 이 일은 자기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하며 이 사건을 주교의 권한인 종교 법정으로 넘깁니다. 법원에서 프란치스코는, 본인은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노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 금년도 표어를 가지고 "나는 장차 올 도성을 찾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미 오늘 그 도성의 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는 44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을 마감하여, "아씨시의 성 프라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가 사망한지 단 2년 만에, 그를 성자로 선포하였고 아씨시에 그를 추모하기 위한 교회 건축을 추진하였습니다. 화가 조토는 여러 장인들과 직공들을 동원하여 이 교회 건축의 큰 공사를 담당했는데, 그는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28 폭의 그림으로 그려 본당 정면 위쪽에 둥그렇게 사이클 형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이 그림 중 5번째 그림을 이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가 조토는 이 그림을 통해 프란치스코 삶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요? 조토는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를 이 드라마의 한 가운데 서있는 구경꾼으로 간주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가 주교 앞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증인인 셈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헤프게 써버린 모든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공개적으로 진행된 주교 재판장에서 아버지와의 부자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마지막 물건을 자기 아버지의 발 앞에 던집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정말 극적인 장면입니다. 여기에 극한 대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한 가정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아무도 반발하지 않고 따르던 그 사회에 대한 결별을 선언하고 나온 것입니다. 심한 불화는 양분 대립 상태로 치닫습니다. 이 장면을 그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과 오른쪽에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떼를 지어 서 있습니다. 그림 왼쪽 편에는 성난 사람들이 보입니다. 성난 사람들의 맨 앞에는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가 서 있습니다. 오른 편에는 아씨시의 주교 지오도가 서 있습니다. 한 장의 천으로 그는 프란치스코의 벌거벗은 몸을 가려 줍니다. 두 무리 사이로 파란 하늘이 붕괴되어 내려 옵니다.

 

프란치스코의 몸을 가리고 있는 천도 파란색입니다. 하늘색이 아래 부분으로 내려 오면서 진한 남색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건물을 바라보시면 왼쪽에 있는 건물은 뒤로 밀려 보여 배경처럼 보이고,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앞으로 튀어나와 공간적으로 가까워 보입니다. 이 입체효과로 그림의 정면과 후면이 선명해 보입니다.

 

비록 화가 난 아버지가 그림에서 강인한 인물로 부각되어 장면의 중앙까지 돌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뒤쪽 배경에 속합니다. 왼편의 장면은 이 도성이 우리의 영구한 도성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오른편은 장차 올 미래의 도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오늘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이제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그의 왼쪽 손에는 겉옷을 걷어 들고 있습니다. 그가 격렬하게 장면의 중앙으로 서둘러 뛰어들어 집어 든 것 같습니다. 오른 손은 주먹을 움켜 쥐어 프란치스코에게 한 방 날릴듯한 기세로 쭉 뻗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시장이 만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장이라는 것은 복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중세 미술에서는 분노를 표현할 때 노란색을 사용했는데 독일말에 "gelb anlaufen vor Wut"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화가 나서 (얼굴이) 노랗게 (질려) 달려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옷이 창백한 노란색입니다. 옛날에 이 색깔은 미술에서 상징적으로 증오와 배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당시의 그림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를 노란색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에 반해 그림 오른 쪽을 보시면 황금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황금색은 하나님 나라의 색깔이며 장차 올 도성의 색깔입니다. 함축적으로 표현된 이 장면 속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 그의 업적은 무엇인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전설과 함께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약 24세 때, 아마도 아주 꽤 오랜 기간 동안 아씨시와 그 주변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복원하는 일을 돕기 위해 아버지 사업처에서 돈의 일부를 몰래 떼어 냈던 것 같습니다. 2년 전 저희 빌립 교회도 지붕이 무너져 재정적 위기에 있었는데 그가 그와 같은 교회들을 도운 것입니다.

 

교회들이 붕괴 위기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프란치스코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소송을 제기합니다. 시의회에서는 자기들이 관여할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소송을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판결을 내려 달라고 주교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자 주교는 아버지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고 프란치스코에게 유죄를 선고합니다. 판결사유는 아무리 그 의도가 좋다고 할 지라고 결코 그러한 도둑질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에게 돈을 갚으라고 판결합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돈뿐만 아니라 그가 입고 있던 값비싼 겉옷을 찢어 아버지에게 던져 줍니다.

 

제가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 그림에는 정말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이 경우에는 비극적으로 끝나고 있는데,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단지 수 많은 부모와 자식들간의 갈등만을 다루고 있는 것인가요?

 

프란치스코은 정말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눈빛을 보라고 간청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자 회청색 옷을 입은 시민 하나는 눈빛을 미리 외면하고 마치 쥐구멍이라도 찾는 듯한 모습입니다. 거의 모든 동시대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를 이해하고 생각이 바른 작은 무리의 사람들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그림 속에 담겨있는 본래의 주제, 즉 하나님께서 프란치스코를 이러한 방법으로 부르신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세계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정신적인 위기가 생길 때마다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토가 자기 작업실에서 이 그림을 그린 지 100년이 지난 후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시작된 프란치스코의 운동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교회와 사회 곳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의 도성이 어떻게 출현하게 될 지를 궁금해 합니다. 우리의 도성들은 사막과 같이 변하고 영적으로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끔직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듭니다. 그러나 장차 올 도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특히 우리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화가는 아씨시에서 일어난 세대갈등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에 발생했던 분열의 심각성을 알리고 소위 말하는 기독교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믿음이 무엇인 지에 대한 질문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 프란치스코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의 삶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누가, 예를 들어, 우리 젊은이들이게 담대히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으십니까?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 속의 풍성한 내적 자유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된 시대정신을 따라 살고 마음 가는 데로 즐기며 살라고 유혹하는 속삭임에 쉽게 넘어가는 우리의 감정과 사고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으려는 영적 의지가 필요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경제적인 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장차 올 도성은 정말 달라야 합니다.

 

그 도성은, 경제적인 성장에 성장만을 추구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절제의 세계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이 "절제의 세계문화"란 말은 이미 80년대 말에 토론 쟁점이기도 하였습니다. "해결책을 생각하고 그럴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할 힘을 가지고 나아간다. 그러나 의지가 있다 하여도 절제 없이는 아무것도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친구들이 절제와 고행을 통해 이미 800년 전에 충격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에 대한 갈증이 결코 물질적인 것들로 해소될 수 없다는 진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복음으로 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우리의 내적 삶이 점점 더 풍요로워 지기 때문입니다. 이 부유함을 놓고는 그 무엇과도, 그 누구와도 결코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부유함은, 예를 들어, 함께 찬송하고, 함께 찬양하는 가운데 억제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불러 일으키는 그러한 마음의 부유함입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보겠습니다. 내려치기 위하여 쳐든 아버지의 팔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기도하기 위해 손을 치켜 올린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십시오. 모여든 사람들 배경 앞쪽의 한 사람은 뭔가 딴청을 부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이, 단지 그만이 머리 위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짓으로 그의 눈빛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정확히 아버지 머리 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관한 설명 가운데 우리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프라치스코는 아버지 재산 상속을 포기하고 그의 옷을 벗으며 아버지에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가 나를 쫓아 내었음으로, 이제부터 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확신을 가지고 부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프란치스코를 인간적으로도 외롭게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서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이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정확히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되어 주 안에서 대가족을 이루길 원하다"는 말의 뜻을 깊이 새기고 교회의 사명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조토가 그린 그림의 이 핵심 장면 속에서, 본질적인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제가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출애굽의 의미와 옛 관계를 벗어버리고 자유를 얻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육신의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동시대 모든 다른 시민들이 인정하는 정말 정직한 시민이었고 강직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런 사람과 결별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림이 점점 더 선동하는 분위기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기에서 이제 출애굽 하라고 프란치스코는 외칩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매료되어 있던 그 세계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새로운 도성을 세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구조자이며, 교회 복음의 개혁자입니다. 장차 올 도성을 찾는다, 그것을 얻고자 힘쓴다는 말은 오늘 바로 영적으로 우리가 그 도성에 입성하여, 완전히 새롭게 바른 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1226년 성 프란치스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그는 그의 짧은 삶을 불태워 소멸하여 사라졌습니다.

 

그가 태운 그 불은 약 20년의 세월 동안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갔지만, 그 불은 이 세상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800년이 지난 지금, 마치 장차 올 미래의 도성에서 비쳐오는 빛처럼 우리의 시대에도 그는 빛을 비치며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러고 살아"라는 말의 유혹에 따라 살다 보면 우리에게 장차 찾아 올 것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암울한 미래뿐이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2013년 표어인 이 말씀을 올해 나머지 시간 동안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아멘"으로 화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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