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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갈라디아서

갈 3장 28절-4장 11절(받는 자의 자유) - 최태선

by Preacher 2023.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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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3장 28-4장 11

받는 자의 자유

최태선 목사 2007.7.15.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받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취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receive'와 ‘take'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받는다는 것은 자유를 나타내는 단어인 반면 취한다는 것은 자유의 상실을 나타냅니다.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취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약탈하는 것입니다. 받는 것은 사랑받는 아이에게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취하는 것은 높은 파도가 이는 상황에서 해적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자유의 상실과 관련되는 이야기는 모두가 취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는 나무에서 선악과 열매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취해 그것을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서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지크프리트는 니벨룽겐에서 신들의 금을 취했습니다. 그는 니벨룽겐 신들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취했고 그 결과는 그들이 자유를 상실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유에 이르는 이야기는 모두 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이야기는 바로 성찬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받음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해 자유로워져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그것은 다시 재현되고 계속해서 믿음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받는 것과 취하는 것의 차이는 영적입니다. 또한 우리의 내면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심령의 상태와 믿음이라는 하나님께 열린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취하는 것과 받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합니다. 어떤 것을 가지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똑같은 육체적인 행동입니다. 실제로 헬라어 ‘람바노’는 받는 것과 취하는 것에 모두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을 살펴보면, 취한다는 의미로 쓰인 ‘람바노’는 야심에 찬 주장과 교만한 세력 확대를 위한 문맥에 사용되며, 받는 것은 감사하는 받아들임과 겸손한 수용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혼돈을 아예 없애기 위해 받는 것만을 나타내는 ‘아포람바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남에게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남에게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고문과도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차라리 받지 않고 그 어려움을 견디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자유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자유란 스스로 자유로우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권리로 반항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집증 환자와 같이 우리의 소유로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는 반항적인 주장이 아니라 수동적인 신뢰로 시작됩니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취하는 것을 강조하는 현대의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껄끄러운 일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자유는 주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이해가 익숙합니다. 결혼의 굴레를 벗어난 방종을 자유로 여기는 분위기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력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저기 있는 자유를 우리가 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자유란 우리가 받기만 하면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비유를 통해 아주 쉽게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자녀들이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써있는 유언장을 집행하는 아버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뜻은 각각의 아이들을 상속자로 기록한 법적인 유언장에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기서 바울의 말이 암시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에 관한 실제 상황에 대해 잘 모른다면 자유롭게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아들과 딸들이 아니라 종으로 잘못 안다면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며 냉담하게 살 것입니다. 해방의 기회가 없음을 알고 분노하며 인생의 모든 상황마다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며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해도 해방되는 때가 오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미래의 정복을 꿈꾸며 공상과 환상의 세계에 살게 될 것입니다.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없고 위험한 행위는 경험해 보지 못하고, 고통과 아픔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하고 안전한 좁은 관습의 세계에서 살 것입니다.

 

종은 자유가 타고 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므로 종에게 자유는 붙잡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아이들은 자유를 기다려야 함을 압니다. 자유는 미래에 있습니다. 상상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는 누구도 종이 아니고 또한 어린아이도 아닙니다. 우리는 유산을 받을 수 있는 다 자란 성숙한 아들이요 딸입니다.

 

아들이나 딸은 관계적인 말입니다. 자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인격적인 경험입니다. 아들과 딸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성경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묘사합니다. 아들과 딸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좀더 잘 이해를 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막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면, 우리는 사막에서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할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유배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형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유는 지리보다는 관계와 더 많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할수록 우리는 왜 아들이나 딸이 자유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 적적한 단어인지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강조합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인간됨을 진지하게 다루지만, 동시에 그것을 그분과의 관계 안에 둡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기원이 되시고 계속해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신 하나님입니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것처럼 그분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자유의 경험을 살아낸다는 것은 날마다 자유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자유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우리는 자유롭게 살 때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동등함을 발견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가정 안에 아이가 되는 경험은 가치와 관계에서의 기본적인 동등함을 서서히 깨닫는 일입니다. 가정 내의 아이들은 모두 다릅니다. 키도 다르고, 건강상태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선하고 악한 정도도 다르고, 지적 능력도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는 각각을 다르게 대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아이와의 관계에 같은 사랑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때론 균형이 깨질 때도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부모가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하는 것은 다른 정상인 아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병든 아이에게 더 좋은 음식과 휴식을 주는 것은 다른 아이들을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편애를 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아니 인간인 부모는 모두가 편애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의 안전이나 우리가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을 기회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을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의 삶에 참여하는 자요, 한 가족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롭게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 다양성 때문에 서로가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같지 않습니다. 비슷한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정확하게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50억의 독특한 개인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보이지도 않고 똑같이 느끼지도 않고 똑같이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광스런 다양성을 자유로이 경축하는 대신, 종종 그러한 차이들이 자만심이나 수치나 탐심이나 시기를 낳도록 왜곡시키는 죄를 짓습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인종적, 민족적 차이는 사람을 성공이나 소비재로 취급하는 데 유리하게 사용됩니다. 성적 차이는 착취와 욕정을 위한 계략에 사용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존재는, 내 자유를 침해하고, 내 삶을 좁게 만들고, 내가 살 공간을 제한하고, 내 위엄을 빼앗아갑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된다면, 내 인종이나 성별이나 나의 소유나 명성만이 인식된다면 나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들과 딸로서 우리에게 있는 이 모든 인종의 차이, 지위의 차이, 성별의 차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음으로 무의미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공통된 관계 아래 종속됩니다. 이제 우리가 지음 받은 이 모든 기본적인 조화와 연속성은 경험할 수 있고 발전될 수 있습니다. 동등하게 용납 받는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적들이 아닙니다. 부러워해야 할 뛰어난 존재도 아닙니다. 피하고 싶은 손님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평등해야 할 형제와 자매, 그러나 가정에서조차 실현되지 못하는 그 평등한 사랑의 관계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서울대에 입학한 자기 형이 자랑스러워 온 시장을 뛰어다니던 정신지체 장애인 아우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동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열심히 시장에서 엄마를 도와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형을 뒷바라지 하였습니다. 그 형이 서울대에 합격했던 것입니다. “우~울 형이 서허~울대에 하압격했어요.” 동네방네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동생의 모습은 정말 눈물이 핑 도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관계가 아닐까요? 여러분들에게 많은 좋은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때마다 그 장애인 아우처럼 그렇게 여러분의 일을 기뻐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유롭게 살 때 우리는 우리의 엄청난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아들과 딸들은 부모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어떤 소유물이나 명예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가치는 놀라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열등감을 품고 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강하고 어떤 사람은 좀 더 약하긴 해도 열등감은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의 대부분이 형성되는 시기에 우리는 우리 삶에 중요한 사람들보다 작고,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약하고, 경험도 적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항상 우리보다 나은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자라면서 그 열등감의 일부는 사라지지만, 전부 다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쉽게 자기회의에 빠집니다. 내가 정말 가치 있는 존재인가? 내가 존재한다고 해서 누군가 신경을 쓸까? 내일 내가 사라진다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한 일 년은 갈까?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중요성을 입증하려 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우리의 수고는 별 소득이 없이 끝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자유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불충분하다는 느낌은 우리를 종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든 상관없이, 각자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장점을 표현할 동기도 없고, 우리의 은사를 개발할 확신도 없고, 그날의 축복을 즐기지도 못할 것입니다.

 

복음은 구속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그런 식으로 종이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3-5) 이 문장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확하고 강력하게 묘사합니다. 문장 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서 보아야 할 단어가 바로 ‘속량하다’(redeem)는 단어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모두 1세기 그리스에서 종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속량하다’라는 단어가 그 과정을 묘사합니다. 때로 어떤 종이 부유한 자유인의 관심을 끌어 그 자유인이 종을 자유롭게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자유인은 성전이나 제단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그 종의 해방에 필요한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종에게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아폴로 신이 주인으로부터 이 종을 사서 ....이제 자유롭다.” 그리고 제사장은 속량한 값을 그 이전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누군가의 하인으로 누군가의 일을 해주는 데서만 쓸모 있었던 삶이 바뀌게 됩니다. 그 삶이 열등하다고 여겨졌던 종의 삶이 이제 더 이상 그런 평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유로워졌습니다. 다시 어떤 값을 지불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무엇을 함(doing)으로써가 아니라 누군가가 됨(being)으로써 귀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받기 위해 선택되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값이 지불되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종의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들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 관계에 맞는 특별한 돌봄과 세심한 관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이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독특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다. 그런 가치 의식을 가지고 이전보다 더 깊고 넓은 영역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자유롭게 살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이 친밀함을 아바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묘사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 아바(abba)는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1세기 팔레스틴의 언어이며 예수님의 모국어입니다. 아바는 아버지를 의미하지만, 구어체의 친숙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가장 가까운 말은 아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밀함으로 들어갑니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간혹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가족 관계에서의 아버지, 아빠로 불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항상 아버지를 일상 언어에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아바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들이라는 선물은 아이에게 아버지를 친밀하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줍니다.

 

우리는 갑자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직되고 공식적인 의례 관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난처해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올바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 쫓겨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부르듯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친밀함과 경외심을 섞은 자유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위엄과 두려운 영광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우리가 조작할 수 있는 편리한 수준으로 축소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 친밀함은 우리 자신을 나누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두려움 없이 표현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자발적이고 인격적이고 방해받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믿음은 공들인 예의로 방해를 받는 공식적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친밀하고 자유로운 가족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아빠라고 불러보십시오. 실감이 나십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분을 그렇게 부를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친밀함을 감격으로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생각해 본 이 자유들은 미래에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성취될 그런 내용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롭습니다. “때가 차매”라는 구절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은 모두 지금 실현됨을 주장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강조하신 바를 바울이 똑같이 쓴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실행하신 모든 일이 지금 바로 지금 유효합니다. 의미가 가장 충만한 지점은 바로 지금 현재입니다.

 

현재 순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 영원과 닮아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온전히 경험하기를 거부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유롭게 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살기를 원하는 것은 향수입니다. 미래에 살기를 선호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보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존재를 꿈같이 희석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감각적인 강렬함을 잃고 위험의 자극도 잃습니다. 영혼과 실재가 결합된 복잡한 신비도 잃습니다. 과거는 약속의 견고한 태도이어야 합니다. 추억에 잠겨 현재를 마비시킨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목적의식을 주고 소망을 표현하는 데 유용하지만 환상으로 도피하는 미래는 죄입니다.

 

바울이 “때가 차매”라는 구절과 나란히 둔 “유업을 이을 자”(7)라는 단어는 시간의 세 측면을 자유로운 현재로 모아 줍니다. “유업을 이을 자”라는 단어는 약속의 과거와 기대하는 미래가 실현된 자유의 현재에 꼭 들어맞는 특별한 사람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라는 구절은 이 현재가 더 이상 단순한 현재가 아니라 복합적인 현재임을 강조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 붙인 독창적인 칭호인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1:8)는 현재로 시작하고 과거를 모으고 미래를 끌어들입니다. 이렇게 현재는 더 이상 단순한 현재가 아니라 자유가 수용되고 실현되는 강렬하고 거대한 때가 찬 순간입니다. 때가 차고 완성되고 정점에 달하는 때는 오직 현재입니다.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모든 차원 즉 현재, 과거, 미래와 맞물려 있지만 이는 현재로 집중됩니다.

 

오르테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미래는 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내 과거를 발견하게 해준다. 과거가 지금 실제적인 것은 내가 그것을 다시 살기 때문이고, 과거에서 내 미래를 실현할 수단을 찾을 때 나는 내 현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즉각적인 순간에 일어난다. 이는 삶이 진정한 내면의 시간의 세 영역으로 부풀어 오르는 순간이다. 미래는 나를 과거로 가게하고, 과거는 나를 현재로 가게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는 다시 나를 과거로 밀어 넣는 미래로 가고, 그 과거는 나를 다른 현재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계속 순환한다.”

 

때가 찬 시대를 사는 유업을 이을 자는 “자유의 온전한 의미를 회복할” 자리에 있습니다. 종은 제한 속에서 살고, 아들과 딸은 기회가 확정되는 가운데서 삽니다. 우리는 받을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의 계좌에 예치해 둔 금액을 계속 없애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어제보다 못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줄어드는 기회와 에너지, 줄어드는 자유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을에 만들어 준 곶감을 빼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날마다 더 많은 것이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전적으로 받는 자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마다 취하려는 태도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두렵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이 자유의 길을 달려가며, 이 자유를 향유할 때, 이 땅위에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감출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빛이며,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것은 소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취하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내가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해 왔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앉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적은 값어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것은 절대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분의 사랑과 자비 가운데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취하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받는다고 해도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받는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아들과 딸이 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너무도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의심하지 않고, 그 아버지를 아바라고 부름으로써 더 이상 가까운 존재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자녀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유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아버지의 다함이 없는 풍요 속에서 자녀들은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받는 자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영원히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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