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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누가복음

눅 24장 36-43절(우리를 회복하시는 주님) - 안효관

by Preacher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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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장 36-43

우리를 회복하시는 주님

안효관 목사 2020-04-19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중에 존 크리시(John Creasey: 1908-1973)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추리작가협회’의 창립멤버 중 한 명으로 세계 문학계에 유명한 작가입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CWA 존 크리시 메모리얼 대거 상’(CWA John Creasey Dagger Award)은 신인 추리소설가들이 선망하는 상이기도 합니다. 이 존 크리시는 평생 564권의 책을 썼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작가였지만, 처음부터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의 도움이나 지도 없이 독학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록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주먹구구식으로 쓴 그의 글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 않고 계속 글을 썼고, 자신의 글을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의 출판사나 문학작품을 싣는 잡지들 가운데 단 한 곳도 그의 원고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돌려받은 거절 통지서는 무려 743장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글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첫 번째 거절 통지서를 받고난 후 그는 두 번째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두 번째 거절 통지서를 받았을 때에 그는 세 번째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거절 통지서를 받을 때마다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글을 또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743번째 거절 통지서를 받았을 때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744번째 원고를 썼고, 그것이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20개가 넘는 필명을 가지고 500권이 넘는 책을 써 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가 곧 패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 실패 없이 살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실패를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어린아이가 일어서 걷기 위해서는 수도 없이 넘어지는 실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갓난아기일 때에는 자신의 몸을 뒤집기 위해서 수도 없이 노력합니다. 그 결과 숱한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자신의 몸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일어서는 것을 위해 연습을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리에 힘이 없어 주저앉기를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일어서는가 싶으면 이제는 걷기 위해서 한 발작씩 걸음을 옮겨봅니다.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수없이 많이 반복한 결과 마침내 걷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 속에 아이는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어느 누구도 책망하지 않습니다. ‘왜 한 번에 뒤집지 못하느냐’고 책망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왜 빨리 일어서지 못하느냐’고 다그치는 이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걸음걸이가 늦느냐’고 핀잔을 주는 이도 없습니다. 아이가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때마다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힘을 내라고 박수를 쳐주고 격려해주고, 넘어져도 실패해도 웃어줍니다. 그것을 힘입어 어린아이는 마침내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하면 큰 일 나는 것처럼 실패에 대한 강박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수없이 실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실패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하게 되고, 심지어는 실패가 두려워서 새로운 뭔가를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자포자기 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를 너그럽게 받아들어 주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실수한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한두 번 실패한 사람에게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 영원한 실패자인 것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에 대해서 참 많이 기다려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때로 ‘실패자!’라고 낙인찍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실패자’라고 낙인찍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그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유산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그 재산을 받아다가 허랑방탕하며 다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 그는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세상을 즐기며 살다가 모든 재산을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다가 먹을 것이 없는 그는 남의 집에 돼지 치는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그는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아버지 집을 그리워합니다. 아버지 집에 가면 최소한 굶진 않으리라는 생각에 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 거지꼴로 되돌아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발견하고는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누더기 옷을 입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선 자신의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을 다시금 아들로 맞아줍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감히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품꾼으로나마 받아 달라’고, 그래서 ‘굶주려 죽는 것만이라도 면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그 동안 어디에 가 있었느냐?’고, ‘그 많은 재산 가져다가 어디에 썼느냐?’고, ‘왜 이런 거지의 몰골이 되어서야 돌아오느냐?’고 따지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내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었다.’고 기뻐할 뿐입니다.

 

여러분, 그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며 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듬어주시고, 다시금 회복시켜주십니다. 그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한없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그 한없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죽었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실패의 자리, 실수의 자리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진 부활하신 우리 주님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실수했을 때 ‘왜 그렇게 실수했느냐?’고 따져 묻지 않으시고, ‘너희는 실패자들이야!’라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부활의 증거들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신 것처럼 좌절하고 낙담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만으로 오늘 본문의 상황을 그려보십시다.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서 무덤에 찾아갔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옮겨져 있었고,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무덤에서 여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 천사들로부터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는 말씀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하셨던 말씀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제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회상시켜 주었습니다. 그 때서야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을 떠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여인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가서 여인들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들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듣긴 들었지만,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슬픈 빛을 띠고 터벅터벅 낙심된 마음으로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낙심되고 실망한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들은 그 날 밤 곧장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는 ‘자기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노라.’고 제자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거기에 모인 제자들은 여인들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직접 무덤을 찾아가서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며 여인들의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갔던 두 제자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시기 전부터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임 당한 후에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비록 그 말씀을 잊고 있었다 하더라도,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을 통해서 그 말씀대로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부활하신 것이 맞구나!’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로부터 자기들이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엠마오에서 밤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부활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의 여기가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면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19절에 의하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읽기에 기분 좋게 ‘영으로 생각했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유령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38절입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이 일어나느냐?” 마가복음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마가복음 16:14)

 

그렇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전해준 여인들의 말을 들었음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빈 무덤을 보았음에도, 심지어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다고 증언함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먹을 것을 달라 하시더니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 나타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고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한 번 실수했다고 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실수했다고 내치셨다면 부활하신 주님이 거기에 가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에 모인 제자들 가운데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기 전에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노라.’(마태복음 26:35)고 다짐하고 맹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붙들려 가실 때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못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모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다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빈 무덤을 보았고, 심지어 엠마오로 내려갔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의심을 갖고 있었고, 여전히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어디 제자들만의 모습입니까? 오늘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들도 그런 모습으로 산 적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릴 때 양심을 통해서 우리가 가야할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너무 자주 실수하며 실패 속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속삭임 앞에서 때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우리의 믿음까지 내팽개치고 무시하며 살던 적도 많았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며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산 적도 참 많았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서 주님을 잊고 산 적도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순간들 우리는 주님의 손을 놓아버리고 주님 없는 것처럼 살기도 했습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눈물도 흘리고, 주님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결심을 우리도 했는데 베드로처럼, 그리고 제자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따라 주님을 뒤로한 채 우리 자신을 위해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때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깨닫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려 주셨습니다. 기다려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주님을 생각나게 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은혜를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다려주신 주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또다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우리의 약함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수나 실패가 회복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지금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기다리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누가복음 22:61) 그것은 회복의 눈빛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회복의 눈으로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가 낙심되어 쓰러진 자리에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보스턴의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결핵을 앓다가 그녀가 8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를 메사추세츠 주립병원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녀는 마음의 어둠 때문에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고 사납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회복 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가족도 아이를 포기해 버리고 면회조차 가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은퇴한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조차 포기한 아이였지만, 그 간호사는 6개월 동안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갔고, 그녀에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소녀의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소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서서히 세상을 향해 문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 불가능이라던 정신 질환마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마음의 빛을 찾은 소녀는 자신과 같이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헬렌 켈러의 교사가 되어 헬렌 켈러를 세상의 빛으로 이끈 앤 설리번 메이시(Anne Sullivan Macy, 1866-1936)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포기한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이 포기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큰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오늘 우리, 아무리 힘든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죽음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그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온 세상 지구촌이 팬데믹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분명 이전보다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어떤 이는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장사가 잘 안 되어 수입이 줄어들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삶의 패턴이 달라져 힘겨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렇게 힘들 때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위로의 주님, 회복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이 내 곁에 찾아오셔도 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절망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믿음의 눈을 떠 오늘 내 곁에 찾아오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 주님을 만남으로 새 힘을 얻으십시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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