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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시록

계 10장 9-11절(삶에 나타나는 말씀의 능력) - 이삼규

by Preacher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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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0장 9-11

삶에 나타나는 말씀의 능력

이삼규 목사 20160619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계 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계 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계 10: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오늘 본문과 연관이 있는 구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겔 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두루마리를 먹는 것과 배에서 쓴 맛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입에서는 달콤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화되려면 쓴맛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선지자에게 말씀의 선포를 지시할 때,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삶의 한 부분이 될 때, 또는 그리스도인의 증인의 삶을 우리에게 명령할 때 우리의 육신은 그것의 쓴맛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적대적 태도, 육신의 연약함, 또는 마귀의 사악한 증오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부흥회나 주일에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고 아멘으로 달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말씀을 삶속에서 실천하려면 힘이 듭니다.

 

인간의 타락은 세상에 최대의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죄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렸고, 인간은 죄와 허물로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죄가 병(病)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암과 같은 것 말입니다. 사람이 병에 걸릴 수 있고 또 병에 걸려 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병에 대해 인간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병사하는 것은 딱한 일이지만 그것에 대해 그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어떤 질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비유 중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두 아들 중 동생이었던 탕자는 작심하고 세상에 나가 방탕한 삶을 살며 돈을 다 써 버리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들에 나가 돼지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었습니다. 그의 고생은 그가 피할 수 없는 어떤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아마비나 심장마비 같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자초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나쁜 상태에 빠져있는 것은 우리가 자초한 일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구조 받지는 못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속량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의롭다함을 얻고 거듭났습니다. 의롭다 함, 즉 칭의를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고, 거듭났다는 것은 두 번째 출생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칭의와 중생이 주어졌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구조(rescue) 받은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흥의 첫걸음은 항상 교회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인정하는 믿음을 교회의 생명력의 한 부분으로 삼았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첫째, 인류는 나쁜 상태에 빠져 있다. 둘째, 역사 속에 최대의 재앙이 있었다. 셋째,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받았지만 아직 구조 받지는 못했다. 우리는 위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늑대들에 둘러싸인 양과 같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도 나타납니다.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그가 당한 고난들, 예를 들면 투옥이나 매 맞음이나 파선 같은 것들을 길게 열거합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증언에 따르면, 아직 구조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속량 받았지만 아직 고난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교회도 딱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속량 받은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보혈로 씻음 받고 심판을 면제 받은 교회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구조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지만 교회는 이 땅에 있습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최근 15년 간 약 1만1천500명의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1만3천여 교회가 방화 등으로 인해 파괴됐고, 130만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인근 국가로 피신하는 등 난민이 됐습니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수입니다. 북부 나이지리아는 1980년대만 해도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강경 원리주의자들인 와하비와 살라피스트의 가르침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아랍 국가로부터 돌아온 나이지리아 학자들과 학생들에 의해서 급격하게 극단주의 이슬람 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설자리를 잃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교회가 교회답게 행동하는 한,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교회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물론 모든 인간이 당하는 일반적인 어려움은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먹어야 합니다. 마치 선지자들이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가 먹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진리를 갖다 먹으라는 명령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도 두루마리를 먹어서 그것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는 처음에는 답니다. 진리를 노래하면 아주 즐겁습니다. 진리를 읽어도 매우 기쁩니다. 그러나 진리가 주인 노릇하게 되면, 즉 진리가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우리의 행동양식과 제 2의 천성으로 변하면 우리의 육신적 본능은 진리를 쓸개즙처럼 쓰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진리에는 행동과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천국에 있다면 진리가 무한히 달기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 있다면 진리가 쓰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천국에 있지 않고 이 세상에 있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성도와 죄인이 함께 사는, 기쁨과 슬픔이 모두 있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진리가 때로는 우리에게 아주 쓴 맛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진리가 우리 몸 안으로 깊이 스며들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날카로운 것인데 그 날카로움을 싫어합니다. 진리는 고통스러운데 우리는 그 고통스러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쓴데 그 쓴맛은 우리가 피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타협을 선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큰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 착각은 우리가 속량 받았으므로 구조까지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날에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구조 받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의 싸움

 

우리의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싸움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 교회를 가리켜 전투적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두루마리를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조금씩 갉아먹기는 하지만 삼키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에 사로잡히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려 하고 말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성경책을 새로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만, 성경 말씀에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말씀에 복종하면 말씀의 쓴맛을 뱃속 깊이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뱃속에 들어간 말씀은 혹독하고 날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 뻔 하기 때문에 삼키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그들을 조종하게 허락하지 않고 그들이 말씀을 조종합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 죽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힘들 때가 언제입니까? 아플 때입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우리 시아가 배가 아파서 정읍 아산 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자기들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전주 예수 병원 응급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응급실에 가보니까 우리 시아보다 더 작은 갓난아기들도 와서 치료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갓난아이에게 주사를 꽂아야 하는데 혈관을 찾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간호사들이 아이의 손을 문지르고 발을 문지르고 별 짓을 다해도 혈관을 찾기가 힘듭니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부모가 없는 곳에 가서 몇 번을 찔렀는지는 모르지만 주사를 놓아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너무도 힘들고 아팠을 것입니다. 차라리 아기 대신 자신이 아플 수 있다면 아프겠다고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거나 아플 수 있다는 것은 그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자식에게 하듯 그렇게 헌신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빠져나갈 길을 찾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길을 찾습니다. 고난을 피하기 위해 숨을 수 있는 ‘도피의 동굴’을 찾습니다. 온전한 헌신을 피해 빙 둘러 갈 수 있는 길을 어떻게든 만들려고 발버둥 칩니다. 정통교리를 믿고 말씀을 조금씩 갉아먹는 성도들은 많아도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포기하면서까지 헌신할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는 거의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 날 백만 원을 벌 수 있다면 여기 몇 분이나 나와 계시겠습니까? 모르면 몰라도 3분의 2이상은 다 빠져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두루마리를 씹었지만 삼키지 않고 다시 뱉어냅니다. 다시 말하지만, 두루마리를 삼켜서 뱃속 깊숙이 들어가게 하지 않고 단지 입으로만 씹을 때, 그것은 매우 달콤합니다. 오늘 본문은 꿀 같이 달콤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경제적 이익이 눈앞에서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두루마리를 삼켜 뱃속 깊이 집어넣을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얼마나 될까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자기의 혈족 관계를 희생시킬 용의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혈족 관계를 희생한다는 것은 복음을 위해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감수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해서 부모와의 혈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금기(禁忌), 종족과의 유대관계를 끊고 공동체로부터 떠나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유대교의 어떤 분파에서는 유대인이 회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의 가족은 그의 장례식을 치러버립니다. 그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그의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으며 그와 소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슬람이 국교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두루마리를 갉아먹다가 뱉어버리면 안 되고 그 두루마리가 우리 뱃속 깊이 들어가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해야 합니다.

 

두루마리를 삼킬 준비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두루마리에 담긴 영양으로 혈색이 좋아질 때까지 그 두루마리를 씹고 삼키고 소화시키고 영혼 안에 흡수 시켜야 합니다. 동물들 가운데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반추동물인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동물입니다. 이 동물들은 풀이나 사료를 먹고 누워서 되새김질을 합니다. 되새김질을 하기 때문에 아주 곱게 변을 보게 됩니다. 완전히 소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진리의 말씀을 그렇게 먹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상대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까지 그는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손가락을 대면 그 손가락을 통해 오직 말씀이 흘러나와 그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말씀에 들어 있는 어려운 진리들까지 섭취하여 실천에 옮기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단맛 나는 부분만을 섭취하면서 “성경 말씀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정말 달콤한 책이다!”라고 감격합니다.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재빨리 달려가 새 역본을 구입해서 그 맛의 미묘한 차이를 조금 더 느낍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우리를 바꾸도록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부흥이 언제 일어납니까?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 다수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두루마리를 삼켜 삶에 철저히 적용하겠다고 결심할 때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되는 엄숙한 시간에 성경 말씀을 씹고 삼켜 뱃속으로 집어넣어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하겠다고, 말씀에 저항하는 것을 모두 제거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자기 일을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제 2의 천성이 되고 그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변한 것을 보시고 성령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단맛 나는 부분만을 갉아 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 말씀을 삼켜야 우리와 우리의 삶이 변합니다. 말씀을 뱃속 깊이 집어넣어야 나만의 안정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담대한 병사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순교까지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즉,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영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루마리를 씹어 삼켜야 합니다. 다시 토해내지 못하도록 완전히 깊이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쓴 맛을 보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도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찌 쓴 맛을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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