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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에스겔

겔 28장 1-10절(우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 안효관

by Preacher 202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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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28장 1-10

우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안효관 목사 2019-10-06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사도행전 10장에 초대교회 역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던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 사건입니다. 이것을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방인과 접촉할 수 없는 문화 속에서 사도가 이방인에게 공식적으로 세례를 베풂으로 이방 선교의 문을 연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도 베드로는 욥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보게 되는데, 유대인이라면 어려서부터 결코 먹지 않는 속된 짐승이 가득 담긴 큰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베드로에게 ‘이것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거부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속되고 깨끗하지 않는 것은 먹은 적이 없는데 어찌 이것을 먹으라고 하시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그런 환상을 세 번이나 반복해 보던 중에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고넬료에게로 갑니다.

 

그 시간 가이사랴에서는 고넬료가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을 다 불러모아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도착하자 베드로를 반겨 맞으며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여러분, 왜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을 했겠습니까?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아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할 때 ‘엎드려 절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 앞에서 인간이 드리는 경배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넬료는 베드로를 마치 하나님을 맞은 것처럼,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처럼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그렇게 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넬료는 지배국의 관리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사회적으로 그 어떤 지위나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한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배운 것도 거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배국의 군인 관리가 피지배국의 소시민에게 그렇게 절을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듯 말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그렇게 절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고넬료는 기도하던 중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청해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특별히 보내주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결코 절을 할 수 필요나 이유가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에 마치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베드로에게 절을 한 것입니다. 고넬료로부터 그렇게 경배를 받듯이 절을 받은 베드로는 급히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서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사도행전 10:25)

 

여러분, 우리가 어딘가에 가서 누군가로부터 그런 황송할 정도로 대우를 받는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나보다 더 영향력이 있고, 나보다 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나를 그렇게 극진하게 대우해 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인간적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그것에 도취되지 않고 ‘자신은 사람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자신은 그런 대우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세례식은 그렇게 자신을 철저히 ‘사람일 뿐’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극진히 대우를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도취되지 않고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바르게 깨닫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제1차 선교여행 중에 루스드라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을 고쳐주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고쳐 걷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함께 갔던 바나바에게는 제우스 신이라고 하고, 바울에게는 헤르메스 신이 강림한 것이라고 칭송을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과 바나바가 자기들의 옷을 찢으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일뿐’이라고 말하며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사도행전 14:15) 만일 그 때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자기들의 인기에 도취되어 그들의 제사를 받으면서 어깨를 우쭐거렸다면 더 이상 바울도 바나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일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을 고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들과 다름없는 똑같은 사람이기에 우리가 추앙을 받아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칭찬조차도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게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영광이나 칭찬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뛰어난다 하더라도 흙으로 지어진 존재일 뿐입니다. 바람이 불고 시간이 지나면 다 허물어지고 부스러지는 진흙일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흙이 그 재료였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 사람의 이름이 ‘아담’인데, 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은 흙입니다. 아무리 멋지게,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인간은 아담일 뿐입니다. 흙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종종 우리가 흙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자신에게 뭔가 좀 특별한 것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자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신이 뭔가라도 되는 것처럼 우쭐거립니다. 심지어는 흙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로의 왕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의하면 두로 왕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 지역의 몇몇 나라에서는 왕이 신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시리아가 그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애굽에서도 바로라는 왕은 신들의 집단에 속한 신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로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두로 왕 역시 자신은 신이 선택한 왕이기에 신적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를 신처럼 추앙했습니다. 더군다나 두로는 해상무역을 통해서 거대한 부와 영화를 얻으면서 국제사회에서 그 위상이 아주 높았습니다. 두로는 가나안 땅 북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입니다. 본문 2절에서 두로 왕은 스스로를 가리켜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 앉아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두로라는 도시국가는 육지에서 약 700m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두로의 등 뒤로 위치해 있는 페니키아에는 해발 3천 미터 높이의 레바논 산지가 가로막고 있어, 두로는 자연스럽게 바다로 진출을 했습니다. 일찍부터 발달된 항해술을 이용해서 먼 바다로 나가 지중해 여러 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무역을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두로 왕의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오늘날 두바이가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건물을 세우는 것처럼, 이미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인 주전 10세기에 두로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섬 사이의 바다를 메워 16만 평방미터(약 5만 평)에 이르는 거대한 거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문명이 발달하고 해상무역이 발달한 두로를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고, 그래서 두로 왕은 점점 마음이 교만하여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당시 두로 왕은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왕이라는 주장으로 백성들로부터 신적 권위를 인정받았고, 해상무역을 통해서 지중해 주변의 많은 나라들로부터 부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쉽게 두로를 넘보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신이라고 자부하면서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2절) 사람들이 뭐라 그래도, 주변 나라들이 뭐라 그래도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순간 그의 존재는 한없이 추락하고 맙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사람됨의 가치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됨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자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처럼 인간이 흙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인간은 겸손해지고 스스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자리를 잊어버리고 두로 왕처럼 자신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라고 착각하는 순간 교만해지고, 교만한 사람은 결국 망하기 마련입니다.

 

두로 왕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3절에 보면 두로 왕은 지혜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4-5절 말씀처럼 그 지혜를 가지고 막대한 재물을 얻었고, 금은보석을 곳간에 가득히 채워놓았습니다. 무역을 잘 해서 엄청난 재물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두로 왕은 교만해졌습니다. ‘나만큼 돈 잘 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나만큼 무역을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렇게 호기를 부릴 정도로 교만해졌습니다. 자기 위에 그 어떤 존재도 없는 것처럼 교만해졌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여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7절 이하에서 두로에 임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실 것입니다. 지혜를 자랑하고 부귀영화를 자랑했던 두로의 목을 꺾으실 것입니다. 그 이방인의 손에 두로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주전 332년 2월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알렉산더를 대항하여 페르시아 군대가 페니키아의 섬나라 두로에 해군력을 집중시켰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두로는 해안으로부터 700m정도 떨어진 섬나라였고, 육중한 성벽으로 둘려쌓여 있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처럼 여겨졌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에는 해군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 대왕은 육지로부터 섬나라 두로까지 폭 60m에 달하는 공격로를 만들었고, 두로 해군의 집요한 방해에도 6개월 만에 난공사를 마치고 두로를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른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그 높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그것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도 지혜롭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두로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왕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는 ‘멜레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두로 왕을 가르킬 때는 멜레크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나기드’라는 말을 씁니다. 이 ‘나기드’라는 말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나 족장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분명 두로의 왕은 왕(멜레크)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왕을 왕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한 집단의 우두머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두로 왕은 왕(멜레크)를 뛰어넘어 스스로를 신(엘)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왕(멜레크)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여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 한다고 해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이 올라가려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를 낮추고 또 낮추십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자랑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면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리 지혜롭다고 자랑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틀어버리시면 그가 가진 지혜로 그 어떤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다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작고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제 아무리 날뛴다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히 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아짐으로 하나님을 높일 때에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에 머물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는 흙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우리를 빚으실 때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우리가 강철이라고 주장한다고 강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서뜨리신다면 부서질 수밖에 없는 흙입니다. 우리가 흙임을 기억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겸손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속성은 우리 스스로 자꾸만 높아지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가졌다고 우쭐거리게 만들고, 남들보다 지혜롭다고 그것을 뽐내고 싶어 하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피알(PR)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끄는 교만에 우리 스스로 속지 마십시다. 자랑하고 싶은 욕망,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내려놓으십시다. 그리고 우리는 아담(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시다. 흙인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 앞에 겸손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겸손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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