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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갈라디아서

갈 4장 19-20절(예수 살이) - 최태선

by Preacher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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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4장 19-20

예수 살이

최태선 목사 2005.9.4.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성경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의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환영하고 예수님을 가장 받들어 모시고 보호해야 할 유대인들이 거꾸로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오늘도 그렇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손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여 완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아래 꿇어앉아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는 하지만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을 아파하며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분의 희생 앞에서도 자신의 희생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세상적인 성공과 안위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우리들 때문에 그분은 오늘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정작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용기 없는 우리들에 의해 그분은 오늘도 쓸쓸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모여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우리는 미워하고 분열하고 전쟁으로 서로를 죽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온 몸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믿음의 이름으로, 그분을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그분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밖에 있는 무신론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우상과 광신, 그리고 맹신과 근본주의에 의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분을 모르기 때문에 그분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분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사회가 혼탁해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져도 사회는 혼탁해집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 안에서 예수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처럼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자기 집단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 자기 혼자만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분을 살리지 않고는 이 세상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어떻게 살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갈라디아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그리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해산의 고통을 감수하며 몸을 바쳐야 합니다. 그 고통은 십자가입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예수를 살릴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우리는 내 안에 죽은 예수를 살려야 합니다. 나의 사고, 나의 욕심, 나의 변명으로 인해 죽은 예수님을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살려놓지 않고서는 예수를 살 수 없습니다. 예수살이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물을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죽었단 말입니까? 물론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그분은 분명 살아계십니다. 여기서 예수를 살린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살지 못하여 죽인 예수님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너무도 무거운 교리라는 옷을 그분에게 입혀 그분조차 당신의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거동할 수 없게 만든 그 옷에서 그분을 해방시켜 그분을 살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다 언덕을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함께 올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분의 골고다 행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분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감상에 젖어 그분의 수난을 가슴아파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슬퍼하고 아파하며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 모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을 때, 우리가 골고다를 오르지 않을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른 예수님, 그분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오신다면, 그분은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아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을 믿으실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분의 복음을 해석하는 우리의 의식과 사고가 너무도 고상하고, 그분의 복음을 실천하는 우리의 행동방식이 너무도 품위가 있어서, 정작 그분은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복음을 따라 사실 수 없을지도 모를 것입니다. 밤하늘을 빨갛게 수놓은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저건 내가 지고 간 십자가가 아니야.” 하시며 더 이상 당신의 십자가는 없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까요?

 

2000년 전 그분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청중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복음이란 기존의 사고를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사고를 완전히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면 복음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분이 오셔서 우리의 복음을 듣는다면, 예수님께서 오히려 2000년 전 당신께서 지신 십자가에 부여된 의미를 새로 익히고,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새로 이해하고, 그 새로운 해석을 배우기 위해 당신의 사고와 행동을 바꾸셔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의 복음 해석에 적응하지 못하여 회개조차 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 외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선포하는 우리 입에서 나온 그 예수라는 이름에서 그분은 정작 고립되어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한숨짓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예수님을 비참하게 만들면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살려 달라고, 이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달라고 열심히,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도 과연 그분은 우리를 살려주시고, 이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이루어 주실까요?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그분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분에게 그분은 누구이며, 그분에게 우리는 누구일까요? 누구의 예수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어느새 우리는 ‘다른’ 예수를 믿는 것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와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생각으로 ‘다듬어진’ 예수를 만들어 놓고 그 예수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예수로는 예수를 살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수살이를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예수살이를 해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 스스로도 살 수 없는 그 복음살이를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예수 살리기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니심을 보고 세례 요한이 함께 섰다가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자, 함께 있던 그의 두 제자가 곧바로 예수를 좇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어디 계시오니까?”하고 예수님께서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디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와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분이 머무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중 하나였던 안드레는 자기 형인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전하면서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요1:35-42)

 

그들이 가서 본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믿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을 감동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화려한 궁전이었을까요? 넓은 평수의 주상 복합 아파트였을까요? 장엄하게 펼쳐진 대자연이었을까요?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분이 머무시는 곳을 보여주셨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그곳에서 그분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에 감명을 받아 그것을 자기 형에게, 이웃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떠올리게 됩니다. 큰 별이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초자연적인 일이 발생했지만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은 그야말로 머리 둘 곳이 없는 말구유였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고 말하지만 말구유라는 말은 우리에게 확실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합니다. 말구유라는 말은 여물통입니다. 그분은 여물통에 누여졌습니다. 어지간히 가난한 사람도 아이를 마구간에서 낳지 않습니다. 마구간에서는 여물통이 그래도 그곳에서 제일 반듯하고 깨끗한 장소입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초라한 출산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를 보고 만나고 경배하였습니다.

 

말구유에 눕혀진 보잘것없는 그 아이를 팔에 안은 시므온은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에게서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를 따라 나선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서 화려한 궁전이나, 잘 정돈된 정원에 수영장이 딸린 저택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서 본 것은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서 본 삶은 세례 요한이 한 말과 같은 ‘하나님의 어린양’과 같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온갖 굴욕 속에서도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고,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폭력을 휘두른 일이 없고, 입에 거짓을 담아본 적이 없이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여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히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사 53:7-9)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십자가 죽음에까지 어린양처럼 순종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인류와 함께 하신 공동체의 삶, 그것이 그분의 삶이었습니다. 그 삶을 보고 그들은 예수살이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예수살이를 하기 위하여 ‘자기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거주하는 곳으로 모여들어 예수살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이 거주하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그곳에 너무나 화려한 궁전을 지어놓고, 우리가 좋아하는 온갖 색깔로 장식한 옷을 그분에게 강제로 입혀, 그분을 꼼짝 못하게 그 안에 모셔놓고 그 안에서만 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은 설교하는 목사들과 교회의 입에만,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의 입에만 살아 있고, 그들의 삶 속에서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정작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분의 복음이 아니라 우리가 해석하고 그 수위를 조절한 ‘우리’ 복음, ‘내가’ 복음은 아닐까요? ‘그분은 그리스도,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외치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남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면서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 없이는 살 수 없다면서 십자가를 향해 예배드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강요하지만 정작 자신의 십자가는 금으로 치장한 목걸이로 만들어 자신을 치장하는 장신구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겉으로 보기에는 짐짓 무거워 보여도 무게가 나가지 않는 거짓과 위선의 십자가는 아닐까요? 우리의 사고와 교리 안에 갇힌 예수, 그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리고, 예수살이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살이를 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갇힌 예수님을 어떻게든 먼저 살려놓고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이 내게 다시 살아날 때, 그분의 복음과 십자가가 내 안에서 다시 의미를 찾을 때, 나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살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다른 사람 안에 탄생하면서 남을 위하여 나의 털을 깎이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리지 않고는 예수를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나는 내 안에 죽은 예수를 살려야 합니다. 그것은 바울의 표현 그대로 해산의 고통이 따르는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사고, 나의 욕심, 나의 변명 때문에 죽은 내 안에 예수님, 그분을 살려내야 합니다. 나의 사고, 나의 욕심, 나의 변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부족한 ‘나’를 위해 죽으셨듯이, 나도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깨닫는 날, 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살이입니다.

 

유구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진정한 새 생명을 불어넣어 역사와 세상을 새롭게 했던 이들은 바로 이들 예수살이를 한 사람들이었었습니다. 아무런 야심도 계획도 조직도 없이, 그냥 조용히 참되게 산 분들이었습니다. 베네딕트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켈커타의 어머니 테레사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움부리아의 작은 예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예수살이가 어떤 삶인가를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여 주소서.

 

주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얻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스스로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이 기도에 맞춰 점검해보십시오. 나는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고 있는가? 나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고 있는가? 한 문장, 한 문장에 여러분을 대입해 보십시오. 한 문장 한 문장이 예수살이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 기도의 내용과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보고 여러분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 예수살이'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보낸 편지 곳곳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오늘의 본문 또한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주님은 오늘도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위해 해산의 고통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살이 하는 최 태선, 예수살이 하는 최 창국, 예수살이 하는 김 미옥..... 예수살이 하는 어지니교회입니다.

 

이 초라한 우리들의 예배, 그러나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살아나시고, 우리의 삶이 예수살이로 드러나고 보여질 때, 우리 어지니교회는 이 시대에 복음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말구유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의 찬송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로 세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진정으로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예수살이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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