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갈라디아서

갈 3장 26-29절(제자공동체 11 - 사회적 장벽의 철폐) - 최태선

by Preacher 2024. 2. 22.
728x90
반응형

갈3장 26-29

제자공동체 XI. -사회적 장벽의 철폐-

최태선 목사 2006.12.10.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저희가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며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행2:1-4) 사람들이 각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놀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구약의 요엘서(3:1-5)를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베드로는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을 요엘서의 성취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오순절 그날 이래로 그들 안에서 돌발하는 황홀경과 예언 현상들이 종말에 부어지는 영을 의미한다는 결정적인 통찰에 이르렀다는 점을 보여주는 의도적인 베드로의 인용입니다. 요엘 예언자의 문장은 다만 그날의 방언과 예언의 종말론적 해석에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 점점 힘차게 의식화된 한 사회적 현상도 납득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모든 사회적 장벽들의 철폐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은 점점 공동체가 되어 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 사실 때문에 서로간의 특권과 천대가 사라진 새로운 관계를 맺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요엘은 이스라엘이 다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게 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온 이스라엘 위에 부어주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이 새로운 사회구조를 알립니다. 그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의 백성”으로 화합니다. 이때부터는 영의 부여란 이미 한 예언자 개인이나 한 예언자 무리의 특권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이스라엘 안의 모두가 영의 보유자들이 됩니다. 남자들과 다름없이 여자들도, 늙은이들과 다름없이 젊은이들도, 자유인들과 다름없이 노예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적 차별이 사라지면서 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의미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공동체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요엘 3장과 관련지어 의식적으로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사회에서 사회적 장벽들을 철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하던 사람들을 받아주셨습니다. 사회로부터 격리 당하거나 종교적으로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사회적 구분과 계급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분이 용납되지 않으며, 원칙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안의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합된 사회인 이스라엘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자도(눅19:1-10) 가난한 사람도(눅6:20), 유식한 사람도(눅14:1-6) 무식한 사람도(마11:25-26), 갈릴리 시골 사람도(막1:14) 예루살렘 도시인도(마23:37), 건강한 사람도 병자도(마4:23), 의인도(막2:17) 죄인도(눅19:10) 상종합니다. 더욱 솔직히 말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눅7:22), 굶주리는 사람(눅6:21), 우는 사람(눅6:21), 지치고 짓눌린 사람(마11:28), 병자(막3:1-6), 죄인(막2:17), 세리(마11:19), 창녀(마21:31-32), 사마리아인(눅10:25-27), 여자(마5:3-32), 어린아이(막10:13-16)들을 위하여 편을 듭니다. 당시의 유대사회가 동등한 인간 가치를 부인하며 상종조차 거부하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받아들여진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돌입하는 거기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교적으로 완전한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자격이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모든 사회적 장벽을 철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2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차별 즉 사회적 장벽은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나 2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대상은 인류 모든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의 상속자인 사람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존재로 규정되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것은 곧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는 믿음과 세례를 통해서 생명에 이르는 종말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합해지는, 본문대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입게” 되는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로, 여느 사회에서 통용되는 대립관계들이 사라진 그런 공동체로 화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는 몸이라는 아이디어가 더욱 뚜렷이 부각되며 거기에 성령이라는 모티브가 동시에 덧붙여집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요엘서 3장에서와 같이 성령이 새 질서를 낳습니다. 넘치도록 풍부하게 선사되는 종말론적인 영의 부여를 통해 내세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새로운 공동체가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 또는 그리스도의 몸은 사회적 실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돌발한 하나님의 새 세상이 공동체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체적인 새로운 사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요엘의 예언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실천이 박진감 있게 날카로운 필치로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바울을 통해 세워진 제자공동체들의 구체적 실천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이 철폐되었습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실감나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를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는 정말 천지가 개벽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위해 그가 얼마나 투쟁했는지는 일일이 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이전에 헬라인들이 이미 시작해 놓은 일을 철저히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안디옥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밥상 공동체를 베드로가 다시 철회하였을 때, 사도 바울은 맞대놓고 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처신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일치마저 위협하는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그야말로 하나님 백성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의 대립을 조장하는 처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끈질기게 옹호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에서 율법을 충실하게 준수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회적 공동유대가 뚜렷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도 역시 줄기차게 노력했습니다.(로마서 11장을 통해 우리는 그런 바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공동유대의 구체적인 표시가 그에게는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자 그는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일에 그는 각별히 많은 시간을 투입했습니다. 당시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엄청난 연보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빌미가 되어 결국 그는 체포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온 실존을 통해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다는 것을 실증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노예와 자유인의 장벽이 철폐되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일반 사회적 차원에서 고대의 노예제도에 대항하려 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 또한 단순한 이론에만 머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노예제도를 놓고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제자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제자공동체는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공동체가 공동체로 모인 거기, 종말의 하나님 백성으로서 우뚝 서게 되는 거기서는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차별이 더는 아무 구실도 못하게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습니다. 공동체들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빌레몬서를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빌레몬에게서 오네시모라는 이방인 노예가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바울을 만났고 그리스도 신앙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냈습니다.(당시 도망친 노예는 붙잡히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더 이상 종이 아니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사랑스런 형제로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노예 신분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형제”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노예라는 신분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노예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장차 복음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주인인 빌레몬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빌레몬 가족 공동체의 모임들에 참여하며, 그 가족 공동체의 성찬례에서 주인과 우애의 입맞춤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사랑스런 형제로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노예와 그리스도인 주인의 구체적 공동생활에 관하여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은데 그 이유는 공동체 안에서 노예들이 완전히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분명히 아무 논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분명하고 또 당연한 것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아울러,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에는 놀랄 만큼 많은 노예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에게도 교회의 최고직이 배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분명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새 질서가 분명 상당한 구실을 했음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당시의 노예제도에 항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것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초대교회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비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는 노예와 자유인의 구별이 더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을 때, 이것은 결코 고대 세계의 사회구조들을 건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없는 그러면서도 가장 분명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분명히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한 사회를 그들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사회의 실존 그것만으로 아무런 공격을 가하지 않고 그 사회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아무런 개혁안도 없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풍부한 공격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완벽한 해결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남자와 여자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여러분에게 철폐되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자가 교회 직무에 취임하는 일을 보면 그것은 차별이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감독직이 형성되던 거기서 여자가 처음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은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계에서는 감독의 직무에 해당하는 것이 장로인데 여자가 장로로 인정된 적이 있는지는 극히 의문입니다. (그리고 후에 감목, 봉사자(부제), 장로단이라는 전형적인 직무의 정립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오직 부제직에만 여자가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동방교회에서만 그랬고, 서방교회에서는 그 마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여자에게 공동체 모임에서의 공개 발언이나 설교가 금지되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이론이 분분합니다. 결정적인 대답은 고린도전서 14장 34절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든 1세기 말경 목회서신들은 여자에게 공개적 설교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딤전2:11-12) 따라서 본문 28절의 실천 강령이 2세기에는 이미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사실들 때문에 교회의 초창기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에는 여자가 교회 안에서 전혀 다른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여자 예언자가 등장했으며, 그런다고 해서 교회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복음 전도자 빌립보에게는 예언을 하는 네 딸이 있었습니다.(행21:8-9) 물론 자기 집 방 안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모임 앞에서 예언을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5-16에서 바울은 예배 중에 여자들이 나서서 예언자적 발언을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다만 “머리를 가리고” 그렇게 하라고 말할 뿐입니다. 성령은 범접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회 안의 각 사람에게 원하시는 대로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고전12:11) 여자들이라고 해서 예언의 은사를 주시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하는 사람은 오늘날로 말하면 공동체의 지도자라고 부를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여자들의 예언 활동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전도자 부부들의 봉사직분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그의 아내(고전9:5),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롬16:3-5),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16:7)를 들 수 있습니다. 그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이 부부의 이름은 늘 동시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다 능동적인 자세로 선교활동에 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실성과 희생의 자세를 가지고 바울의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이방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그들의 은덕을 입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롬16:3)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두 부부 가운데 아내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거명된다는 사실입니다. 클라욱이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이 사실은 예의상의 표현이라고 이해될 수 없음이 확실하다. 오히려 정 반대로 고대의 인습이 타파되고 있으며,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선교에서 이 부인의 의미가 특별히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그녀는 자기 가정 공동체를 바탕으로 해서 광범위한 활약을 펼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에서 여자의 역할은 무시되거나 금지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부부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또한 전도자 부부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부부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았고” 자신보다 먼저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사도들 가운데서도 출중한 이들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우리는 여자들의 활동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부들은(사도-속사도-교부) 예외 없이 유니아를 여자 사도로 이해했습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이름이 자주 남자 이름으로 해석되어 왔는데 이는 교회 초기에는 한 여자가 사도였고, 게다가 바울에 의해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는 출중한 사도로까지 일컬어졌다는 사실을 사실로 여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브리스길라와 유니아야말로 1세기에는 여자들이 선교활동이 자선사업 직분들이나 가족 영역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16장 6절과 12절에 나오는 마리아, 드루배나, 브루보시 들에 관해서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데, '수고'와 '수고하다'란 실상 어려운 선교활동을 가리키는 바울의 전문용어입니다. 이는 그 여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참여하고 활동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바울의 선교사업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일체의 선교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로마서 16장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거의 아무 것도 전해 듣지 못하는 영역에 놀랄만한 빛을 비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나쳐가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선교를 위해 수많은 여자 협력자들을 얻을 줄 알았고, 동시에 여성의 은사들을 복음의 선포에 충분히 투입시킬 줄 알았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본문 28절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다.”는 그의 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초대교회의 제자공동체가 어떻게 사회적인 장벽들을 타파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를 생각해 보면 정말 기적보다도 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벽이 무너진 것은 그야말로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벌어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그 넘을 수 없는 벽이 무너진 것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노예와 자유인간의 벽이 넘어진 것은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일어났던 어떤 혁명보다도 과격한 혁명이 소리 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말뿐인 잔치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혈육을 통해 경험한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본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나 하나가 되고 싶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유일한 길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우리는 ‘성령공동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란 목표를 세우고 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올해도 우리는 하나가 되기는커녕 그나마 있던 사람들마저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이제는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그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시려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내 힘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에만, 그리고 우리가 그 성령에 이끌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될 때 오직 그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를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교회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고 제자공동체라는 제목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시대의 교회가 교회 본연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본 대로 엄청난 사회적인 장벽들을 철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물결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갈가리 찢어진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방황합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고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리의 길을 걷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대로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로부터 얼마나 멀리,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제게 말합니다. ‘교회 비난은 하지 말고 예수 잘 믿으라는 얘기만 하시오.’ ‘다 아니까 냅둬요.’ ‘한국교회 구원하려고 하지 마시오. 그건 최 목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요.’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좀 생각하시오.’ ‘비난만 하지 말고 칭찬을 좀 하시오.’ 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진리의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저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힘차게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