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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갈라디아서

갈 5장 16-26절(어떤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인가) - 이준원

by Preacher 2023.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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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5장 16-26

어떤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인가

이준원 목사 2013.1.16.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신령한’의 의미

 

1980년대 말부터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한국 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영성, 기도의 영성, 직업의 영성, 일상생활의 영성, 심지어 가난의 영성, 폭력의 영성 같은 말들도 나왔습니다. 또 포스트모던 사회가 되면서 영성이 기독교에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불교의 영성, 이슬람의 영성, 힌두교의 영성, 인디언의 영성이라는 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고, 그 형용사형인 ‘신령한, 영적(spiritual)’이라는 단어가 신약 여러 곳에 등장할 따름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신령한/영적인’이 사용된 것에 대해 세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영에 대한’(concerning spirit)

 

‘신령한’이라는 단어가 ‘영에 대한’(concerning spirit)이라는 의미로서, 영이라는 실제 존재를 염두에 두고서 어떤 존재를 묘사할 때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영’은 어떤 종류의 ‘영’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영이 인간의 영(human spirit)일 수도 있고(고전 2:11), 천사나(히 1:14) 사탄일 수도 있으며(엡 2:2), 영이신 하나님(요 4:24)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영과 관련해서도 ‘신령한’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신령한’은 물질적(material) 또는 신체적(physical) 이라는 개념과 정반대 의미입니다.

 

2)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이것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 혹은 상황이 영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으로, 그런 의미에서 ‘신령한’은 좋은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신령한 은사, 신령한 몸, 신령한 복, 신령한 노래, 신령한 지혜와 총명,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는 모두가 좋은 것들입니다. 이들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나왔기 때문에 선합니다.

 

3)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

 

이 경우의 ‘신령한’은 ‘신령한 자’로 바꿀 수도 있는데, 어떤 그리스도인이 상당한 정도의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고 판단될 때 붙이는 말입니다.

 

2. 영성의 시작과 과정과 목표

 

영성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신령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상태가 가능하려면 세 가지 사항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영성은 영을 가진 인간과 천사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인간만 다룸) 둘째, 영성은 영적 존재를 만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히 12:9)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영이셔서(요 4:24) 당신의 피조물 또한 영적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창 2:7). 셋째,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존재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관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령하다’라는 표현은 오순절 이후에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배경에 깔고서 영성을 정의해보면 이렇습니다.

 

영성이란, ‘영이신 하나님(특히 성령)께서 영적 존재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지속적으로 역사를 이루심으로써 그 심령 가운데 형성하시는 신령한 상태’이다. 자, 이제 영성을 다 이해하셨지요? ^^ 사실 이 말은 죽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잘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 참된 영성의 출발점은 거듭남이다.

 

죄인인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첫 단계는, 부패하고 죄악 된 그의 심령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영적 생명을 부여 받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 현상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요 3:5-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행 2:38)

 

분명히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죄 용서를 받는다고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거듭남이 영성의 시작입니다.

 

2) 참된 영성의 목표는 신령한 자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거듭남은 참된 영성을 이루어 가는 시작일 뿐, 성숙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계속해서 신령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장성한 자로 성장하겠다는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 5:14)

 

3) 참된 영성의 형성은 성령께서 주신 자원을 올바로 활용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령님은 적어도 여섯 가지 영적 자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사용하여 우리는 참된 영성을 형성하고 신령한 자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a) 신령한 집(벧전 2:5)

 

성령님은 우리가 ‘신령한 집’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올 때(고전 12:13)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각자와 공동체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고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연합과 교제를 통해 참된 영성의 형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b) 영적 분별력과 신령한 지혜(고전 2:13-14; 골 1:9)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의 계발이 필수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한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이 점입니다.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여러 사역을 할 때는 분명히 크리스천인데, 막상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보면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적 분별력(고전 2:13-14)과 신령한 지혜(골 1:9)를 받았고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영성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c) 신령한 복(엡 1:3)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복을 누리게 하심으로써(엡 1:3) 우리가 복된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신령한 복을 누리면 누릴수록 참된 영성을 더 빨리 이룹니다.

 

d) 신령한 노래(엡 6:19; 골 3:16)

 

우리의 노래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성도 간의 교제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이렇게 찬양을 많이 하는 것이 영성 계발에 큰 도움이 됩니다.

 

e) 각양 다양한 영적 은사(롬 12; 고전 12)

 

영적 은사의 활용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성을 형성하도록 돕는 좋은 방편이 됩니다.

 

f) 신령한 제사(벧전 2:5)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각자가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사 행위, 즉 예배야말로 성숙한 영성을 이루어가는 구체적 통로가 됩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릴 때 영성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3. 참된 영성에의 길

 

1) 참된 영성의 표시는 사랑이다.

 

많은 이들이 영성의 표시로 성령의 은사나 능력을 꼽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영성을 가진 표시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점에 있어 아주 좋은 예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입니다.

 

“4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전 1:4-7)

 

성령의 은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만큼 풍족히 받은 예도 드뭅니다. 그들은 온갖 언변과 지식 등,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5). 그리고 그들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7). 어느 정도로 풍족했느냐 하면, 그것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께 늘 감사할 정도였습니다(4).

 

성령의 은사, 특히 신비한 은사들에 대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와 있는데,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등 여러 교회들 중에서도 유독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자세히 그러한 은사들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아서 풍족히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은사를 많이 받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말까지 들을 정도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당연히 신령한 자, 성숙한 신앙인,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고전 3:1)

 

그렇게 훌륭해 보이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고 영적 “어린아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건 그들에게 너무나 모욕적인 언사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전 3:3)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풍족한 영적 은사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판정을 받은 결정적 이유는 바로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그들 사이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의 파당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지적하며 안타까움으로 그들에게 야단을 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고전 1:11-12)

 

그들 사이에 이러한 시기와 분쟁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고 아무리 풍족하게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성숙한 신앙인,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 신령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새로운 삶” 과정 때 배우는 내용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골고루 만나서 교제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에게 “내일 나와 같이 점심을 먹읍시다. 그런데 그 사람에는 말하지 말고 당신만 나와.” 이런 식으로 살짝 어떤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그런다면 바로 거기서 파당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고린도 교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고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바울은 12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더 밝힙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열등의식에 빠진 사람도 있었고(15-16), 반대로 우월의식에 휩싸인 사람도 있었습니다(21). 그러한 잘못된 태도를 고쳐주기 위하여,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합니다. 12장의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고전 12:31b)

 

사실 우리가 ‘사랑 장’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철저하게 성령의 은사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주어진 내용입니다. 12장과 14장이 모두 은사에 대한 내용인데, 그 사이에 ‘사랑 장’이라고 부르는 13장이 있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은사와 연관시켜서 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랑의 특성으로 제시된 구절들을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13:4-7)

 

여기 나오는 내용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려고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특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영성의 표시를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갈 5:22-23)인 사랑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가 많든지 적든지, 무슨 엄청난 것이든지 잘 안 보이는 것이든지, 그것을 사용할 때 사랑으로 하면 바로 그것이 참된 영성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은사가 아무리 많고 신유나 예언처럼 대단해 보이는 것이라도, 만약 사랑이 없이 은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 영적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참된 영성의 원동력은 성령 충만에서 생긴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엡 5:18)

 

술에 취했다는 것은 술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술의 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 취한 사람으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소리를 지르든지, 눈물을 흘리든지, 평소와 달리 용감해진다든지, 술에 의해서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반면,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성령 충만이 필요 없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편에서 일시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성령 충만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권면한 것입니다.

 

3) 참된 영성의 핵심은 성령으로 사는 삶이다(갈 5:16-26).

 

참된 영성은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활동과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교회당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거나 목장으로 모일 때만 영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평소 삶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진정한 영성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성령님과의 동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은 우리 삶의 각각의 장에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각자 가정에서, 생업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영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길에서 운전하는 것이나, 쇼핑하는 것, 여행 가는 것을 다 포함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성경 몇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6절)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8절)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다’는 ‘성령의 주관 하에서 이끌림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25절) ‘성령으로 행하라’는 16절의 경우와는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규칙에 맞추어 걷다’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이 동사를 “keep in step with the Spirit”(성령과 지속적으로 보조를 맞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세 가지 동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결국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주관 하에서 그분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분의뜻에 맞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으로 사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내면적 싸움이 포함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죄성이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실상은 이렇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7절)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거룩하고 선한 싸움을 지치지 말고 계속 해나가야만 합니다. 이러한 영적 씨름이 없이는 ‘성령으로 사는 삶’을 언급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어떤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그분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즉, 계속적으로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며 그분이 원하시는 생각을 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말을 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삶에서 뭐가 나옵니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을 알 수 있는 길은,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지 보면 됩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결코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들어가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닙니다. 기도나 성경 읽기를 하지 말라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참된 영성으로 가게 해주는 통로이지, 목적지가 아닙니다.

 

결국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아니라,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원래 하루에 10씩 일주일에 70을 섬기는 건데, 오늘은 한꺼번에 30을 섬겼으니까 내일과 모레는 안 해도 되겠다.’라는 식으로 계산을 하며 섬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따뜻합니다. 푸근합니다. 함께 있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 조금 전까지도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였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니까 이상하게 밝아지고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걱정입니다. 목사 옆에는 아무도 안 앉으려 합니다. 또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도 목사가 나타나면 조용해집니다....)

 

사람들은 영성이 깊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계산하지 않고, 손익을 따지지 않고, 희생할 줄 알고, 자신의 것을 줄 줄 알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늘 같으며, 장소마다 말이 바뀌지 않고 늘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성이 깊은 사람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매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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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점검과 기도

 

- 나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인가? 성령 충만한가? 사랑을 실천하는가?

 

- 나는 사랑 실천에 있어 사람을 구분해서 하는가? 계산해서 하는가?

 

주여, 변화시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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