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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누가복음

눅 24장 24-35절(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허창수

by Preacher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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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장 24-35(12-35)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허창수 목사 19.07.21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근심하며(4),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물었습니다(요20:15). 사도들은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고(11) 근심하고 베드로는 집으로 돌아가고(12), 무리 중에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13).

 

예수님으로부터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대로 죽으셨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확인하고서도 근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경제적으로는 빈곤했으며, 사회적으로는 무질서였으며, 종교적으로도 타락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사회였습니다. 이처럼 험난한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수가 있었던 것은 ‘메시야 대망 사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제 속에서도 어려움을 참고 오랜 세월을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더디어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행하시는 일에서부터 권위있는 말씀과 능력과 이적을 볼 때에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임에는 의심할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1)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이기를 소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라고 믿었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을 뿐 아니라 죽은 시체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비롯한 무리들은 크게 낙심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속량할 메시야가 왜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분이 죄인처럼 비난받고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왜 달려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까지도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저렇게 죽으실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줄로 기대를 했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고 죽으신 것입니다.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그래서 슬픈 빛을 띠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편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결코 절망하고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며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슬퍼한 것은 그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실 것을 믿었던 제자들은 우편이니 좌편이니, 누가 높으냐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정도라면 오늘 우리의 믿음도 잘못은 없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바라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메시야관은 무엇 입니까?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 입니까? 무엇을 위해 예수를 믿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아는 구원관입니다.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구원관은 죄에서 속량하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해방입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고 새벽에 무덤에 간 두 여자로부터 예수의 시체도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사도들도 여자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를 않았습니다(11).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세마포만 보고 놀랍게 여기고 집으로 돌아갔고,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자신이 기대하는 것과 다를 때 실망하게 됩니다. 식당을 경영하는 어떤 분이 어느 교회에 등록해야 장사가 잘 될 것인가 생각하고 교회를 선택합니다. 교인들이 자주 이용해 주기를 바랐지만 오지 않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잘못된 믿음 입니다. 나와 여러분의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바라고 예수를 믿습니까? 예배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닙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나심은 무한한 사망 권세를 이긴 영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을 보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만약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내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을 비롯한 무리들은 자신들이 듣고자 한 말씀을 들었다고 하며 크게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무리가 호산나 소리치며 환영하는 것을 보고 ‘더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며 상당히 고무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다음에는 왕궁에 들어가셔서 부패하고 무능한 왕 헤롯을 쫓아내시고 왕좌에 앉으시기를 속으로 기대 했는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이 자신이 바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자신이 기대하는 말씀이 아니면 감동이 없습니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말씀은 오랫동안 기억하지만, 원하는 말씀이 아닐 때는 근방 잊어버립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을 하면서도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인 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16). ‘가리어졌다’는 말의 원문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믿음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메시야관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지만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알고 죽은 예수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주면 가져가겠다고 말했습니다(요20:14).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동산지기인줄로 알았다는 것은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함께 동행하면서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부활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로만 아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하고 영으로 충만한 부활한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죽은 예수가 살아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눈이 가리어져서’ 알지 못한 것입니다. 23절에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들로부터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부활을 믿지 못한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5, 26절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이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을 이해했더라면 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26)라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로부터 선지자들이 쓴 성경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언된 모든 말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살아나심에 대한 것임을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27). 성경을 풀어 자세하게 설명하시고 가르쳐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습니다(32). 성령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풀어주다’의 원문은 ‘열다’는 뜻으로 가리어진 눈을 열어 주어 볼 수 있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메시야관을 올바른 메시야관으로 깨달아 알도록 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열어 주실 때에 그 뜻을 알게 되었고 마음이 뜨거운 감화 감동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심으로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사람은 비로소 메시야관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풀어 주었다’는 말은 ‘눈이 가리어져서’(16),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은 눈’을 의미하듯이 31절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란 말씀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은 눈을 움직여 열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로 알았던 잘못된 메시야관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속사적인 메시야관으로 고쳐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메시야관으로 믿음을 고치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잘못된 메시야관이었을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을 하면서도 알지 못했지만, 올바른 메시야관으로 바꾸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본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설교는 성경을 풀어서 가리어진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성령께서 도우셔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올바른 메시야관을 깨달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설교는 성경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잘못된 믿음을 바른 믿음으로 고쳐 주어야 합니다. 잘못된 메시야관을 올바른 메시야관으로 고쳐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설교는 죽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것이 설교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도록 하는 것이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설교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설교는 낙심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성경을 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 잘못된 자신들의 믿음을 올바른 구원관으로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일어나 발걸음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와 함께 한 무리들에게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34)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31절에 ‘눈이 밝아져’란 말씀과 32절에 ‘성경을 풀어’란 말씀, 그리고 45절에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란 말씀이 있습니다. 희랍 원어로 ‘열어’란 단어를 세 가지로 번역하여 ‘눈이 밝아져’, ‘성경을 풀어’, ‘마음을 열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이 밝아지는 것’이나 ‘성경을 풀어 주는 것’이나 ‘마음을 여는 것’ 이 세 가지를 주도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가리어져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의 눈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고, 성경을 풀어 주셨고,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성경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슬픈 빛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다고 증언을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들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알지 못하는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을 풀어 설교하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풀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메시야관으로 낙심하여 돌아가지 말고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만인들에게 전합시다. 오늘 모인 나와 여러분은 한 사람도 낙심하지 맙시다. 주님 오시는 날에 우리 모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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