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3장 1-5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최태선 목사 007.9.23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올해도 변함없이 추석을 맞아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마다 추석의 새로운 풍속도들이 생겨납니다.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던 일들도 있고, 또 예전의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편법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추석이라는 긴 연휴를 맞아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파고드는 갖가지 상품들이 생겨났습니다. 벌초대행 업체가 생겨났습니다. 복잡하고 힘든 제사 음식을 준비해주고, 병풍과 제기까지 동원해서 완벽하게 제사준비를 해주는 제사 대행업체도 생겨났습니다. 추석 때 아이들이 모여 뛰기 때문에 아래층 때문에 걱정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아이들을 맡아 돌보아주는 대행업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각종 레크리에이션뿐만 아니라 마술까지 동원해 아이들을 돌보아줍니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바쁜 사람들을 위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영상편지를 준비해주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비디오로 제작된 영상편지와 함께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까지 배달해주기도 합니다. 또 연휴기간 동안 개를 돌보아주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한 외국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개들까지 영어공부를 하는 희한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갖가지 모습들을 바라보며 필요를 파고드는 사람들의 놀라운 창의력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창조의 하나님을 닮아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세상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정말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지어졌는가? 탄사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조그만 옥수수 한 알을 집어 올리는 코끼리의 코, 작은 들꽃의 완벽한 아름다움, 깊은 숲 속에 감추어진 수려한 폭포,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하고도 향기로운 과일의 맛,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분명 그것은 놀라운 솜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닮은 창의력이 추석 대목을 노려 발휘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활기 있고, 생기가 넘치는 창의적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러나 저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돈을 향해서는 저렇게 창의적일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활기 넘치고 창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직 교회의 전통과 관습에 매여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각할 자유마저 박탈당한 어리석은 모습이 바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 저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봅니다. 종교에 매여 진정한 믿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권위를 지니고 있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일들이 기독교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한 상징이 그 상징하는 실재를 모호하게 할 정도로 우리를 현혹시키고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힘이 있음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리고 실재를 모호하게 하는 그 일이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를 포함한 모든 공예배의 출석, 평신도(감히 성직자에게 도전할 수 없는), 집사 안수집사, 권사 장로와 같은 상징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상징적인 겉모습을 실재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겉모습과 실제는 거의 같지 않습니다. 지구는 겉으로는 평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추론과 관찰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태양은 겉으로는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추론과 관찰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결론내립니다. 우리 삶의 단순한 영역에서는 직접적인 관찰과 본능적인 반응이 실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더 복잡한 영역에서는 겉모습과 실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엄밀한 추론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삶은 복잡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최고의 삶의 형태는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런 삶의 겉모습은 항상 그 가장 깊은 실재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성입니다.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코앞에 놓인 것과 지난 세월을 통해 변화된 것 사이를 합리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물의 요점을 잃고, 막다른 길에서 수렁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요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마치 강아지와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길 봐라!”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강아지는 가리키는 것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코를 대고 킁킁거립니다. 강아지에게는 가리키는 손가락이 어떤 표지가 아닙니다. 그저 살결과 냄새와 맛을 지닌 손가락일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그동안 세운 상징들이 실재를 가리키는 표지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것만 바라보고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겉모습만 보는 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유로운 삶의 실재에 반응할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강아지 그리스도인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하는 일이 최종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지성으로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것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성은 놀라운 선물이며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기 위해서, 분별과 무분별을 판단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그 세대의 인기 있는 정신이상과 지속적인 제정신 상태를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일 때가 있습니다.
겉모습이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 종교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성을 사용하지 않으면 겉모습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의 습관적이고 생각 없는 상태를 뿌리치고, 실재를 분별하고, 인간관계들을 점검해줄, 다시 말해 우리의 생각할 자유를 훈련하게 해줄 자극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1세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그들의 생각할 자유를 훈련하게 할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방금 전에 말씀드린 여러 가지 상징들에 얽매여 진정한 실재를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교인들 또한 할례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섯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일깨웁니다. 그의 질문들은 종교의 겉모습을 통과하고 내면의 실재를 보게 하는 엑스레이와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던진 그 질문들을 통해 우리 또한 우리를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는 균형 감각입니다.
제일 먼저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질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단 하나의 굉장한 역사적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독특하고, 광범위하고, 기념비적이고, 전례가 없는 일이고, 비길 데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공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작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1세기 정치 역사에서 일어난 훌륭한 용기의 모범이 되는 작은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역사의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모든 역사의 중심입니다.
실재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균형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 있는 사람은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려냅니다. 어떤 것은 덜 중요한 것이므로 적당히 넘기고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은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균형 감각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백 원짜리 동전과 만 원짜리 지폐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중요한 일들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다면 우리의 인생은 당연히 좋은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다른 모든 사실에 우선하는 핵심적인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그것은 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진전이란 측면에서 여전히 할례와 상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능력과 의미에 있어 이전 상징이었던 할례를 능가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십자가를 종교적으로 하찮은 목록으로 취급하고 할례를 더 중요한 것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의미한 바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균형 감각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십자가 사건은 핵심이며 근본적인 실재입니다. 그것은 부가적이거나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며 최우선적인 것입니다. 예비적인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것입니다. 배경 음악이 아니라 핵심이 되는 드라마입니다. 십자가는 그 진리를 알려줍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을 향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균형 감각이 있는가?’ 우리는 과연 무엇이 중요한 가를 판단하는 균형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만일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하게 주시는 주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경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두 번째로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성령은 우리 삶 가운데서 당신의 삶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성경적 용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 멀리에 계신 익명의 존재, 혹은 책에 설명된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삶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선물입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경험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성찰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정신이 나간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어서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반복해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처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툴거나 유익이나 잘못된 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제정신이란 말은 우리의 경험을 기억하고 유지하고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 경험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믿음은 중요한 경험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며 당신의 삶을 우리와 공유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입니다. 이 기본적인 신뢰는 우리의 모든 관계와 지각을 통해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것을 잊고 있다면 이는 실재에 기본이 되는 것을 잃고 결코 통합적으로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과 동떨어진 감정이나 단편적인 잘못된 기억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다시 믿음으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게 해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상식입니다.
사도 바울의 세 번째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상식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상식은 정상적인 사람의 한 측면입니다. 상식은 매일의 실재와 관련하여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고도의 지적인 능력, 잘 훈련된 지성, 광범위한 지식이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정신이상인 명석한 지성들도 있습니다. 네로는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고도의 지적인 능력과 잘 훈련된 지성을 소유하였습니다. 정신이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은 우리의 지성을 매일의 실제적인 일에 활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되는 삶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퍼부어주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우셔서 용서에 이르는 길을 제공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은 본능과 충동의 삶을 넘어서는 분명하고 엄청난 개선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시작합니다. 자유로워집니다. 희망으로 넘칩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강렬하고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조심스러운 불신일까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음의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무엇이든 피하는 근심에 찬 삶일까요?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은혜의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하나님과 교섭하는 일일까요?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분 적분을 배웠으니 이제부터 손가락으로 수를 셀 거야.”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드린 말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이 같은 일들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머리를 쓰라고, 생각하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상식은 은혜의 복음을 저버리는 일을 막아줄 것입니다. 복음에 계속 뿌리를 두고 있는 한, 우리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위대한 진리들을 매일의 일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굳게 잡고 있을 때, 우리는 일할 때나 놀 때나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문을 읽을 때나 텔레비전을 볼 때나, 돈을 쓸 계획을 세울 때나 가족과 친구들의 요구와 필요에 응답해 줄 때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생각하며 사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경우를 들어볼까요? 가끔 티브이를 시청하다 보면 볼만한 프로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티브이를 끄고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을 누르고 있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리면 얼른 자리에 일어나 책을 집어 들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끝도 없이 리모콘을 눌러대면서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상식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네 번째는 가치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많은 괴로움은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의 가치관이 생겨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정신인 사람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분명하고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충동에 의해 움직이고, 상황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정신이상으로 감옥에 가 있습니다. 강간폭행으로 체포된 사람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합니다. “여자들이 너무 예쁘고 야하게 차리고 다녀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충동에 의해 움직였고 상황에 자동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건전한 가치체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재산보다 중요함을 발견합니다. 용서가 복수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참고 인내하며 견디면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꿔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가치관을 거부하거나 무시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가치관을 버릴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갈팡질팡할 것입니다. 가치관이 없다면 그것은 헛되이 사는 것입니다. 가치관을 잃으면 모든 유혹과 돈과 에너지, 시간에 대한 요구들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옳으냐? 혹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불을 보고 달려드는 하루살이와 같이 그저 반응할 뿐입니다.
가치관은 방향과 목적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우리 삶을 연결시켜 줍니다. 가치관은 사소한 유행의 절대적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고상한 목적을 위해 더 큰 목표를 향해 가는 자유를 갖게 해줍니다. 복음은 우리를 정상적이고 건전한 가치관에 맞닿아 있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정말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면밀히 살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하나님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이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흡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우리는 실재와 더 맞닿아 있을수록 제정신을 더 확실하게 차리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항상 넘치도록 풍요롭게 공급하시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이신 하나님의 실재와 맞닿아 있게 해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주시고’입니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코레게오’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아낌없이 축하의 춤을 추다’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게 공급되어 행복한 춤을 추고 있는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다’라는 단어로만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원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 전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늘 풍성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이 위대한 사실을 잊거나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격언이나 속담쯤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요롭게 공급하시는 엄청난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실재와 떨어져 있다면 우리 삶은 궁색해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결핍의 현상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온갖 방법으로 공급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분은 축복과 구원이 넘치게 하십니다. 이 실재를 기억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내려놓음의 의식으로 삽니다. 담대한 즐거움과 자유로운 소망과 자유로운 사랑으로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 실재와 맞닿아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최근 한 전염병 연구 전문의가 쓴 한 보고서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은 정신질환이며 이는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은 전 세계적인 전염병입니다. 지구 전역에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실재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놀랄만한 비율로 미쳐 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실재와는 상관이 없는 외형적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성은 더 이상 생각하는 데 이용되지 못합니다.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연결하는 데, 균형감각을 갖는 데, 경험과 맞닿아 있는 데, 상식을 활용하는 데, 가치관에 헌신하는 데,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이용되지 못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실재와 맞닿아 있게 합니다. 실재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와 맞닿아 있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랑하신 사람들과 맞닿아 있게 합니다. 소망을 포함한 모든 것과 맞닿아 있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더 성숙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미쳐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생각할 자유를 주는 복음을 가지고 있고, 복음은 그렇게 함으로 우리를 풍요롭고 건전한 정신 상태를 갖도록 성숙시켜줍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복음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진정으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실재와 맞닿아 있고 분명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실재와 맞닿아 정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불행하게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실재와 상관없는 외형적인 세상에 살면서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절망의 나날을 지내는 사람들, 입으로는 주님을 찬양하지만, 마음으로는 돈을 경배하는 사람들. 만일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강아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정말 우리도 강아지 그리스도인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 가운데 하나를 저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을 깨워서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세우는 것이 부족한 저를 목사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꿈을 꿉니다. 진정 자유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며 함께 삶을 나누는 그런 교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살며,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창의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며, 매 주일마다 새로운 예배를 드리며, 전례가 없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며 섬기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그것의 시작은 오직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성숙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진리를 깨달아 우리는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귀중한 훈련의 도구를 소개받았습니다. 균형감각, 경험, 상식, 가치관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마음속에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마침내 자유의 관문을 통과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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