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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갈라디아서

갈 4장 12-20절(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 권율

by Preacher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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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4장 12-20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권율 목사 2016. 4. 20.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청년부 [부산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의 감정 상태가 격앙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들 때문에 의분하면서, 그들이 순진한 교인들을 미혹한 사실을 두고 아주 격분해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사도가 보기에는 성도들이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깨달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또다시 세상의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째서 복음의 자유함을 저버리고 이전의 종 노릇하는 시절로 되돌아가려느냐고 아주 질책하였습니다.

 

지난 본문과는 달리, 오늘 본문에서는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시작합니다.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린 대로, 1세기 당시 ‘형제’라는 말은 혈연 관계에서만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영적 혈연 관계로 맺어진 성도들을 호칭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단 때문에 혼란에 빠진 갈라디아 교인들을 여전히 형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가 보기에 그들이 믿음이 약하여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들을 여전히 ‘형제’로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앞 본문까지 강한 어조로 질책하다가 또다시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영적 아비의 심정으로 달래고 있습니다. 달래고 위로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 같이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구절의 전반부가 원문상으로는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는 부분이 먼저 나옵니다. “갈라디아의 형제들이여,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입니다.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갈라디아의 형제들이여,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구절에 오늘 설교의 제목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영적 아비의 자격으로서 그들에게 얼마든지 자신과 같이 되어라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도의 열정, 또 주님의 몸 된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기꺼이 고난 받으려는 그의 태도 등을 얼마든지 본받으라고 아무 조건 없이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말하는 이유를 보면, 좀 특이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과 같이 되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한때 율법에 목숨을 걸고 철저하게 유대주의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로는 유대인처럼 살기를 포기했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일지라도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이방인들처럼 살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이방인의 생활방식에 적응하여, 복음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저하게 그들처럼 살았다는 것이 바로 “그들과 같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이런 선교적 태도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큰 도전을 안겨 줍니다. 복음을 위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복음이 변질되거나 죄를 짓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저하게 그들과 같이 된다는 뜻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니지만, 이 세상 가운데서 그들처럼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2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도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자로서 자유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 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갈라디아의 이방인 성도 가운데 있었을 때는 율법 없는 이방인들처럼 살았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그들의 생활방식과 정서에 맞게 잘 어울려 지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세움 받은 사실을 확신하고서(2:8), 이방인들과 함께 신앙 생활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그가 율법을 무시하는 신성모독자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사이에 있을 때는 또 다르게 행동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봤듯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비록 자신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았지만, 마치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처럼 그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이런 고백이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율법에 목숨 거는 유대인들을 그토록 비판하는 그가, 유대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율법 아래에 매인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말이 신기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보통 유대인들처럼 율법 의식에 참여하고 유대인의 사고방식대로 그들 사이에서 어울려 살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바울의 심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바울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한때 그도 똑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바울에게도 적잖은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인 그가 이전까지의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그의 모든 생각을 뒤집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이 볼 때는 완전히 정신 나간 것처럼 보였어도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이방인의 사도답게 살았습니다.

 

물론 다른 모든 사도들도 바울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 즉 유대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유대인처럼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인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다가 그때 마침 찾아온 유대인들 때문에 외식하고 말았습니다. 2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봤듯이,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행동하지 않는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살더라도 적어도 이방인 성도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의 정결의식이나 율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짚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자신의 기존 방식을 완전히 버리신 분이 또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 기존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죄인과 같이 되신 분입니다. 죄가 없으시지만 마치 죄 있는 사람과 같이 이 땅에서 살아가셨습니다. 죄인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그들과 같이 아파하고 함께 우시면서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심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겼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처럼 살아가면서 복음을 온 힘을 다해 증거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흔들리고 있으니, 목자의 심정으로 바울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오늘 본문을 통해 열변을 토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하게 되었습니까? 13절에서 보듯이,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에게 있는 질병 때문에 갈라디아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는 말입니다(ESV Study Bible).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에게는 심각한 질병이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평소에 간질에 시달려서 심히 고생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그가 심각한 안질에 걸려 고생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평소 그의 눈이 잘 안 보였다고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을 때 시력을 잃고 사흘 동안 눈이 안 보였는데(행9:9), 제가 볼 땐 여러 정황상 안질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

 

아무튼 질병의 종류보다는 그 질병 때문에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에 걸림돌이 된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의 질병이 떠나가도록 세 번이나 주께 간구했겠습니까!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평소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시험 들게 할 만큼 바울의 질병이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복음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데, 정작 본인의 질병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자신의 약함 때문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시험거리가 된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말이 굉장히 서툰 목사입니다. 물론 어릴 적 언어장애 수준에 비하면 정말 많이 극복했지만, 여러분이 보기에 아직도 제가 굉장히 말이 서툴고 어설퍼 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제 모습이 별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런 제 모습을 통해 더 능력 있게 증거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제 모습 때문에 시험에 드는 교인도 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도 육체의 약함(질병) 때문에 때론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어 실족했습니다. 너의 질병부터 고치라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너 자신부터 구원하라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런 바울의 모습을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처음에 그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감격하며 복음의 자유함을 누렸는지, 또 복음을 전해 준 바울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며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극진히 영접했는지를 다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을 섬기고 싶어 했던 그들의 애틋한 마음을 또다시 생각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의 형제들이 바울과 함께 그토록 복음의 자유함을 누리며 신앙 생활했는데, 어째서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또다시 율법의 멍에를 매려고 하는지... 바울이 보기에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또다시 복음을 온전히 믿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20절에 보시면, 언성을 높여서라도 그들이 또다시 참된 진리 가운데 거하길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느낄 수 있듯이,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지금 원수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참된 말을 해서 원수가 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의 미혹에 한번 넘어가면 기존 성도들이 이토록 끔찍하게 변하게 됩니다. 참된 복음을 가르쳐 준 기존 말씀 사역자를 마치 원수처럼 대하기까지 합니다. 17절에서 보듯이, 이단들이 열심을 내는 것이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현재 CBS 방송국 폐쇄운동을 벌이는 ㅅㅊㅈ와 같은 이단들은 바울의 말대로 성도들을 이간시켜, 교회보다 자기네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는데도 미혹된 교인은 그토록 무섭게 변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될지라도 목회자들은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혼란에 빠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다 같이 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한번도 쓰지 않은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들을 또다시 품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그들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거짓 교사들에 맞서 엄청난 수고를 또다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은 나 자신이 중심에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믿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되면, 모두가 서로에게 맞추고 상대방 같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내’가 없어지고 오로지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온전히 남게 되고 그 외에 다른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가족이 등록해서 그들과 함께할 때는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훼방하지 않는 한 그들처럼 대화하고 그들처럼 지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깊이 깨닫고 인격적으로 만나 성숙할 때까지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영적 조급증에 빠져 그들을 다그치거나 우리의 성숙한 방식을 그들에게 무작정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기까지 끊임없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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