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4장 13-3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신만교 목사
화평성결교회 [의정부시] http://whttp://www.hpehc.org
(눅 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영광의 부활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오늘 아침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우리 화평의 권속들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오후에, 두 제자가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2km쯤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두 제자는 실망과 슬픔에 젖어 얘기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께서 그토록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다네.” “누가 아니래나, 우리는 예수님이 민초들의 희망이요, 구세주가 될 줄 알았지.” “어서 발길을 재촉하세. 제자들을 잡아 들여 죽이려 할 것일세.”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 빠져 있는 것이 역역했습니다.
바로 이때 낯선 길손 한 사람이 나타나 두 제자와 동행을 하였습니다. 이 길손은 두 제자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어느덧 발길은 엠마오에 다 달았고 날은 저물었습니다. 두 제자가 함께 들어 하자고 강권해서 함께 들어갔습니다.
음식을 나누다가 길손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이 소리쳤습니다. “아니 예수님 아니십니까?”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부활하셨구나. 여인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세나.” 불안과 공포에 쌓여 엠마오로 내려갔던 두 제자는 기쁨과 감격을 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두 제자가 부활의 주를 만나므로 놀라운 변화가 잃어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1.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영안이 밝아집니다.
처음에 두 제자는 낯선 길손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을 몰라봤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어두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영안이 어두운 상태에 있으면 주님이 옆에 있어도 모릅니다. 영적인 소경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마5:8). 그런데, 언제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예수 신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 제자들은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우리의 눈도 밝아져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므로 영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이미 영안이 열려 주님과 여주 동행하게 됨을 감사 찬양합니다. 눈은 세 가지 눈이 있습니다. 영안이 있고 지안이 있고 육안이 있습니다. 영안은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이 열려야 영적세계를 봅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지안은 지식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육안은 물질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은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봐서 믿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봤습니까? 못 봤습니다. 그런데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믿습니까? 어떻게 감격해하며, 찬양을 합니까?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보지 못하면서도 사랑하고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은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이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밝아져서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영안이 닫혀 있으면 자기 옆에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시는데 모릅니다. 영안이 어두우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사단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여러분, 삼손을 아시지요? 사단이 유혹하여 그의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몸을 놋줄로 묶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사단의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게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다.
사울도 영안이 열리기 전에는 교회를 파괴하고 믿는 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처럼 예수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 사울이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을 때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때부터 영적 세계가 열리고 진리의 세계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에 영안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행 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영안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영안도 이렇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영안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영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믿음이 살아납니다.
엠마오로 가던 이 두 제자는 두 번씩이나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실의에 빠져 슬픔 가운데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데 왜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 거듭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약속도, 예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너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의에 빠져 낙향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이 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이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변화가 따릅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낙심과 슬픈 빛을 띠고 내려가는 삶을 살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믿음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믿음이 살아날 줄 믿습니다. 낙심 가운데 슬픈 빛을 띠고 가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심령이 살아났습니다. 믿음이 살아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믿음이 살아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우리도 부활의 주를 만나므로 믿음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모순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들이 어떻게 갑자기 예수를 증거 하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죽었는데 어떻게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그렇게 부흥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초대교회가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이 허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모든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후에 오히려 당당해졌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목숨 걸고 증거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죽음까지도 이기게 하는 그 무언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부활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이렇게 믿음이 살아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제자들의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믿음이 살아나고 변화된 삶을 삽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의복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그리 항상 있느냐고요” 그때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저는 제게 고난이 다가 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 사흘 후에는 부활의 새벽이 오리라’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에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다같이) ‘사흘만 기다리자. 사흘 후에는 부활의 새벽이 오리라’ 부활 신앙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사명을 찾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의 모습은 너무 연약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었지만 시험과 환난을 당하자 모든 사명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뵙자 즉시 일어나 등졌던 예루살렘으로 올라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제자 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
(눅 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 사명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렸던 제자들이 사명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도 되돌아가야할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돌아가야 할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명의 예루살렘을 떠나 있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어두운 엠마오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어서 사명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므로 사명을 되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내가 세워놓은 목표, 야망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날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안됩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제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인생이 되십시오. 사명 발견하고 사명 따라 사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소명의 문제요, 사명감의 문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누구든지 사명을 찾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 모두가 사명을 찾게 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 오사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상명령이 무엇입니까?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열방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부활의 주를 만난 사도바울은 이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생명보다 사명이 더 큰 것입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사흘 안에 체포하라는 네로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피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베드로가 급히 로마를 벗어나기 위하여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를 지나쳐 로마로 가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베드로가 너무 놀라서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린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로마로 가야겠구나.” 그 말에 베드로가 회개하고 발걸음을 돌려서 박해가 극심한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베드로도 영광스런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여러분이 버린 사명의 십자가를 주님이 또 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이 자리에 임재해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영이 살아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믿음이 회복되어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다시 사명감으로 충만해서 우리 남은 생애를 주님 앞에 아름답게 드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증인으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우리는 주님의 파송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영혼의 찬양 50장 ‘파송의 노래’를 부릅니다
'신약 --------------------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눅 24장 13-27절(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허창수 (0) | 2023.08.06 |
---|---|
눅 24장 13-17절, 30-35절(잃어버린 사명을 되찾자!) - 신만교 (0) | 2023.07.25 |
눅 24장 25-35절(주님과의 동행) - 배혁 (0) | 2023.07.02 |
눅 24장 24- 35절(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허창수 (0) | 2023.06.27 |
눅 24장 24-35절(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허창수 (0) | 2023.06.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