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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4장 15-19절(하나님께 더 가까이) - 안효관

by Preacher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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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44장 15-19

하나님께 더 가까이

안효관 목사 2016-10-2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영국의 영성 작가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작가로 불리는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가 쓴 『악마의 편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한 노신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매주 해오던 것처럼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는데, 마침 신앙서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사는 그 책을 보는 순간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분은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책을 펴서 읽고 있는데, 그의 마음속에 악마가 찾아와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런 골치 아픈 생각은 무엇 때문에 하는 거야? 곧 점심시간인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그런 생각이 들자 신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책을 책장에 꽂아 놓고는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또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악마가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속삭입니다. ‘밥 먹는데 소화 안 되게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해? 우선 밥이나 먹고 생각해!.’ 식사를 끝내고 다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는데 또다시 악마가 방해합니다. ‘그런 생각은 한가할 때 해도 되잖아? 오늘은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으니 다른 날 생각해.’ 결국 그 신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얻지 못한 채 도서관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노신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비단 그 신사만의 문제입니까? 그 신사에게 악마의 음성을 들려주었던 그 악마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음성으로 속삭이고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살다보면 얼굴이 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만 닮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얼굴보다도 마음이 서로 닮아가기 때문에 얼굴도 닮아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다 보면 생각하는 것이 같아지고 삶의 습관도 비슷해집니다. 그렇게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닮지 않을래야 닮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우리 성도를 부부 사이로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부부사이인 예수님과 우리는 닮아가야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 보면 예수님과 우리는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을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 한 지가 꽤나 오래 되었는데 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한 것입니까? 어쩌면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할 시간에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와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많이 생각하고 세상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후서 1:4) 무슨 말입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가지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용서하시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예수님의 성품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이 가지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의 삶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분의 삶을 닮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따르는 무리가 아니라, 그런 모습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 지금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던 바로 그 시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먼저 유다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그들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얼마나 컸는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성전을 떠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포함해서 유다 땅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서 머물러 계실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온 땅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죄악에 물들어 있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내야 할 곳입니다. 마지막까지 의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어야 할 곳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8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에 보면, 성전도 죄악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 내부를 환상으로 보여주시는데, 거룩해야 할 성전 구석구석 - 모든 곳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고 죄악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11:22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결국 성전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떠나셨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셨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과 유다를 버리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떠나시고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전만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에 절대로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를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유다는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온갖 고생과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 -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성전의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파괴된 성전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성전이 회복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곧 성전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할 때도 그랬지만, 하나님께서 성전을 포기하셨다는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포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거꾸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말씀은 곧 이스라엘과 유다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표시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금 성전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에스겔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에스겔 43:1-5절에 보면 예루살렘 동쪽으로 떠나갔던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동편으로부터 다시금 되돌아 와서 성전 동문을 통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안에 들어오니까, 43:5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성전은 이미 파괴되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에스겔 41장과 42장에 장엄하게 기록되어 있는 그 성전은 역사적으로 이 지상에 건축된 그런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버리고 난 지상성전은 어둠과 죄악만이 가득했기 때문에 파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하는 성전이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여질 성전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이스라엘이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성전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구체적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전이 성전일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있어야 하고, 예배를 돕는 레위인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제물도 드려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임하여 있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제사장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에 보면 거듭 반복해서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께 수종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갖추어야 할 그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그분을 닮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2:9)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성결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본문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말씀 바로 앞인 12-13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악을 행한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제사장 직분을 행치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이라고 모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죄악을 범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날 때에도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죄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에 동참하지 않고 성결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독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더라도, 죄악을 행하는 삶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0:30절 이하에 보면,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물두멍에 손을 씻고 제단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두멍에 손을 씻는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앞서 세상에서 때묻은 죄악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죄악을 가지고 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죄악은 우리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씻음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릴 때에도 죄악에 때묻은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십니다. 죄악된 모습이 혹 있더라도 십자가 아래 다 내려놓고, 십자가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 받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땀나는 겉옷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수종드는 사람은 양털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18절에서는 “땀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양털 옷’은 추운 겨울에 입는 두터운 방한복 같은 것을 말합니다. 겉모양은 고운 털 때문에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걸 입고 있으면 온 몸에 땀이 나서 제대로 수종드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섬길 때에 땀을 흘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정하고 불경한 모습’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두터운 옷을 입지 않습니다.

 

제사장에게 ‘겉모양이 화려한 양털옷을 입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제사장들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위선’이라고 말하는 그런 모습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위선’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예수님은 굉장히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싫어하신 이유도 그들의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을 보시면서 아주 역겨워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죄악으로 가득 찬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순수하고 성결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순결한 모습, 가식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모습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거짓의 가면을 벗고, 조금 못난 부분이 있더라도 -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조금 추한 모습이 있더라도 그것을 숨기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서 용서를 구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은 양털 옷 대신에 가는 베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가는 베로 만든 관을 써야 하고, 가는 베로 만든 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가는 베옷’이라는 것은 세마포로 만든 옷을 말합니다. 여러분, 베옷은 어떤 사람들이 입는 옷입니까? 세마포 옷 - 베로 만든 옷은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할 때 입는 옷이고, 죽은 사람들에게 입혀주는 옷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여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 두었던 무덤에 장사를 지내드리면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몸에 세마포 옷을 입혀 장사를 지냈습니다. 요즘도 수의는 대부분이 베로 만든 옷입니다. 베옷은 죽은 사람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제사를 드리며 수종드는 제사장들에게 죽은 사람들이 입은 세마포 옷을 입도록 하셨습니까? 본문 15절에 보면,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은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죽여 그걸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짐승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을 하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은 날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죽여 제물로 드리면서, 자신도 그 짐승과 함께 죽는다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제단 앞에 서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이미 짐승보다 앞서 자신을 제단 앞에 죽여서 바쳐진 존재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로 바쳐진 짐승이 죽어야만 그 제사를 받으십니다. 살아 있는 대로 드리는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도 자신이 하나님께 수종들 때에는 제물과 같이 죽은 모습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세마포 옷을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우리 자신이 죽어져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나의 자아가 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만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의’나 ‘나의 자랑’ ‘나의 권위’ ‘나의 자존심’ ‘나의 욕망’ 등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살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가장 먼저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나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은 모두 ‘우리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죽어야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죽어야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제물이 죽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것같이,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죽여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내 욕심이 죽어야 하고, 내 감정이 죽어야 하고, 내 생각이 죽어야 합니다. 내 자존심이나 내 자랑거리가 다 죽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도록 나 자신은 온전히 죽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통해서 거룩함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레위기 10: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나타내시고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시인 다윗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65:4) 하나님의 제단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복을 받은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다. 세상이 우리에게 무어라 속삭인다 하더라도 그 세상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마십시다. 우리가 성결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십니다. 우리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의 품에 품어 주십니다.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십시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사는 것,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입니다.

 

<2016년 10월 23일 주일 낮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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