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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시록

계 21장 1-8절(부활과 하나님 나라) - 최태선

by Preacher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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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1장 1-8

부활과 하나님 나라

최태선 목사 2008.4.13.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당 가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지옥 간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반쪽짜리입니다. 우리는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전체를 알지 못하면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과 하나님 나라라는 제목으로 그 전체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초기 유대 문학 작품으로 예수님 당시에도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솔로몬의 지혜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있나니, 그 어떤 환란도 이들을 범치 못할 것이라.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죽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들은 평안에 있는 것이라.”(3장 1-3절)

 

이 내용만으로 보면 우리가 죽으면 천당 간다고 하는 그 내용과 다름이 없습니다. 죽으면 천당 가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천당 갔다. 영생이다. 끝이다.’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 내용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의인이 땅을 방문하게 될 때 이들은 밝게 빛날 것이며, 그루터기 사이로 전광석화같이 다닐 것이니, 의인은 온 나라를 통치하고 온 민족을 다스릴 것이며, 주께서 이들을 영원토록 다스리시리라.” 천당에 가서 영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던 의인들이 땅을 방문합니다. 그들은 온 나라를 통치하고 온 민족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부활입니다. 이 구절은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새로운 세상과 그 세상에서 살게 될 새로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내용은 성경적입니다. 의인이 죽으면 잠시 동안 하나님의 안전한 돌보심 가운데 평안을 누리며 보이지 않는 존재로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일시적인 안식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이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왕권은, 결코 뜬 구름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 땅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세상에 공의와 평화가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을 말합니다. 의로운 자들이 평안 가운데 안식하는 것은 영광 중에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부활은 최초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강조해서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들이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 즉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것도 모두 이 부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이스라엘의 커다란 소망의 성취, 즉 국가 재건이라는 희망을 품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들은 모든 자들의 주님이시요, 온 세상의 주로서 죽음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1세기 유대 사회를 살아가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국가 재건이라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오셔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일은 영과 육이 분리된 지복의 세계로 자신들을 데려가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적인 방법으로 이 땅에서(예루살렘)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 단순히 이스라엘의 독립만을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지혜서>에 기록된 대로 의인들이 땅에 돌아와 온 나라와 온 민족을 통치하는 그것을 기대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려면 의로운 자들은 비록 죽은 후 오랜 시간이 흘렀더라도 영광스러운 새 실제에 참여하기 위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다시 말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삼중의 회복을 일으키시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전 세계의 회복 그리고 죽은 의인들의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부활”은 이 위대하고도 총체적인 회복 역사의 결정적인 한 부분입니다. 부활은 문자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문자 그대로 다시 살아남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 부활을 예수님을 통해 확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난 후 그들은 이스라엘의 희망인 부활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소망하던 일 중 태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여전히 본디오 빌라도를 통해 유다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불의와 강압이 여전히 횡포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긴장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늘날의 우리만큼이나 죽은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만큼이나 그들에게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강인 죽음의 강을 통과하여 강 저편으로 빠져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생명은 원래의 생명에 새로운 차원이 더해졌습니다. 일종의 초육체성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육체입니다. 원래의 인성에 더 많은 차원이 가미된 그런 육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말 그대로 부활을 의미합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아무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로 끝난 예수는 다만 실패한 메시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모았습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그들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따라 주님의 뒤를 따라 자신들의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부활이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또한 우리 모두에게 부활이 있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질 최후의 운명이 영혼의 불멸과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죽으면 끝입니다. 상급 문제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입니다. 육체와 분리된 채 영혼만으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육신의 부활이 더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다른 종류의 세계로 이동합니다.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질문합니다. 그곳에 간 후, 그곳에서 곧장 최후의 목적지로 가게 되는가? 아니면 마치 잠든 것처럼 기다리며 안식을 누리다가, 모두 함께 종말에 도달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는 “죽으면 천국에 간다.”거나 “낙원에 거하게 된다.”는 식의 대답도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휴식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솔로몬 지혜서>의 기록대로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있나니…… 평안 안에 있는 것이라.”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기다립니다. 땅과 하늘의 결합과 그래서 그 두 세계가 새롭게 될 것을 기다립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무엇이 기다린다고 결론을 내든 간에 “천국” 그 자체는 그리스도인들의 최후 목적지가 아닙니다. 천국 혹은 일부 유대인들이 명명했듯이 “낙원”은 육체의 죽음과 육체의 부활 사이에 존재하는 일시적인 안식의 장소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핵심을 놓쳤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최후의 목적지는 새 땅이 될 것이며, 새 땅은 새 하늘과 한데 결합되어 마치 예수님의 새로운 몸에 부가적인 차원이 덧입혀졌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으로 갱신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고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이 아니라 바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으면 천당 간다.’는 말로 본질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영혼불멸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영혼만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미래는 새로워진 하늘과 결합된 새로워진 땅에서의 새로운 육체를 가진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 희망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뿐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줍니다. 그것이 3절로 7절까지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내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들은 이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상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새로운 세상에 우리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어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부활과 별개로 존재하는 기독교에 붙여진 어떤 교리 같은 부수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가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다양한 복음의 관점이 있지만 부활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고하고 살아가는 시작점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기 원한다면, 바로 그곳, 부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 또한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우리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새로운 이유들을 갖게 됩니다.

 

첫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할 새로운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힘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결국 최후에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정의로운 행동들, 모든 진리의 언어들, 순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창조의 세계, 모든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마지막 날 새로운 세상에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따스한 손길로 무료급식소에서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내민 밥 한 그릇, 커피 한 잔. 나에게 의지하려는 이들을 돕고 섬기기 위해 나 자신의 욕망을 뒤로 한 일. 정직하고 철저하게 맡은 바 소임을 다했던 일. 생각과 마음을 한데 모아 올려드린 기도. 이 모든 일들과 다양한 행위들이 크고 작은 벽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어떻게 공헌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사실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진정한 인간됨을 확증해 주셨다는 사실은, 이 행위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리라는 확신을 줍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이러한 행동들이 부질없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이 보이며, 차라리 최고의 자리를 추구하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훨씬 더 나아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언젠가 오늘날 우리들의 작은 노력이 모여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립니다.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거룩함을 선택할 강력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람들이 "전인성"(wholeness)과 자아실현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그런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며, 자아실현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 관계, 일 그리고 창의성을 포함하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인간됨의 특성들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됨에 대한 인정은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전인성이란 거룩의 길 마지막에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앙과 신뢰의 위대한 행위 가운데로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도덕적인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게 될 때 날카로운 안목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묘하지만 강력한 유혹에 직면하게 될 때, 비록 그 선택이 큰 아픔을 불러올지라도 단호하게 “No”를 선언할 것을 권면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이러한 행동이 죽음과 다름없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사람답게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1-5)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엄청나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이 길을 가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육체적인 인간됨이 새로워지고 회복될 것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죽으면 버려질 폐기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비루한 누더기가 아닙니다. 무가치하여 도덕적으로 중요치 않은 존재가 아닙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성은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새롭게 빚어질 새로운 육체에 중요한 특징을 제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감정, 우리의 모든 육체를 존중하셔서 거기에 새로운 모든 것을 덧입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참된 거룩함에 대한 진정한 동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의 진정한 동기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은 우리에게 다시 사신 예수를 예배하고 주님이신 그분을 따라야 할 강력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무슨 사교 집단의 우두머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사람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계시다고 선언했기에 고난을 자처했습니다.(행17:7) 바울은 예수님께서 임금이시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분이 주시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 그 같은 발언은 반역죄에 해당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곧 예수라는 사람이 가이사의 절대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이사가 요구하던 절대 충성에 반기를 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바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라면 그 주장이 이렇게 바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대통령이 있다. 우리의 통치자는 예수님이시다.”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또 다른 사고방식을 위한 그리고 또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시작점이 존재하는 데, 이는 시장 경제나 심리학, 국제 정치나 그 밖의 다른 이론 체계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왕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예배할 의무와 특권이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앞에 새로운 삶의 문을, 새로운 세상의 문을 활짝 엽니다.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새로운 삶 속에서 완성될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시작됩니다.(here and now)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선택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우리 또한 부활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결코 우리의 결심 정도에 따라 우리 삶의 일부분이 속하게 되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끕니다. 세상에 걸치고 있는 우리의 한 다리를 들어 두 다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굳게 밟고 서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부활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는 용기와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하여 천국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여행객이라고 말하고 순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하나, 하나는 우리가 입게 될 새 몸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하나, 하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모여 하나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초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 하나, 하나가 하나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기억되고 판단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가 하나님 뜻에 순종할 때마다 그것이 버려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것이 새 몸으로 부활하게 될 영원한 ‘나’의 특징을 결정하는 영롱한 진주알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본문이 약속하고 있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둘째 사망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부활을 바라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날마다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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