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고린도전서

고전 15장 50-58절(영원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산다) - 이준원

by Preacher 2023. 6. 18.
728x90
반응형

고전15장 50-58

영원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산다

이준원 목사 2013.12.15.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하고 소셜 네트워크도 발달해서, 이메일이나 문자로 금방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한국이든 세계 어디에 있어도 실시간으로 문자를 주고받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종이로 된 편지나 카드를 보내거나 받을 때 색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오래 전에는 전부 편지나 카드로 보냈고, 대학생들은 자기 학교의 학보를 우편으로 주고받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편지나 쪽지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편지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시를 적는 경우였습니다. 자기 할 말은 안 적고 시나 적어 보내면 그건 종이 낭비이고 전부 쓸데없다고 생각하며 시는 읽지도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달라졌습니다. 시가 마음에 와 닿는 겁니다. 특히 요즘 눈도 오고 날씨도 추워서 겨울에 대한 시를 찾아서 몇 개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 마음에 와 닿는 시가 있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백창우라는 시인의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시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얘야,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몇 장의 편지를 쓰자

찬물에 머리를 감고

겨울을 나는 법을 이야기 하자

가난한 시인의 새벽노래 하나쯤 떠올리고

눅눅한 가슴에 꽃씨를 심자

이제 숨을 좀 돌리고

다시 생각해 보자

큰 것만을 그리느라

소중한 작은 것들을 잃어온 건 아닌지

길은 길과 이어져 서로 만나고

작은 것들의 바로 곁에 큰 것이 서 있는데

우린 바보같이 먼 데만 바라봤어

사람 하나를 만나는 일이 바로

온 세상을 만나는 일인데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데

우린 참 멍청했어

얘야, 오늘은 우리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자

겨울이 오기 전에...

 

시인은 지금 겨울이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늘 큰 것만 잡으려고 달리다가 작은 것을 놓치고 잃어버렸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겨울이 오기 전에 소중한 것에 마음을 두고서 살자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을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운 사람들에게 작은 편지라도 써서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1. 떠날 준비를 하면서 쓴 편지

 

바로 그러한 심정으로 사도 바울이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기 때문에 바울의 마음속에는 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온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바울은 사도의 길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언제나 마지막을 산다는 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기며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사역이 언제나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소위 ‘부활 장’이라고 알려진 장인데, 이 말씀에서 바울이 강하게 외치는 메시지는 ‘모든 것은 지나가고 썩는다’는 사실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0-52절)

 

15장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다가, 그 결론 부분인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썩을 것이 있고 영원한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것이 있고 남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잡으려고 따라다녔던 모든 것을 다 두고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너무 마음을 두고 살거나 너무 사로잡혀 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것들이 다 쓸데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다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지만, 그것들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오면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될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있고,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수요예배 때 동영상을 본 적도 있고 <새로운 삶> 공부에도 나오는 순교자 짐 엘리엇(Jim Elliot)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1927년생인 그는 겨우 29세의 나이에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친구 선교사 4명과 함께 공격을 받아 모두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짐 엘리엇이 다니던 시카고 근교의 휘튼대학교 시절부터 적었던 글과 일기들을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모아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남편이 죽임을 당한 후에 엘리자베스는 어린 딸을 데리고 다른 순교자들의 아내들과 같이 아우카 족에게로 가서 봉사를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남자는 죽여도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정성껏 자기들을 섬겨주니까 그들이 물어봤습니다. “당신들이 도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우리에게 와서 이토록 우리를 정성으로 섬겨주는 겁니까?” 그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몇 년 전 죽였던 그 사람들의 아내들입니다.” 그러자 아우카 족 전체는 다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추장이 그날 “이제 우리 이분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자”고 선포하여 그 부족 전체가 믿게 되었습니다.

 

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남편의 글들을 모은 책에 너무나 영적으로 깜짝 놀랄 만한 내용들이 있는데, 그 글들을 쓸 때 짐 엘리엇은 겨우 19세의 대학생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사도 바울은 젊은 날 자기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을 붙잡고 나아가다가 영원히 붙잡고 달릴 새로운 것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평생을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렸습니다. 이전에 그가 추구하던 것과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추구하게 된 것을 가리켜 그는 오늘 본문에서 각각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3-54절)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이 별로 구분이 안 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그 두 가지가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참 안타깝지만,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살던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도 바로 그러한 모습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냥 봐서는 차이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늘과 땅 차이보다 훨씬 더 큽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또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는 그날, 그 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종말론적 신앙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보십시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둘(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의 차이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둘의 차이를 아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하지 않은 것을 좇아서 살지 않고 영원한 것을 좇아 산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입으로만 ‘믿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 영원한 것보다 썩어 없어질 것만 추구하며 사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일 뿐이지 실제는 아닙니다. 진짜 좋은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이전의 옛 생활과 옛 습관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었더라도 훨씬 더 좋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버릴 수 있습니다.

 

찬송가 85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지금 생각만 해도 좋은데, 후에 정말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을 뵐 때는 얼마나 좋겠냐는 감격입니다. 그 주님의 영광을 보고 감격하는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며 주님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영광과 감격을 알아야 오늘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영광과 감격을 잃어버리면 이 땅에서 패배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원하신 주님의 영광에 대한 감격을 잊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주일’ 즉 주님의 날입니다. 그 감격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주일을 주셨고 예배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이 되십니까? 짐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은 결코 무슨 부담이거나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제대로 살게 해주시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또 예배는, 주님을 만나 누리게 될 그 감격과 기쁨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볼 수 있게 해주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우리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바로 ‘미리 맛봄(foretaste)’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이 요한계시록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흰 옷을 입은 큰 무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성도들과 함께 모여 여기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을 함께 맛보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는 ‘혼자 잘 믿는 신앙생활’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부활에 대해 가르쳐주는 내용이지만, 동시에 재림을 말씀합니다. 생명의 시작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생명의 끝을 말해줍니다. 이 대강절의 메시지도,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해 선포하는 동시에 두 번째 오심인 재림을 선포합니다. 시작을 말씀하면서 마지막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그런 의미에서 ‘종말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늘 마지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마지막 찬송으로 “마라나타”라는 곡을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마라나타’는 찬양 곡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배 가운데 우리가 외치는 선포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마라나타’를 외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찬가지입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원래 아람어인데, 발음과 의미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마란 아타’(Maran atha)라고 하면 이 말은 ‘주님이 오셨습니다’(The Lord has come)라는 뜻이고, ‘마라나 타!’(Marana tha)라고 하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예배에는 바로 이런 두 가지 고백이 담겨 있는 겁니다. 이미 오신 주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강절 정신인데, 바로 이 정신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이 오신 때와 앞으로 다시 오실 때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했고 또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시작된 것처럼 마지막이 있고, 또 영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때의 소중함을 알고, 주어진 모든 시간이 축복이며 은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기뻐할 수밖에 없으며, 늘 감사하면서 살게 됩니다.

 

3. 영원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58절)

 

신앙생활은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것이지만, 마지막 그날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끝이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동시에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썩지 않을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새 생명을 허락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이 있고 영원이 있음을 정말로 알 때 가능해집니다.

 

조금 전에 우리의 예배는 종말론적 특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이라고 하면 좀 어려울 수 있으므로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때 당일치기, 분치기, 초치기를 해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종말론적 자세가 뭔지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팽팽 놀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엄청난 집중을 합니다. 직장에서 프로젝트를 하는데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어서 그때까지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종말론적 자세가 뭔지를 이미 압니다. 세탁소 사업에서 고객에게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옷을 세탁해서 돌려주기 위해 애써봤거나, 식당을 운영하며 몇 분 안에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거나, 약속된 날짜까지 자금을 마련하여 전해준 경험이 있다면, 종말론적 자세를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설교자도 그렇습니다. 주일 오전 11시 15분이 되었는데도 설교 준비를 다 끝내지 못했으니 성도 여러분은 준비가 다 되고 나서 다시 오시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끝내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 집중해서 그 일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일할 시간, 공부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되면 쉬거나 놀면서 하게 될 겁니다. 예배를 드릴 날이 이번 주 말고도 많이 있다고 생각되면 대충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어떻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입니다.

그런데 딴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입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는 날입니다.

그런데 가볍게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섬기는 마지막 봉사입니다.

그런데 핑계 대고 도망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하는 마지막 전도입니다.

그런데 힘들다고 안 하겠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내 자녀를 안아줄 수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화만 내겠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배우자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입니다.

그런데 조금 싸웠다고 서로 말도 안 하겠습니까?

오늘이 내 생애에서 옆에 있는 저 형제자매와 함께 하는 마지막 교제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밉다고 피해버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서 감당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른 크리스천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58절에서 말씀하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그렇게 대충 살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시간만 내면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만남을 미룰 것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처럼 느슨하게 주님의 일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지난주에 오하이오 스테이트(OSU)와 미시건 스테이트(Michigan State) 대학 풋볼 팀이 빅텐(Big Ten) 챔피언십에서 붙었습니다. 이미 다 아시다시피, Ohio State는 당시 전국랭킹 2위였지만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시 10위였던 Michigan State에게 어이없이 패했습니다. 오하이오 팬의 입장에서는 분한 일이지만, 그런 경우는 사실 억울한 건 아닙니다. 그날 경기에서만큼은 실력에서 뒤져 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기에서 심판이 최악의 오심을 해서 진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입니다.

 

작년 런던올림픽 때, 펜싱 여자 개인 에페 준결승에서 한국의 신아람 선수가 독일의 브리타 하이데만과 경기를 했는데, 두 선수는 정규 시간 내에 5대5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여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연장전이 끝나기 1초 전에 신아람 선수는 하이데만의 공격을 3차례나 잘 막았습니다. 그런데 4번째 공격을 막지 못해서 점수를 잃고 패하여 결승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문제는 1초 동안 독일 선수가 무려 4번이나 공격을 했다는 점입니다. 1초라는 짧은 시간에 우리가 팔을 네 번 휙휙 휘두르는 것도 될 수가 없는데, 펜싱에서 4번이나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아예 흐르지를 않았습니다. 비디오 판독 결과 1초가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세 차례 경기가 재개되고 마지막 하이데만의 공격이 적중될 때까지 계속 1초라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만일 연장전에서 비기고 끝났더라면 이미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던 신아람 선수가 결승에 올라가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심판진은 오심에 대한 판정을 바꾸지 않았고 신아람은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치루어진 3-4위전에서는 오심으로 인한 패배의 충격으로 제대로 경기를 치르지 못하면서 결국 아무 메달도 따지 못하고 4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 논란 이후 외신들도 신아람과 하이데만의 경기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가장 논쟁거리가 될 사건”, “황당한 판정이 오점으로 남았다” 등의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때 한국 뉴스에서는 계속 그 오심 사건에 대해 보도했고, 전체 국민들은 전부 다 엄청 화가 났었습니다. 다들 속이 아주 상했습니다. 자기 일은 아니지만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다 열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무너지고 내가 지면 나도 속이 상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도 속이 상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억울하게 당해서 져도 속상해하시고, 우리 자신의 실수로 무너져도 속상해하십니다. 너무 안타까워하십니다.

 

이 세상의 경기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도 그렇게 억울한 판정을 당해서 질 수도 있고, 스스로 순간적인 실수를 저질러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달리는 영적 경주는 끝까지 잘 달리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뛰어난 영성을 지녔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잘나서입니까? 아닙니다. 승리의 비결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5-57절)

 

그 다음에 이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58절)

 

사망(죽음)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승리의 결과를 알고 경기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단, 우리가 딴 짓을 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할 때 그렇습니다.

 

4. 오늘은 최선을 다해 달려갈 시간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로 분주하게 살다 보면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매년 이때가 되면, 아무리 젊더라도 한번쯤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아직 아니다’라고 고개를 흔들며 거부하고 싶지만, 언젠가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중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아니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역사를 끝내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만약 이 겨울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겨울이라면 무엇을 하며 살겠습니까? 어떻게 살겠습니까? 계속 그렇게 하나도 손해 안 보고 미워할 사람 계속 미워하며 살겠습니까? 마지막인데도? 계속 그렇게 이 땅에서 썩어질 것만 따라서 살아가겠습니까? 마지막인데도?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딤후 4:9, 11, 21)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바울 곁에, 사랑하는 누가 외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느끼기에 이번 겨울이 자기가 이 땅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사랑하는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를 꼭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올 수가 없기 때문에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말합니다.

 

교회사 책을 보면 한국 교회사의 유명한 신앙의 선배들의 사진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대에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아주 희미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화려함도 없고, 모습들도 정말 촌스럽고, 실제로 누가 누구인지도 알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한 싸움에서 승리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우리도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모습들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고, 후대 사람들이 우리 모습을 보고 촌스럽다고 할 것이고, 또 우리는 이 땅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58 새)

 

바로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았던 사도 바울은 삶을 마감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7-8, 새)

 

바로 이것이 인생을 마감할 때 하는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은 힘차게 달려야 할 시간이며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시간입니다. 영원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삽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