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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누가복음

눅 24장 25-35절(주님과의 동행) - 배혁

by Preacher 2023.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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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장 25-35

주님과의 동행

배혁 목사 04.12.2015

샌안토니오한인연합감리교회 http://shttp://sakumc.org/

 

지난 주일 우리는 부활주일 예배로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과학적으로 단순히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 땅이 다시 창조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역사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인 세계가 새롭게 창조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둠과 혼돈 속에 있는 세상에 빛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심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된 사람들이 영적인 어두움과 죽음 속에 있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던 세상이 다시 새롭게 창조된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새 창조의 일들을 모두가 경험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인 것을 믿을 때에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두 제자가 나오는데, 이들도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영생의 소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대단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이 죽으신 지 사흘째가 된 것입니다. 몇 명의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천사를 보았고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는 것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 두 제자들은 그 여자들의 말은 허황된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죽으신 그 예루살렘을 등지고 이제는 엠마오라는 곳으로 자신들의 할 일을 찾아서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제자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경험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과 같은 삼일동안의 기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더 역사하지 않을 것 같은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예수님은 안 계신 것과 같은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이요, 실망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믿는 만큼 더 큰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슬픔과 좌절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으신 예수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지만,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러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죽은 것 같은 사흘과 같은 영적으로 절망의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할지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그 순간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두 제자들이 슬픔과 절망가운데서 엠마오로 가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흘 전에 죽은 예수는 여전히 죽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두 제자가 이야기하는 그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제자들이 자신과 동행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2절에는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떠한 모습일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바로 저희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두 제자들은 육신적으로는 눈을 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다고 했는데, ‘가리워져’라는 말은 ‘크라테오’라는 말을 쓰는데,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을 했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과 동행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동행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것은 확실히 알겠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지금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심을 믿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감각적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느끼던지 못 느끼던지 간에 예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때에 그분의 동행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이해로는 예수님을 기대할 수도 없는데 예쑤님꼐서 직접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확신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야곱에게도 있었습니다. 야곱이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후에 형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가족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밤이 되어서 한데에서 잠을 청합니다. 돌로 베개를 삼고 하늘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자신에 누워있는 자리 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다리가 내려오더니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8: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야곱은 그 동안 자신 혼자인 줄 알았습니다. 형으로부터 죽음을 피해서 부모님을 남겨두고 홀홀단신으로 고독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있었는데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리고 그곳에 단을 쌓고 그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불변한 줄로 믿습니다. 단지 우리가 다른 것에 고정되어 있다가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의 동행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특별히 두제자와 같이 주님이 안계시것 같은 절망과 슬픔 가운데, 야곱과 같이 아무도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러한 순간에서도 여전히 우리 주님은 함께 동행하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만 있다면 자신을 알아볼 텐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 가운데 붙들려 있는 그들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러한 두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후에 영광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 죽으심을 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직 그들은 21절에,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랬지, 그분이 수난을 당한 후에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믿음은 있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취사선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책망하실 때에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십니다.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긴 믿어도 그 믿음의 성장이 더디고 느립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 빨리 믿는 자가 될텐데, 그렇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편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필터링해서 받아들이니 아무리 말씀이 주어졌어도 그 말씀을 그대로 믿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말씀, 예언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로마서 10: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말을 듣고, 자기 자신의 말을 들어서는 믿음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할 때에 제대로 빨리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이 더디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19세기 미국인 가운데서 유명한 무신론자 가운데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인 류 월리스(Lew Wallace) 장군이 있습니다. 월리스는 또 다른 무신론자 친구인 잉거솔(Robert Ingersoll)과 함께 기독교가 신화이고 허구라는 밝힐 책을 저술해서, 인류를 그리스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잉거솔 또한 무신론에 관한 책을 썼을 정도로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월리스는 미국과 유럽의 유명한 도서관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없앨 자료를 찾으면서 2년 동안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거짓이요 허구라는 것을 책으로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책의 제2장을 쓰려고 하다가 더 이상 그 책을 써내려 갈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고 도리어 월리스는 예수님을 향하여서 “당신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이릅니다. 그 이후 그는 예수와 기독교를 부정하는 책이 아닌 전혀 반대의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 ‘벤허’입니다. 부제는 ‘그리스도의 이야기, a tale of the Christ’입니다. 이 책은 1880년 출판과 동시에 200만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후에 영화로 만들어져서 아카데미에서 무려 11개부문의 상을 수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데 크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을 읽지 않으면 믿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깁니다.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말씀을 믿음으로 읽을 때에 비로서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 같고 안 계신 것 같을 때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들을 때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소리와 자신의 소리에 잠식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나고, 영적인 어둠의 때를 안전히 지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에 비로서 두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동행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가 이제 자신들이 가고자 했던 엠마오 촌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리고 날도 저물었습니다. 두 제자들이 자신들과 함께 유하자고 예수님께 권합니다. 그리고 함께 저녁을 잡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떼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때에 저희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며 그 때의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뜨겁게 역사하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동행했어도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의 동행하심을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성경에 있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 또한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며 떡을 뗄 때에 그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함께 떡을 뗀다는 것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테이블에서 친밀한 교제를 가질 때에 그 눈이 밝아졌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로마병정에게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시던 일이 연상이 됩니다. 떡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했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떼어주시는 떡을 먹으면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제자들이 자신과 동행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순간에, 예수님은 그 모습을 그들로부터 감추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눈이 보이는 분으로 계시던지, 아니던지 간에 문제가 안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고,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서도 자신들과 동행했었고 그렇다면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들과 동행함을 그들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들려주신 말씀이 예수님이 되어서 그들 안에서 뜨겁게 그들을 사로 잡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날마다 기념하며 영적으로 친밀함을 가지는 자들은, 영적인 눈이 늘 밝아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육적으로 예수님이 안보이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늘 체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에게도 두 제자들이 경험했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그 사흘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려움가운데서 그토록 예수님을 찾아도 응답받지 못하고,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실망하고 절망해서 예수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가리워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감정과 상황과 상관없이 늘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내 삶 가운데서 역사하심을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믿음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삶을 살때에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떼를 떼듯이 주님을 기념하며, 예배하며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주님의 교제의 관계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끔가다가 만나는 기억나는 주님이 아니라,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의 친밀함을 가질 때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믿고 확신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던 것처럼, 어떠한 일을 만나던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행하심과 역사를 경험하며 그것을 이 땅에 증거할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여정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샘터질문

 

1. 예수님이 안 계신 것과 같은 두 제자들이 경험한 슬픈 일들을 주로 언제 경험하게 됩니까?

 

2. 예수님이 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3.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근거가 되는 경험이나 말씀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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