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3장 15-29
성공과 실패의 역설
최태선 목사 2007.9.30.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진리는 역설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진리가 역설일 때가 많은 것이 아니라 아예 ‘진리는 역설이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성경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혹은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는 진리가 역설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십자가는 역설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입니다. 그것도 처절한 패배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승리의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인 십자가 사건이 이토록 역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숙해 질수록 더 많은 역설들과 만나게 됩니다. 고난이 축복입니다. 아무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길을 걸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하게 고난이 축복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약할 때 강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또한 역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는 그의 이어지는 설명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역설을 받아들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을 들을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전한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생각하며 어려움을 통해 온전한 사랑에 이루기 위해 기뻐하는 법을 배우기 원합니다. 물론 이 또한 역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동안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또 하나의 역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역설입니다.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이에 반해 철저하게 비참한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유다는 매우 인상적인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면과 재정적인 면 모두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는 모든 무리의 돈을 관리했습니다. 또한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대 최고의 정치세력을 등에 업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베드로는 덤벙거리며 실수와 실패를 반복했습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무력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서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그는 절망적이고 나약한 겁쟁이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선발된 소수 정예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듣거나 참여한 여러 정황 속에서 그는 너무나 황당하고 부적절한 말을 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도 그랬고, 변화산 위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는 위험한 순간 함께하고픈 동료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에서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이 두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뒤바꿔 놓았습니다. 성공의 대명사였던 유다는 배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실패의 본보기였던 베드로는 교회와 세상 모두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악한이고, 베드로는 성자입니다. 물론 세상은 계속해서 재정적인 부와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유다의 성공을 쫓아갑니다. 무능력하고 서투른 베드로의 실패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좁은 길을 좇는 사람은 유다와 함께 성공하기보다는 베드로와 함께 실패하는 쪽을 택합니다.
성공을 강조하는 세상은 최대한의 안전과 최소한의 위험을 장려해야 하므로 진리와 자유는 단념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몇 주 전에 그것을 샘물교회 박 은조 목사님과 총회장 출신의 목사님을 비교하며 살펴보았습니다. 샘물교회 박 은조 목사님의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와 자유입니다. 그리고 총회장 출신 목사님이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최대한의 안전과 최소한의 위험입니다. 체스터턴은 “장기적인 목적에서 볼 때 즉각적인 성공에 중요성을 두는 것만큼 불리한 것은 없다. 성공처럼 실패인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공이 실패인 것은 인간의 더 깊은 영역을 건너뛰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보호받고 인도받으며 사고 없이 성공을 보증하는 간섭의 손길이 있을 때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소심하게 겁먹고 살 때 실패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자신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에 실패의 위험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넘어지지 않으면 걸음마를 배울 수 없습니다.
돈과 권력은 성공을 위한 일반적인 수단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더 깊은 인간의 영역을 건너뛰게 합니다. 진리와 자유를 위한 능력을 제거합니다. 진리와 진리가 주는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독특한 선물입니다. 돈과 권력은 이 진리와 자유를 위한 능력을 감소시킵니다. 세상에 드러난 것처럼 성공이 돈과 권력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진리는 사라지고 자유는 실종되고 마는 것입니다. 유다의 자살은 진리를 위한 고민이 아니며 자유의 어설픈 모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실패는 가장 자유로운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자유가 있는 사람은 가장 자유롭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자유를 방해하며, 실패할 수 있는 자유는 자유를 격려합니다. 저는 우리 딸들이 실패할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잘 됐어. 걱정하지 마. 감사한 일이야. 겸손해야 돼.’ 아이들은 매일 똑같은 말만 하니까 아빠한텐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은, 종종 실패하더라도 위험을 감수할 것을 격려합니다. 그것은 위기와 미지의 것을 향한 인간의 모험을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나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 종종 실패합니다. 물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가 결코 재앙이 아닌 것은 그 실패가 우리 인간성의 새로운 깊이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깨닫는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코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위대해질 수 없다. 실패는 위대함의 진정한 시금석이다.”(매티센)라는 말은 그러므로 의미 있는 선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통찰을 붙잡고 율법과 관련하여 그것을 사용합니다. 그의 시대에 율법은 많은 사람에게 안전하고 성공적인 삶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율법만 지키면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가며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으며 그들 스스로 완벽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입장을 완전히 뒤집어서, 율법은 어느 누구도 성공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실패자로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율법을 진지하게 다루어 그 의도대로 사용할 때, 율법은 무자비하고 가차 없이 우리 모두를 실패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율법은 우리가 실패할 것이고 그것을 예방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전제합니다. 우리에게는 실패할 자유만이 남겨졌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설교에서 실패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면해야 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실패와 대면하고 그것을 견뎌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지침서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믿음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자유로운 삶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모세는 항상 아브라함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의 이전 경험에서 모세는 성공적인 삶의 교과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서문의 역할만 했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도 절대적이었던 모세의 율법이 제 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믿음의 삶에서의 실패들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도록 사용되어야 했습니다. 믿음의 순례 여정에서 경험 없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랬어야 할 율법이 성공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이 성공의 교과서가 되면서 율법은 지키기만 한다면, 삶에서 위험과 모험과 성숙을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회가 칭송하는 완벽한 행위를 보증하는 일련의 규칙들로 추앙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율법의 본래의 역할과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유로운 믿음의 삶의 철저하고 완전한 해설이 되었고, 모세는 믿음의 삶에 통상적으로 있게 마련인 실패를 통과하는 우리를 격려하고 지도하기 위한 좀더 작은 부칙이 되었습니다. 제 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의 삶에서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하겠습니까? 율법은 분명 고유의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역할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의 수하에서 공부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보다 이 질문을 더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정신과 건강과 자유를 보존해 주었습니다.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의 의미는 ‘무언가를 던지다.’라는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이 아니라, 과녁을 향해 쏘는 화살처럼 방향을 정해 놓고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 감각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화살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그렇게 사용된다면 율법은 믿음의 자유로운 삶을 지원하는 매우 가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첫 번째 요점은, 율법을 능숙하고 자유롭게 사용하기 이전에 그것을 무엇에 사용할지를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삶의 첫 번째 반응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전에는 율법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믿음의 우선성을 논증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은 믿음에 관한한 탁월한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아주 많은 의미를 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는 한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페르시아 만의 한쪽 구석 갈대아 우르에서, 주전 19세기 즈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본향을 떠나 서쪽을 향해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의 종교와 본향과 문화와 안전을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귀 기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믿음의 삶의 방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는 바로 우리 삶으로 응답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과 우리에 대한 모든 것, 즉 우리의 일, 가족, 우리가 애착을 갖는 것, 우리의 계획,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과의 이 근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에 따라 조정되고 정리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발견하는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따라 삽니다. 우리는 우리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해를 입힐까 두려워 움직이지 않고 안전한 곳에 머무는 대신, 인도하시는 대로 담대하게 믿음의 삶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모험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삶은 풍요롭지만 억압적이고 단조로운 삶입니다. 황량한 사막에서의 삶은 힘들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위대하고 보이지 않는 은혜와 사랑과 소망에 응답할 기회입니다. 그곳에서의 삶은 모험이지만 믿음의 삶이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실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 세상과 사람들이 그에게 말한 것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는 갈대아 은행의 보증된 수입에 의존해 조심스럽게 사는 삶이 아니라, 약속에 따라 무모하게 보이는 모험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자유의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삶에서 율법이 위치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여정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가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보여주는 규율서도 없었습니다. 길과 쉴 곳을 알려주는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반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되며, 하나님의 도전을 받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라가며, 하나님께 귀 기울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갔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좌절과 어려움과 갈등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지연되었고, 우회하기도 하고, 방해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의심과 죄와 절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냈습니다. 그는 따랐고, 고백했고, 기도했고,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의 중심이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일은 규율서를 읽거나, 화살표를 따라가거나, 지도를 따라가는 삶이 아닙니다. 실패를 막는 공식은 무엇이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돌보시며,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을 담대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사물을 주관하시며,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담대히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화살표와 규율서와 지도와 마찬가지인 율법을 따르라고 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살표와 같은 그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30년 동안 나타나지도 않았음을 알지 못합니까? 거의 500년 동안 사람들은 율법의 도움 없이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거나 정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용지물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반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우리는 그냥 그것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하도록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화살표들은 유용합니다. 긍정적으로 볼 때 유대교는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중 시편 19편과 119편은 율법을 가장 열정적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의를 돌리게 하고, 축복하시고, 구속하시고 올바른 관계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방식에 대해 통찰을 줍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바른 방향, 곧 인격적인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은 믿음의 사람들의 통찰을 보존하여 믿음으로 사는 삶이 눈먼 시행착오가 되지 않도록 해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림짐작과 우연으로 살지 않도록 해줍니다. 바울은 이를 감지하고 찬양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 도덕적인 교통 정체 속에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경제적인 길을 보여줍니다. 폰 휘겔은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경찰관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살지 않고 규칙을 따르는 삶을 산다. 그렇게 함으로써 훌륭하고 더 온전하고 쉽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훌륭하고 더 온전하고 쉽게 살아가게 해줍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행위를 화살표를 따르는 즉 ‘율법을 지키는’ 속 좁은 예식으로 축소할 때에만, 율법은 방해가 됩니다. 그것은 경찰관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살면서 율법을 사용함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정확히 율법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우리가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단순히 그것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를 제공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 부릅니다. 몽학 선생이란 우리가 알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헬라 문화권에서 넉넉하게 사는 집에는 종들이 많았습니다. 그 종들 중에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개는 정복된 나라의 귀족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나이 많고 신뢰할 만한 종을 뽑아 자녀들이 여섯 살부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돌보도록 했습니다. 이 몽학 선생은 아이들에게 위험이나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살피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갔습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교사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아이들을 학교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가서 선생님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안전하게 넘겨주는 것, 바울은 이것을 율법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믿음의 장소로 즉 그리스도께로 넘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런 몽학 선생입니다. 엄격하게 제한된 목적을 위해 자유로운 사람에게 배정된 종일뿐입니다. 그 종은 자유로운 아이를 규제하지는 못합니다. 그것도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일시적인 역할입니다. 특별한 보호와 인도가 필요한 어린 시절에만 필요할 뿐입니다. 자유로운 성인이 종에게 이끌려 다니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좋은 종은 될 수 있지만 주인이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나쁜 주인인 것입니다.
물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실패에서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법적으로 부모의 감독에서 자유롭습니다. 물론 몽학 선생은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모험을 감행하고 선택합니다. 그리고 실패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실패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갈망해도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미완성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실패하며, 믿음으로 용서하며, 믿음으로 사랑 가운데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살지는 못합니다. 성공은 우리를 감옥에 가둡니다. 성공은 믿음의 위험과 모험을 거부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보다는 옳게 보이고자 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취하는 비성경적인 짐입니다. 앤서니 드멜로는 그의 책 <사랑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삶을 보라. 당신이 공허한 삶을 어떻게 사람들로 채워 왔는지 보라. 그 결과 사람들이 당신의 목을 죄고 있다. 그들이 칭찬과 비난으로 어떻게 당신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지 보라. 그들은 함께 있어줌으로 당신의 고독을 달래주고, 칭찬으로 당신의 기분을 띄워주고, 비난과 거부로 당신을 수렁에 빠뜨리는 위력을 갖고 있다. 하루 중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순간을 사람들-산 자든 죽은 자든-비위나 맞추고 호감을 주려하는 당신을 보라. 당신은 그들의 규범대로 살고, 그들의 기준에 동조하고, 그들이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고, 그들의 사랑을 탐하고, 그들의 조롱을 겁내고, 그들의 박수갈채를 갈망하고, 그들이 지우는 죄책감에 얌전히 굴복한다. 옷 입고 말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생각하는 방식까지 무서워 당신은 유행을 거스르지 못한다. 당신이 그들을 통제하는 입장일 때조차도 얼마나 그들에게 좌우되며 속박돼 있는지 보라. 사람들의 영향이나 통제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아예 당신 존재의 일부로 굳어져 버렸다.
성공이 우리를 가둔다는 의미를 앤서니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옳게 보이고자 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취하는 비성경적인 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성공이라는 것이 우리의 자유를 얼마나 속박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유대인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서로 영광을 취하”기(5:44) 때문입니다. 여기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과 성공 사이의 근본적 양립 불가능성이 나타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예수님의 인정보다 더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심하게 야단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성공 안에 안주하면서 정작 율법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섬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제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진리임에 분명한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을 구성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요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이 율법에 얽매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믿음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벽에 부딪히게 함으로 믿음의 길로 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가게 하는 일종의 표지판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의 감옥에 갇혀 안주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느끼고 있지만 실재로는 앤서니 드멜로의 말처럼 사람들의 통제와 영향 속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위해 모험의 길을 달려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달려갈 수 있는 모험의 여정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에서의 실패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는 영혼의 성숙을 위한 디딤돌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이야기는 성공과 실패가 시간이 지난 후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길이란 세상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경쟁의 방식을 버리고 사랑과 섬김을 택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무력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 길은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진리의 길이며, 진정한 승리의 길입니다. 무한히 높은 것을 추구하는 성공의 길은 결국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끝없이 그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달려가라고 촉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28)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우리는 믿음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따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모험의 삶입니다. 그 모험의 삶에는 반드시 드문드문 실패가 섞여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들은 무의미한 시간 낭비가 아니라 우리를 영혼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인생의 징검다리입니다. 두려움 없이 그 징검다리들을 건너 자유로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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