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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고린도전서

고전 15장 55-58절(부활의 이해) - 최태선

by Preacher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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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장 55-58

부활의 이해 [부활절]

최태선 목사 2010.4.4.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어떤 소설가의 고백입니다. 그녀는 가정파탄의 아픔을 겪고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자신의 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내 머리채를 잡고 모욕을 주던 그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당시의 느낌을 전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죽음보다도 자신과 관련된 작은 느낌 하나가 소중한 그런 존재입니다. 인간이 그러한 존재이기에 복음 또한 그렇게 받아드리게 됩니다. 아무리 복음이 말하는 내용이 위대하고 원대해도 인간은 자신과 관련된 부분만을 느끼고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인간의 그러한 면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신학자 스콧 맥나이트는 한 강의에서 “우리가 전한 복음이 오늘 우리의 교회를 형성했다. 교회의 위기는 곧 우리가 전한 복음의 위기”라고 말했습니다. 스콧의 지적은 정확한 지적입니다. 우리가 전한 복음이 우리의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맞이한 위기의 상황은 바로 우리가 전한 복음의 위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복음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얼른 다가오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한국 교회를 돌아보면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하여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은 비단 목사들의 잘못이나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총체적인 타락이요, 부패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순간의 잘못이나 돌연번이와 같은 현상이 아니라 그동안 한국 교회가 심은 복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복음의 위기라는 스콧의 말은 정확한 현상에 대한 이해이며 올바른 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가 전한 복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왜곡된 복음은 너무도 확고하게 한국 교회에 뿌리를 내라고 있어서 이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이 있다면 단번에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적으로 간주되기 십상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복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도 그것을 대놓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한 복음이해에 대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는 단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복음이 바로 이 메시지에 근거를 두고 전해지기 때문에 다른 복음 또한 왜곡되어 총체적인 복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가끔씩 말씀드리는 것처럼 부분적인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분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에 더 많이 해롭습니다. 부분적인 진리는 그것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아는 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진리를 전체로 받아드리는 순간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단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가장하여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부분적인 진리를 전체로 믿게 만들어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메시지는 부분적인 진리입니다.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부분적이기 때문에 너무도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복음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부활에 관하여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부활에 대한 오해는 복음 전체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잘못된 신앙형태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러한 부활의 오해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차분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런 복음은 개인의 구원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이어야 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개인 구원에만 치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제시하는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질문은 ‘지금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표지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 체험이나 가시적인 성과를 추구하게 합니다. 또 자연스럽게 이 복음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게 합니다. 그 이후의 영적 성숙이나 변화된 삶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복음에 따라 생각하면 성경은 개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고, 그 방법을 요약해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구는 중요 구절이 되게 마련입니다.

 

물론 내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성경이 제시하는 더 큰 그림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개인 구원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은 그것을 전체로 받아드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의 중요성을 과장한 나머지 더 큰 그림 자체를 가리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까지를 아우르는 원대한 이야기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개인 구원이라는 주제를 훨씬 초월합니다. '나는 구원 받았으니 이제 됐다.'라는 개인 구원에만 초점을 맞춘 안경을 쓰고 성경을 통독하면 이런 전체 그림이 흐릿해지고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복음이 왜곡되고 복음의 위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의 복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를 ‘죽어서 천국 가려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모였으니 모인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미래의 안전입니다. 기왕이면 현세에서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싶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니 나머지 삶이 잘 풀리면 금상첨화입니다. 때로 이런 사람들도 적당한 수준의 희생은 기꺼이 감당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작은 희생이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신앙이 일종의 거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약의 상대자입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내가 또 다른 계약의 상대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고민하는 개인주의적 신앙 행태,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소비자적 신앙 행태는 그 뿌리를 우리가 전해 온 복음의 특성인 개인 구원의 패러다임에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 구원의 복음은 무엇보다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하게 합니다. 개인 구원으로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들은 성의껏 영혼 구원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라는 사실을 머릿속으로는 받아드리고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전혀 타인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껏해야 상조회나 계조직 정도로 느슨한 그런 관계의 집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희생이 있고 생명을 나누는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새 가족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메시지는 이 세상에 싸움과 불화를 불러오는 도화선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루면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다 갈 수 있게 된,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이 시대에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감하게 다가가는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복음 전파의 방식은 거의 모든 경우에 우월감과 독선의 모습으로 다른 종교에게 다가가 힘의 사용이라는 결정타를 날리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듯,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듯 던지고는 찢어 상하게 하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사람과 평화하고 사랑하고 섬김으로 빛이 되고 소망이 되어야 할 기독교 본연의 자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복음일지라도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섬기는 자세로 다가가야 합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할 때 그것이 복음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이런 복음은 천국을 죽어서 가는 ‘저승 세계’로 제시합니다. ‘천국은 믿는 자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천국은 사후 세계고 영생은 사후 세계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라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부분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부지불식간에 찬송가나 복음성가 가사를 통해 반복 학습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장례식에서 많이 부르는 찬송가입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는 굳건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니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조금도 섞여있지 않습니다.

 

이런 천국 개념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하나님나라)과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 고대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드디어 우리에게 도래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 1:15). 그래서 기도할 때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옵시고(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마 6:10).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뿐이고 천국이라고 말할 때에는 여전히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이상하게도,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로 '내려옵니다'(계 21:2). 만일 우리가 '천국이란 신자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통속적인 선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이런 구절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이 저 하늘에 있는데 그 천국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땅은 멸망해서 사라질 곳입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구름을 타고 올라가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구름 위로 올려져서 하늘 나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고가 너무도 확고하여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런 내용을 별 생각 없이 지나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20세기 초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이런 신학(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자연과 문화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은 소명을,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모습으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구명선(救命船)을 제공하는 소명으로 대치하였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것은 소금으로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빛으로서 세상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차피 부패하고 암흑이 될 운명이라면 무엇 때문에 부패를 방지하고 밝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세상을 구원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은 어차피 점점 악해질 것이니 어떻게 하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구명선에 타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 너무 익숙해져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 본문을 읽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결과이며, 비록 지금 타락의 영향 아래 신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자녀)들이 나타날 때 그들도 결국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도 그 사실을 알고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롬 8:19~22). 하나님은 종말에 이 세상과 그 안의 피조물들을 불태워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로 연단하여 정화시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사 65:17)은 분명히 옛 하늘과 옛 땅과는 다를 것입니다. 지금의 썩어질 우리의 몸과 우리에게 주어질 썩지 않는 부활의 몸이 전혀 다른 것처럼 새로운 세상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와 피조물의 부활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요, 마지막에 완전히 갱신되어 회복될 세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이 땅에서 구름을 타고 사라져 가는 세상으로부터 비상 탈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이 땅이 온전히 회복된 후에 이곳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인간이 역사를 통해 형성해 놓은 이 세상의 문화는 불로 정화된 후에 아름답게 회복될 것이며, 우리는 그 문화의 모든 완성된 아름다운 것들을 이곳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작곡한 음악이 천사들에 의해 연주될 것이고, 우리가 쓴 소설이 자랑스럽게도 천국의 도서관에 꽂혀 있을 것이며, 우리가 밤을 새워 가며 만든 소프트웨어가 천국의 PC방에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들을 지금의 우리가 상상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모습으로 그것들은 변화되어 있을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을 이루신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지금 행하는 우리의 노동과 창조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노력의 결과들이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에 사용된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가치한 우리의 노력의 결과물들이 기가 막히게 절묘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의 의미를 거꾸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서 간다고 믿었던 천국은 없는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도 사후 세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중간 상태입니다. 그곳은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간 '아브라함의 품'이고 예수님께서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에게 약속하셨던 '낙원'입니다. 진정한 구원받은 성도들은 죽은 후에 그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을 상상하며 육신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빌1:23)

 

그러므로 죽음도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갈라놓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죽은 후에 그분의 품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고 나누게 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내가 주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다른 성도들 또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것이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 또한 이 땅에서의 친밀한 관계를 기억하고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주님 품으로 간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우리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연극에 비유하여 우리에게 그것을 실감나게 느기게 해준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대에 선 배우들입니다. 그리고 주님 품에 있는 성도들은 어두운 객석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조명을 받는 밝은 무대에 선 배우들에게는 관객들이 보이지 않지만 관객들은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 표정 하나, 목소리의 떨림 하나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간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우리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가는 지를 바라보며 우리를 향해 박수를 보내면서 우리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고 우리의 어려움과 고난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며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육체적으로는 이별이지만, 실제로는 더 크고 신비하고 친밀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을 진정 믿을 수 있다면, 죽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은 죽음이라는 두려운 최후의 관문을 능히 파쇄할 수 있는 강력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라는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은 이보다 몇 수십만 배 더 큰 소망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것을 현실처럼 느끼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스데반집사의 모습은 바로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 구원만을 염두에 두는 사람에게서는 이 같은 믿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셋째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메시지는 실상은 부활의 소망이 탈락된 복음입니다. 개인 구원의 복음, 사후 천국행의 복음에는 부활의 소망이 들어설 자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소망을 사후 영생의 소망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부활의 소망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1:23). 그리고 부활의 둘째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며(고전 11:24), 마지막으로 부활의 셋째 열매는 온 피조물의 부활과 만유의 회복입니다(고전 11:28; 엡 1:10).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이라는 것이 그저 어떤 이들의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실재함을 보여준 신호탄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많은 이들이 혼동하듯이 그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임사체험이나 유체이탈과 같은 어떤 일시적인 경험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다시 죽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이런 것이 아니라 한 몸이 새로운 종류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고전 15:35 이하). 예수님이 새로운 종류의 신비한 몸을 입으신 것을 제자들은 보고 또 만져 확인하였습니다(요 20~21).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사역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마지막 때에 일어날 새로운 창조가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와 자리를 잡고 그것을 확증하고 보여준 실재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서 잠시 후에 다시 죽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입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15장).

 

예수님의 부활은 미래의 창조의 완성으로서의 새 창조를 미리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가 폐기되지 않고 구속된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언이기도 합니다. 처음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은혜로 보존되었다가 마지막 때에 놀랍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처음 계획이 온전히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취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상처는 치유될 것이고 관계는 회복될 것입니다. 결핍이 없는 완전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드러나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 담고 있는 온전한 복음의 의미입니다. 부활은 다만 개인의 영생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복음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알이니라."(58)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구절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이 들어 있는 15장은 전체적으로 부활장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특별한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미래에 있을 육체의 부활에 대해 매우 자세하고 상세하고 논의하면서, 자신이 쓴 것 중에서 가장 길고도 치밀한 장을 기록했습니다. 그 부활장을 위 본문의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들에게 그토록 위대한 희망이 있으니 이제 물러나서 편안히 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위대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라는 말로 장을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부활이 개인 구원에만 국한된 일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끝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위의 내용으로 부활장을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미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어떻게 현재의 일을 계속하는 것과 연관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계속 주장한 것처럼, 부활의 요점은 죽는다고 해서 현재의 육체의 삶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죽은 육체를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육체를 위해 위대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드린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주를 위해 순종한 모든 결과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드린 것처럼 그 모든 결과물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로와 방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와 원자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 하나하나가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 받은 다양한 소명의 결과물로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나를 판단하는 윤리의 잣대가 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소명에 충실했는가가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구성 요소가 되고 재료가 될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실함의 척도가 되고 판결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무엇이든 그것이 그림이든, 음악이든, 설교든, 바느질이든, 기도든, 가르치는 일이든, 병원을 짓는 일이든, 우물을 파는 일이든, 정의를 위해 캠페인을 벌리는 일이든,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든. 현재에 속한 모든 일이 미래에 하나님 나라에서 지속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기회에 최선의 반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노력의 결과가 미래의 나와 연관되고 그것이 나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윤리적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기회들을 최선을 다해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이 하찮은 것이든 고귀한 것이든 상관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실한 삶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향 미쁘신 하나님을 닮는 것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삶에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쁨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 힘과 용기 또한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우리의 모든 삶은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에 우리가 살았던 모든 흔적들이 기억되고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리면 걱정이 앞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걱정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완벽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안고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슬픔과 아픈 기억들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을 계획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것은 비단 인간들뿐 아니라 온 창조 세계, 곧 만유의 부활이라는 계획입니다.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선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미리 확증시켜 준 것입니다.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부활 또한 모든 인류의 상상을 뛰어넘어 성취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시키실 때, 새롭게 창조된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부요하신 그 지혜와 지식을 바라보며 놀람과 기쁨에 터져 나오는 찬양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의 위기는 곧 우리가 전한 복음의 위기"라는 스콧 맥나이트의 말은 정확한 현상 이해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들의 부패와 타락은 복음의 왜곡으로부터 오는 열매입니다. 부활과 관련된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를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소비주의적인 교회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더 많은 부분들을 이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분석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바른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소망입니다. 우리의 존재자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신실함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인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엄청나서, 그것이 너무도 감격적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이외의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다면 사도 바울의 그러한 태도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믿음이 특출한 선택받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부활의 소망을 가진 모든 이들의 태도라는 것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참 소망으로 주님의 부활절을 감격과 기쁨으로 맞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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