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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시록

계 14장 1-13절(영원한 복음을 붙드는 교회) - 서명성

by Preacher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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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4장 1-13

영원한 복음을 붙드는 교회

서명성 목사 2017.12.31.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2017년이 저물고 2018년 무술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2017년 교회 표어는 ‘한 마음으로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였습니다. 부족한 것도 있었고 아쉬운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목장, 사역부서, 선교회, 주일학교, 한국학교, 찬양대와 경배팀을 통하여 감당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매년 10월쯤 되면 신년도 표어를 구상하느라 고민을 많이 합니다. 지난 10월 총회 임원회 참석차 제주도를 방문하였을 때, 머물고 있던 수양관에서 하루는 말씀을 묵상하는데 하루는 제 마음에 ‘영원한 복음’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2018년 교회 표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복음을 붙드는 교회”오늘은 이 표어가 만들어진 배경이 된 본문을 함께 살펴보며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해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계시록 전체의 핵심을 이루는 14장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당시 신자들에게 의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양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지만, 어린양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1세기와 지금을 비교해 볼 때 고난의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 크든 작든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그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길을 가느냐가 어린양 앞에 서 있는 144,000에 속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의 승리(1-5절)

 

계시록 13장을 보면 사탄의 사주를 받은 악의 세력들이 무서운 기세로 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의 도전은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들의 공격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짐승과 짐승의 세력이 가하는 고통으로부터 교회 공동체가 언제 자유케 되는지 정확한 때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제공하는 유일한 대답은 마지막에는 성도들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14장은 어린양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용과 두 짐승의 거센 핍박과 미혹 속에서 사투를 벌인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지키셨습니다. 하늘의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둘러선 144,000의 성도들이 보입니다. 요한이 마지막으로 어린양을 본 것은 계시록 7장 9절이었는데 그분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큰 환난에서 나온’많은 무리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또다시 어린양을 봅니다. 오직 시온 산에 서신 어린양만이 영원한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그와 더불어 최후의 승리를 얻은 신자들이 144,000입니다. 그 숫자는 상징적인 것으로 신구약시대의 구원 받은 무리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표가 아닌 어린양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144,000의 특징

 

1)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

 

‘여자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들’이란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거듭된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정결을 지킨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죄로 물든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을 거부하고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하였습니다. 바알을 따라간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적으로 간음하는 죄를 범했다면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섬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순결하여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됩니다.

 

2) 어린양을 따라가는 자들

 

‘따른다’는 말은 제자도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마가복음 8:34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당장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당장 지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144,000이 보여준 제자도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린양을 따랐기에 하늘에서 보상이 주어집니다.

 

3) 구속을 받은 자들

 

‘사람 가운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 가운데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선택받은 것은 자신들의 행위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지불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4) 처음 익은 열매로서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

 

출애굽기 23:19에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확 시에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린다는 뜻이 있지만 전체를 다 하나님께 다 드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20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여기서 첫 열매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은 죽은 상태에 있으나 마지막 날에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된다고 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것은 처음 믿게 된 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 모두가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야고보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첫 열매’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5) 입술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주님의 권능으로 인침을 받은 주님의 소유답게, 하늘에 거하게 될 거룩하고 존귀한 자답게, 궁극적인 승리를 얻을 자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어생활을 주의해야 합니다. 충분한 근거 없이 한편 말만 듣고 다른 편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거나, 거짓말을 퍼뜨리고 무리를 지어 공동체를 허물려는 행위는 모양이라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함은 성도의 능력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닮아 점점 거룩해져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서는 날 변화되어 온전해집니다. 어린양 앞에 선 144,000명이 하나님의 역사로 성화인 완성인 영화의 상태에 마침내 도달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때 하늘에서 웅장한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요한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뇌성과도 같은데,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하면서 하나님 보좌 주변에서 경배하는 큰 무리의 소리를 묘사합니다. 그것은 마치 수천, 수만 가지의 악기를 가진 오케스트라의 연주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산 위에서 구원의 새 노래를 부르게 해주십니다. 곡조와 가사가 새로워서라기보다는 구속받은 이들이 새로운 심령 상태로, 감격 속에 부르기 때문에 새 노래입니다. 그 노래는 누구도 배우거나 부를 수 없고 오직 구원받은 천국 백성들만이 부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오늘’고난 앞에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을 보일 때, ‘내일’주 앞에서 정결한 모습으로 찬양하는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세 천사를 보았습니다. 이 천사들은 각각 큰 소리로 외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라(6-7절)

 

첫 번째 천사가 가진 메시지는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앞으로 다가올 진노와 심판을 피하라는 경고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경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먼저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선악 간에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잠시 후면 이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 복음을 들을 수 있을 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첫 번째 천사가 말하는 메시지는 영원한 복음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생명의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복음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2) 바벨론이 무너졌다(8절)

 

둘째 천사는 음행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말을 반복하며 엄중한 파멸을 선언합니다. 바벨론은 짐승이 주관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인류 문명 혹은 인간의 삶은 반드시 종말을 고할 때가 있습니다. 바벨론이 사람들을 음행의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습니다.

 

3) 영원한 고통 가운데 있다(9-11절)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심판에 대한 첫 번째 묘사는 섞이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대개 물로 희석시킨 후에 병에 담습니다. 그런데 섞이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독한 술을 마시는 것 같이 정도가 심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과 그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이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저주받은 영혼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든지 간에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 이상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세토록’과 ‘밤낮’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끝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도 안식(구원)을 얻지 못한 채 불과 유황으로 세세토록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부으시는 진노의 잔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경고하는 이유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경고를 소홀히 여기며 회개할 기회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주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구원(안식)(12-13절)

 

짐승을 따름으로 영원히 안식하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과 대조적으로 요한의 때로부터 종말 때까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에 나오는 성령의 유일한 약속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주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안식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어떤 모습이 증거가 됩니까?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께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지라도 고난은 있지만 주님을 섬김으로 받는 고난은 잠시뿐이며, 그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육신 장막을 벗는 순간,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새에 그들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단의 세력 때문에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만 인내하며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고난이 아무리 극심해도 악인들이 심판 후에 받게 될 고통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쉼은 없고 거룩한 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잠시 잠깐 있는 박해를 참을성 있게 견디는 것이 그것을 피하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본문은 성도가 죽음으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날지라도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기에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곳에 이르려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1) 우리가 갈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약속의 땅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외국인이자 나그네일 뿐이었습니다. 떠나온 고향에 비하면 불편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기업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1:15).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은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펼쳐질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의 인치심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이들이 악의 세력들이 펼치는 끈질긴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승리하여 감격의 새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도 이 땅위에 펼쳐지는 현실로 인하여 때로 힘들고 고단한 시간을 지낼 때 이 천상의 장면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주님과 동행하기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자들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승리를 지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 시온 산에 서게 되는 승리만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이 승리를 맛보고 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현실에서 고난밖에 없고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될 승리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0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며 참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는 자만이 구원과 생명의 양식과 영생의 풍성한 삶을 누일 수 있습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참목자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어떻게 지금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계시록 14장은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주님의 양면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삶, 천국을 경험하는 삶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어린양이신 구원자를 깊이 알고 교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의로 심판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권태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주신 그 영광스럽고 신령한 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주님의 사랑이야기, 그분의 구원 이야기, 그분이 주시는 복과 영생의 이야기들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그것들이 진부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 열매가 없고 믿음의 진보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습관으로 전락해버리면 더 이상 예수의 사랑, 십자가, 부활, 그리고 승리의 메시지가 가슴을 뛰게 하지 못합니다. 이럴 때 믿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묵상하며 다시 한 번 복음의 감격과 위대함에 화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평소에 끼니를 거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배불리 먹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지만, 며칠을 굶거나 북한 동포들이 배고픔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이 배불리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할 일을 찾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아는 자만이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고,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어지러운 생의 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행복해 할 수 있습니다. 사방에 욱여쌈을 당하는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들이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 그 사실 하나 때문만으로도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 33:29)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복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도록 우리 생의 운전대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범사에 베푸신 은혜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과 동행하십니다.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십니다.

 

영원한 복음을 붙들고 사는 교우들이 위하여 내년에 세 가지 실천방안을 알려드립니다. 첫 번째 충실한 말씀 생활입니다. 신년부터 네 분의 교역자들이 주중이나 주일에 성경공부를 같은 교재로 시작합니다. 그 교재는 유초등부와 중고등부에서도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장년부와 학생들의 교재의 내용의 깊이는 다릅니다. 각자 적당한 시간을 골라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일대일 양육을 통해 섬김을 받기 원하시는 분들도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신년도에 온 교우들의 말씀 생활이 업그레이드되기 원합니다. 둘째는 감사노트 쓰기입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묵상하며 하루에 적어도 하나 이상 감사 내용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뿌림으로 연말이 오기 전에 교우들은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감사 생활이 업그레이드되기 원합니다. 셋째로는 일 년 동안에 적어도 한 사람이상 전도하자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영원한 복음을 우리만 간직해서 되겠습니까? 방금 언급한 세 가지 실천방안을 통하여 교우들마다 많은 변화와 간증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우들의 전도 생활이 업그레이드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은 정반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지금 우리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1:24-25). 우리는 상황과 환경, 느낌과 감정이 아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영원한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님은 평강을 약속하십니다. 어린양이 고난을 지나 죽음을 통하여 승리하였던 것처럼 영원한 복음을 붙들고 인내하며 말씀대로 행하면서 서 있어야 할 곳에 서고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며 새 노래를 부르시는 능력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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