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3장 8- 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허창수 목사 5.01.18 1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뉴스를 보면 여당과 야당이 같은 문제를 두고 서로 싸우다가 다시 만나 양당이 한 발짝씩 양보해서 결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타협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남과 북과는 적대대적인 관계이지만 어떤 문제를 놓고 만나서 의논을 합니다. 그래서 타협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타협은 어렵고 안 되는 것도 되게 합니다. 타협은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타협이 통하지 않는 데가 있습니다. 신앙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에서 타협은 사탄 마귀의 수단이요 무기입니다. 성도를 유혹해서 타락하게 하는 것이 타협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타협으로 타락시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하게 된 것은 사탄과의 타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사자가 하와에게 타협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라고 타협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때 하와가 ‘모든 실과는 다 먹되 동상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을리라’고 말했더라면 더 이상 타협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말하므로 사탄과 타협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때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하와는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그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우리 백성을 내 보내라’고 했을 때 바로는 ‘보낼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바로는 ‘백성들을 내 보낼 터이니 사흘 길 쯤 가서 너희 신께 제사지내고 다시 돌아오라’고 타협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사탄은 타협이라는 무기로 성도를 타락하게 합니다.
오늘에도 사탄은 성도들에게 ‘주일을 꼭 다 지켜야 하느냐? 바쁜 일이 있을 때는 안 지켜도 된다.’는 식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타협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바쁜 일이 있다든지 작은 일이라도 있으면 쉽게 주일을 범하고도 조금도 죄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주일을 온전히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지 어디에도 바쁜 일이 있을 때는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십일조를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하되 어려울 때나 빚이 있거나 손해를 볼 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사탄의 타협에 속아 십일조를 하다가 말다가 합니다.
타협은 사탄의 술책입니다. 성도는 타협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사탄이 타협을 요구 할 때 거절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가르쳐 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나라를 잃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소년’이라고 했으니 10대의 어린 나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려서 부모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웠고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먼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만큼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려서 부모의 품에 안겨 배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신앙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어린 자녀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일생에 미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어머니는 젖먹일 때 신앙적으로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왕의 꿈을 해몽해 주므로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부탁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지방(도지사)의 일을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포로들이 대단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지방의 일을 다스렸고 다니엘은 왕궁에서 총리로 모든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2:49).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곤경에 빠져 넘어지도록 합니다. 두라 평지에 금으로 만든 왕의 신상을 세우고 총독과 수령과 지방에 모든 관원에게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 금 신상에 엎드려 절 했습니다.
당시 법령은 왕의 명령에 거절하면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어 죽이는 법이였습니다. 그런데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갈대아 사람들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왕에게 고발을 했습니다(12).
사실을 들은 왕은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고 오라고 할 필요도 없이 불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만 해도 되지만 왕이 아끼고 사랑하므로 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름을 부르며 이제라도 금 신상에 절하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이 세 사람들에게 타협을 요구한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선처로 왕궁에서 먹고 자라며 갈대아 학문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벨론의 지방을 맡은 것도 왕의 선처로 된 것입니다. 왕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말을 거절한다는 것은 인간 도리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왕의 이 말에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내가 세운 신상에 절하면 살려 줄 것이고, 절하지 않으면 당장 풀무불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절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여러분에게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사탄은 아주 교묘하게 신앙적인 문제를 놓고 타협을 요구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예배는 하나님 섬기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그럼 금신상은 무었입니까?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 ‘예배는 평생을 드리는 것이고 오늘은 특별히 중요한 일이 있어 하루 빠진다고 별 탈이 있겠느냐’라고 하며 주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유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안된다 주일은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만 빠지고 다음부터는 안빠지고 지키면 되지’, 하며 사탄의 타협에 응합니다. 성도는 사탄의 타협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기지 못하고 타협하면 마귀에게 끌려 영멸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너무 쉽게 사탄의 타협에 넘어갑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말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기도해 보고 대답하겠다’ 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단호하게 왕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왕의 타협에 대답할 필요도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우상이냐 하나님이냐, 왕의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세상이냐 천국이냐를 앞에 놓고 밀고 땡기고 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입니다. 이러한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양보할 것은 양보하지 않고,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은 쉽게 양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타협하는 것을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적당하게 즐기며 믿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을 지라고 머잖아 계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절대적인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뿐 이라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책임지십니다.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타협을 하지 않는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17). 세 사람은 일반적인 정사에 있어서는 왕의 부하로서 직임을 충실히 감당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최우선하였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풀무불 가운데 던져도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 가운데서도 능히 구해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가능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어느 만큼이나 믿습니까? 믿는다고 하지만 실생활에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기를 더 믿습니다. 사람의 힘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드리는 일 때문에 사업에 큰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해도, 손해를 보았다 해도 다시 일으켜 주시고 세워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불가운데 던져져도 살릴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이였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지라도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때 반드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말씀을 듣고 나가서는 자기 맘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 친구의 신앙은 절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신앙이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우리를 불 가운데서도 건져 주실 것을 믿지만 그렇게 하니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순교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18).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순교까지라도 감수하겠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고백 이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도 유익하지만 죽는 것도 영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살기위해 성도로서 해서는 안되는 비굴한 짓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풀무불 가운데 던져져 불에 타 죽는다 할지라도 우상에게는 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불의와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제 이 세 친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을 봅시다. 이들이 받는 축복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왕은 화가 대단히 났습니다. 분이 가득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풀무불을 칠 배나 뜨겁게 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세 사람을 던져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곧 바로 세 사람을 결박한 채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 사람을 불 가운데 던졌는데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넷째 사람은 신의 아들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가운데 던져진 세 사람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를 본 왕은 “지극히 놓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고 하며 불러냈습니다. 하나님은 불가운데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 가운데서 나온 세 사람은 불탄 냄새로 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느부갓네살 왕은 외쳤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하지로다 ...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하나님이 종들을 구원하셨다’라고 소리쳤습니다(28). 왕이 세 친구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30). 악한 일에 타협하지 않으므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을 돌리며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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