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고린도전서

고전 16장 1-2절(봉헌을 통하여 예배하라) - 이준원

by Preacher 2023. 5. 2.
728x90
반응형

고전16장 1-2

봉헌을 통하여 예배하라

이준원 목사 2014.10.26.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오래 전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성도가 친구를 전도하려고 애를 썼는데 계속 실패하던 중, 드디어 하루는 그 친구가 교회에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에는 안 나가던 새벽기도까지 나가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주일의 예배 때 설교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였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 5:4-8)

 

그 다음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OO는 OO세에 OO를 낳았고, OOO세를 살고 죽었더라’ 하는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도는 ‘아, 왜 오늘 하필 설교 본문이 이런 거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그런 내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고 생각하며, 예배 내내 안절부절 못하면서 친구의 눈치를 살피는데, 의외로 친구는 담담한 표정으로 예배에 참석하다가, 교인이 아니면 헌금을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도 헌금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후에 그 성도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예배 어땠어? 오늘 설교 내용이 좀 그랬지? 오늘 본문이 사실 교회에서 별로 다루지 않는 부분이거든. 다음에 또 오면 다를 거야.” 그런데 그 친구는 의외의 말을 했습니다. “아니야. 내가 오늘 설교를 통해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어.” “뭐? 오늘 그 설교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래,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은 죽게 되어 있더군. 그래서 나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가진 돈도 좋은 데 써야지. 나 이제부터 교회에 나오기로 결심했어.”

 

오늘 설교가 ‘하필’ 봉헌 즉 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다니신 분들은 ‘드디어 본색이 나오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고, 나온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왜 오늘 하필 헌금 이야기냐?’라고 느끼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오늘 함께 얻기 원합니다.

 

1. 봉헌이란 무엇인가?

 

이전에는 흔히 ‘헌금’이라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지만, 최근에 한국 교계에서는 잘못된 예배 용어를 바로잡자는 시도가 있어서, ‘헌금’도 ‘봉헌’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합니다. 어쨌든 봉헌(offertory)이나 헌금(offerings)은 예배 시 돈을 바치는 일을 의미합니다. 또 ‘연보’라는 말도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며, 한국 교회 초창기에 많이 그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 어릴 적 기억에 할머니도 늘 연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봉헌은 누구에게 드리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1절)

 

여기를 보시면 분명히 “성도를 위하는 연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가 쓰일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헌금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데는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봉헌은 하나님께만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온 분들은 “성도를 위하는 연보”라는 표현에 약간 불편함을 느낄 것입니다. 반대로, 헌금의 실제 사용에 대해 주로 생각하는 성도들은 ‘그럼 그렇지’ 하고 좋아할지 모릅니다. 사실 헌금 역시 사람을 위해 쓰이는 것인데 항상 ‘하나님께 바친다’는 식으로 표현함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로 볼 때 이것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봉헌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용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 4:18)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선교헌금을 보냈을 때, 바울은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이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통해 자신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헌금의 실제적 혜택을 본 것은 사람인 바울입니다. 이 헌금은 바울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서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빌 4:14) 것이었습니다.

 

2. 봉헌의 목적

 

이렇게 볼 때 헌금의 목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봉헌의 1차적 목적 - 하나님 사랑

 

예수님께서도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방법이 많은데, 이렇게 황금 같은 시간을 내서 나와 다른 지체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뭐니 뭐니 해도 머니’라고 한 것처럼, 재물을 드리는 것도 사랑의 표시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고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워한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사랑하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어 만나고 상대방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씁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녀를 위해 전혀 시간을 내지 않거나 자녀를 위해 돈이 아까워서 안 쓴다고 하면 그건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은 내면적으로 마음의 자세를 통해 전달되고, 겉으로는 재물, 시간, 은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 표현됩니다. 이 중에 예배의 한 순서로서 가장 적절하게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재물을 바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헌신의 표시로서 예배 순서 가운데 봉헌 순서를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봉헌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봉헌은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재물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봉헌의 행위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됩니다. 다윗도 역대상 29장에서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봉헌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포함하여 당신께서 가지신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누리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 누리는 재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인정해드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권할 것을 가르쳐주면서, 실제로 하나님이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딤전 6:17)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봉헌이 하나님의 주 되심과 너그러우심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헌금으로부터 무슨 유익을 얻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시 50:12-13)

 

하나님께서 제물을 취하실 필요가 없으신 것은, 무엇보다 그분은 스스로 충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이 없으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제물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물질’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궁금했던 게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물질을 바치라고 했는데 ‘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면서 물질을 바치라고 할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헌금이 전혀 필요가 없으십니다. 우주만물을 다 갖고 계신 하나님이신데 무엇이 더 필요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헌금을 바치라고 하십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헌금을 통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봉헌을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2) 봉헌의 2차적 목적 - 이웃 사랑

 

결국 봉헌 그 자체는 인간을 위해 사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둘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둘째는 이것과 같은데”라고 하시면서 가장 크고 으뜸가는(첫째)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첫째와 둘째라는 순서는 있지만 중요도에 있어서는 같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 사랑도 일단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재물과 시간과 은사를 나눔으로써만 구체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지적하듯이,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이것은 결국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요일 3:17-18). 그래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씀합니다.

 

봉헌이 실제적으로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신 분이기 때문에 헌금이나 제물이 필요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은 상호의존적인 존재라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봉헌이나 제물을 사람처럼 취하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나 재정적 필요가 채워져야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봉헌의 실제적 용도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재정적 필요를 가진 대상은 누구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 이유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로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외국인)였습니다. 또 다른 종류는 종교적 이유로 공동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서 레위인들입니다.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는 종교적인 일을 담당하도록 하나님이 지정하셨고, 그들 중에서도 모세의 형인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종교적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별한 지파의 사람들이었으므로, 다른 지파의 사람들과는 달리 생계를 유지할 만한 땅과 재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헌금과 제물을 통해 그들을 재정적으로 돕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해당됩니다. 첫째,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재정적 곤란에 처한 이들을 교회가 도와야 합니다. 당시 바울이 연보를 모아 돕고자 했던 예루살렘 교회는 궁핍을 겪고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내 것 네 것 없이 서로 함께 쓰는 유무상통의 삶을 추구하던 예루살렘 교회였지만(행 4장), 점차 기본 자산이 없어지면서 재정적 궁핍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유대 전체에 흉년이 들어서 곤란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재정적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해 봉헌이 필요합니다.

 

둘째, 신약시대에 재정적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대상은 구약시대와 같이 종교적 이유 때문에 별도로 생계를 마련하지 않고 교회에서 전임사역을 하는 목회자나 선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시설 유지비용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봉헌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

 

1) 봉헌은 언제 하는가?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2절) 여기서 “매주 첫날”이라는 것은 바로 오늘을 가리킵니다. 주일(일요일)을 말합니다. “안식 후 첫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왜 주일에 봉헌을 하도록 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날이 주급을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의견이고, 그것보다는 초대 교회가 매주 첫날에 예배드리러 모였고 모일 때 봉헌을 하도록 했다는 답변이 훨씬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의 종류도 많았습니다. 번제, 화목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등 많았습니다. 구약의 제물은 주로 속죄를 위한 목적으로 드려졌지만, 때로는 감사와 헌신의 표시일 때도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구약으로부터 연속되는 것도 있고 끊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연속되지 못하는 것은, 속죄 목적으로 드리는 제물이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끝났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헌신을 표시하는 의미의 제사는 여전히 계속됩니다.

 

원래 봉헌은 예배 순서에 포함되지 않았고, 구제 역시 예배와 무관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경부터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잔 및 여러 필요한 것들을 예배 시간에 바치게 되었는데, 이때 헌금 또한 봉헌의 한 요소로 나타나 예전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1세기에 이르러 헌금만을 봉헌하는 일이 일반화되었고, 헌금이 완전히 예배의 한 순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연보도 예배와는 따로 드려오다가, 교회의 예배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예배 순서의 하나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수단이었고, 결국 예배의 정규 순서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2) 봉헌은 누가 하는 것인가?

 

2절에서 바울은 “너희 각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봉헌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성경이 봉헌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오늘 본문).

 

둘째, 하나님께 은혜를 입지 않은 존재는 없기 때문에, 그 은혜에 보답하는 재정적 반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속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답의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재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까운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이웃까지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한 사랑을 표시하는 좋은 방법이 헌금입니다. 재정적,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 부족함을 먼저 채워주어야 합니다. 지금 어려움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조건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라, 일단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살려놓고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넷째, 봉헌은 자신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물론 자기과시로 헌금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성숙은 결코 이론의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 발전을 원한다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헌신에 대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공동체와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3) 액수는 얼마나 해야 하는가?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수입에 따라”(2절)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수입이라는 것이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두 가지 정도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헌금의 원천(source)은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소득이든 헌금의 근거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헌금을 계획성 있게 준비해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모아 두어서”라고 하는 것은 이 점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드리는 봉헌은 즉흥적으로 하거나, 변덕스럽게 기분 좋으면 하고 안 좋으면 안 하거나, 계획 없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사숙고하고 헌신하고 결단하고 계획하여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몇 년 전부터 어린이들에게 $2을 헌금하라고 합니다. 왜 굳이 $2입니까? $1이나 몇 센트는 전혀 준비하고 오지 않았다가 갑자기 허겁지겁 꺼내서 할 수 있는 액수입니다. 하지만 $2은 생각보다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1이든 $2이든 상관없지만, 준비를 해서 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도 다 봉투를 나누어주고 준비해서 헌금을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받은 봉투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서 좀 슬펐습니다(?).

 

4) 봉헌 특히 십일조는 반드시 다니는 교회에 바쳐야 하는가?

 

이 시대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은 모두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에나 바쳐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므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왜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헌금을 비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그 동기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해야 합니다. 대개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 전에도 살펴본 적이 있었던 한국의 유명 목회자이신 이재철 목사님의 <새신자반>에 나온 내용입니다.)

 

첫째, 자기 교회를 믿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교회에서 헌금 사용이 투명하지 않을 때, 얼마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전혀 보고가 없고, 재정 결산도 없어서 불투명할 때, 그런 교회에는 헌금하기를 꺼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 시골의 가난한 교회나 선교지로 보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재정을 신뢰할 수 없다면 그런 교회는 다니지 않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뢰할 수 없는 교회라면 그 사람은 자기 교회에서 결코 은혜를 체험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것은 곧 주일을 망치는 것이며 자기 삶을 망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만족을 위해서 다른 교회에 바치는 경우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는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고 십일조를 늘 내도 칭찬하지 않는데, 시골이나 선교지에 보내면 받을 때마다 감사전화가 오고 자기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자기 홍보를 한 것입니다. 그런 돈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아니라 자기 돈으로 자기 기분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명기 14장 23절에 보면, 반드시 택하신 곳에 갖다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서 한 과부가 자기의 전 재산인 두 렙돈(2센트 정도)을 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19장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며 분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 이런 강도의 소굴에는 헌금을 내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여인이 연보를 낸 것에 대해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10을 하든 $100을 하든, 헌금을 하는 순간 그만큼의 돈은 내 삶에서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헌금이라는 것은 내 삶에서 돈을 그대로 없애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재물을 그냥 없애버리는 것이 헌금이며 그것이 예배의 정신입니다. 물론 교회의 책임도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헌금을 잘못 집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엄히 물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을 주님 앞에서 없애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바리새인들은 아주 철저히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심지어 “박하와 회향과 근채”까지도 정확히 재어서 그에 대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집에서 키우는 토마토나 깻잎에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했는데, 정작 율법의 핵심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물질만 갖다가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우리의 돈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이 돈만 갖다 바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지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통해 내 삶을 드려야 합니다. 온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것인데, 내가 드리는 푼돈이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 돈이 아니라 나 자신을 원하십니다.

 

[나가는 말]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에서 가장 쉬운 것이 헌금입니다. 봉투에 담아서 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는 것, 며느리가 시부모 공경하는 것, 미운 며느리 사랑하는 것, 술 먹는 남편을 섬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돈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삶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재물보다도, 사랑을 실천하며 순종하는 우리의 삶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헌금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다 아십니다. 정말 다 아십니다. 삶을 예물을 드리는 것처럼 드릴 때 기뻐하십니다. 봉헌이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은 나머지 모든 것도 자기 맘대로 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준비해온 봉헌을 드리면서, 오래 전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리며 봉헌하기 원합니다.

 

“10 주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길이길이 찬양을 받아 주십시오! 11 주님, 위대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의 머리 되신 분으로 높임을 받아 주십시오! 12 부와 존귀가 주님께로부터 나오고, 주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님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니,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13 우리 하나님, 우리가 지금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합니다. 14 제가 무엇이며, 저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뿐입니다.” (역대상 29:10-14, 새)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