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4장 28-35
부활의 주님과 어떻게 동행할까?
정오영 목사 2020-04-25
울타리교회 : 군산시 문화동
지난 주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부활의 주님을 기념하는 거룩한 주일입니다.. 매주가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주일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부활의 주님과 어떻게 동행을 할까?..... 라는 제하의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의 누가복음24장은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알지 못했었습니다. 엠마오란 "알지 못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이 시간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낙심의 길입니다. 절망의 길입니다.
지금 뚜렷한 인생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방황하고 계십니까?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얼마나 교회를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야만 신앙의 방황이 끝이 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황을 끝내시기 바랍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낙향하는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눅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두 제자가 부활절이 지난 후 예루살렘에서 고향인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들은 최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안식일이 지난 후 간간이 들려오는 주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에... 마음이 심란한 상태가 되어서... 실의와 좌절에 빠져 가슴에 슬픔을 안고 25리 떨어진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눅]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이 말씀을 보면 이 두 제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낙향하는 발걸음 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신앙의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13-14)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②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15-16)
③슬픈빗을 띠고 머물러 있었습니다.(17절)
④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했습니다(22~24).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일 것이며 내가 다니고 은혜 받는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며 주인의식이 없다면 이 또한 큰 잘못입니다.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그들은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하여 놀라운 일이 있어났는가를 본문을 통하여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1. 주님을 영접하여 동행하여야 합니다. (29-30절)
[눅]24: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24: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눅 24:9절에서 함께 유하시기를 청합니다.. 주님을 청할 때 까지만 보면 주님을 온전하게 알아보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멀리 여행을 하던 지 아니면 길거리에서 귀한 손님을 만났을 때에 날이 저물면 여관에 들어가 함께 유숙하자는 말은 보통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전통적으로 길손에 대하여 아주 관대한 그들이기에 아마도 엠마오 가까운 곳의 여관에 유숙하자는 말은 보통 일 것입니다. 그러나 30절을 보면 일상과 좀 다릅니다.
[눅]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주님께서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어 함께 먹는 성찬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전날에 성찬식을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26:26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
마]26:27 또 잔을 가지사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님의 살을 받아먹고 주님의 피를 받아 마시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주님과 진정한 교제와 나누며 사귐이 있는 것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러므로 태초에 아담의 원죄와 지은 자범죄들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통하여 막혔던 담을 헐어내어 거룩이 회복되어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진정한 교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함께 하며 주님의 날을 잘 지키며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교제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교제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교제로 말미암아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 교제로 말미암아 주님과의 관계회복이 되어 주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회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영의 눈이 밝아져 동행하여야 합니다 .(30 -31절)
[눅24: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으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뇌에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려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얼굴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옆에 다가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지 정작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과 신령한 세계에 대한 눈이 가려졌다는 뜻 입니다. 안과의사들은 사람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십 가지라고 말을 하나 그보다 더 심각한 질환이라면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겐 네 가지의 눈이 필요합니다.
ⓐ 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 이웃을 보는 눈입니다.
ⓒ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 하나님을 보는 믿음의 눈 입니다.
이 눈은 믿음이라는 코스를 거치지 않고는 볼 수 없으며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의 이 신령한 눈이 점점 어두워가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눈이 어두어지고 있는 것은 결국은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마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막]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막]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믿지 않았더라 하였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다시 살아나겠다는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중세기는 천주교의 교리와 성물숭배가 믿음의 눈을 어둡게 했하여 믿음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때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 그리고 물질문명이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삼켜버렸습니다....영적 암흑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두 제자의 경우도 신령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 기적의 예수님만을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였던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영적 모습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의 눈이 밝아짐으로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이는 법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에 속한 것들 즉 쾌락이 보이고, 죄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제자의 눈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눅24: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격의 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지고 신령한 마음이 열리는 법이죠. 그러나 악한 사람과 교제하고 먹고 마시면 금방 악을 본 받게 됩니다. 내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분과 늘 교제하며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져 동행하여야 합니다. (32절)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성경을 자세히 풀어주는 성경공부도 하였지만 깨달음은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 가지 단계의 결단을 가지게 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고,
ⓑ둘째는 느끼는 것이고,
ⓒ셋째는 깨닫는 것이고,
ⓓ넷째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긴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이 없다든지..., 깨닫긴 했는데 실천이 없다면 이는 온전한 신앙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마음이 뜨겁다”는 말씀의 원어를 보면 kaiomevnh [(카이오메네)- “계속해서 타오름을 당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풀어질 때 계속적으로 타오름을 당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성령님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그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은 그 뜨거운 영적 불을 받아서 죄을 회개함으로..... 그 시간 이후 그들의 모든 시각이 신령한 것으로 변하였습니다. 냉소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 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으로, 탈진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에 베드로의 설교 요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이 임하시므로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방언을 하였는데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운동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도 발견되게 됩니다. 말씀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성령운동은 잘 못 탈선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그날 들었던 그 말씀은 바로 성경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날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은혜를 받으므로 심령이 변한 것입니다.
4.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들과 함께 동행하여야 합니다. (33-35절)
[눅]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3절을 보면 “그 날에” 라고 했는데 그 뜻은 부활하신 그 날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던 신앙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너무 성급하고 조급하게 떠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①방관주의, ②회피주의, ③도피주의입니다 방관은 무관심이고, 회피는 편의주의이며, 도피는 적극적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세 가지 다 나쁩니다.
가령 두 사람이 한 달 이상 예루살렘에서 지내다, 심령의 고통을 받아 떠났다면 이해가 가겠지만 그러나 그날 더욱이 부활의 소식이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이들에 대해 제아무리 미화하고 호평을 한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처사입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은 방관자, 회피자, 도피자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하면 내밀고, 불리하면 움츠리는데 익숙하다 할지라도 신앙의 현장을 떠나면 안 됩니다. 부활의 현장이요 삶의 애환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무너졌다는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곧 그 때로 : 이 말은 바로 그 때 라는 뜻 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었을 때이며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약 10km나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이나 아니면 2~3일 정도 더 지난 뒤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때 되돌아왔습니다. 누가 시켜서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마음이 뜨거워질 때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생겨나는 은혜의 소산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행동 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행동은 결단의 신앙으로서 믿음이 무너지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나 그러나 믿음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데는 망설이거나 미룰 필요도 없고 또 차차, 천천히 하면서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의 자리로 속히 돌아오면 됩니다. 엠마오롤 내려가던 두 제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항상 올라오는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으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창]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야곱도....나오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서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수없이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스]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구약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시고 그 성전에서 백성들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부활의 주님과 어떻게 동행할까?(눅24:28-35)
1. 주님을 영접하여 동행하여야 합니다.(29-30절)
2. 영의 눈이 밝아져 동행하여야 합니다 .(29-31절)
3.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져 동행하여야 합니다. (32절)
4.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들과 함께 동행하여야 합니다. (33-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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