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32장 24-31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
안효관 목사 2018-04-08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은 다윗 왕입니다. 성경에서도 다윗은 훌륭한 믿음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13장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만나셨을 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사도행전 13:2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최고의 언어로 평가하셨던 그 다윗에게 일평생 잊혀질 수 없는 큰 범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부정을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하셨고, 다윗 역시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까?
다윗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대신할 왕을 간택하실 때 사무엘 선지자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형들을 보고는 ‘이 사람이 정말 왕이 될만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때 다윗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차기 이스라엘 왕을 간택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새의 마지막 아들이었던 다윗은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 이새는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신다면 최소한 다윗은 아닐 거야! 막내 다윗보다도 훨씬 나은 아들이 일곱이나 있는데 다윗까지 부를 필요는 없을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막내인 다윗은 양을 지키도록 들판에 놔두고 나머지 아들들만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이새도 ‘저 애는 왕이 될만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그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 그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에서 무엇을 보셨기에 더 멋지고 더 훌륭한 다른 아들들을 제쳐놓고 막내인 다윗을 선택하셨을까? 다윗의 무엇이 그렇게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 사도행전의 표현대로 다윗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모습일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윗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마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이 그의 삶을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다윗의 이야기 가운데 두 개의 모습에서 그 모습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골리앗과 싸우러갈 때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윗의 형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전장으로 보내면서 형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오도록 했습니다. 전쟁터에 간 다윗은 때마침 골리앗이라는 블레셋의 장수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열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했다는 것은 곧 그 군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다윗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도저히 싸움이 될 수 없는 상대입니다. 다윗은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고등학생 쯤 되는 사람이 키가 3m에 가까운 거인 골리앗과 싸우러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다윗은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다윗은 싸움의 상대가 될 수없는 골리앗과 싸우러가 가겠다고 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방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이후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습니다. 그러자 왕인 사울이 다윗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은 그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말입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 왕의 왕위를 단 한 번도 탐내본 적이 없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 왕은 끊임없이 다윗을 자기의 정적이라고 생각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도망자 생활을 하던 도중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다윗이 그곳에 있다는 정보를 접한 사울 왕이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엔게디로 찾아갑니다. 사울의 군대에 포위를 당한 다윗이 엔게디의 한 굴에 몸을 숨겼습니다. 엔게디에는 굴들이 엄청 많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굴들 가운데 다윗이 어느 굴로 숨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울이 배탈이 났는지 용변을 보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한 굴로 들어가 용변을 봅니다. 그런데 그 굴이 바로 다윗이 숨어 있는 굴이었습니다. 사울이 굴로 들어오자 다윗은 굴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기고 있고, 굴에 들어온 사울 왕은 밖을 향해 앉아 용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뒤에, 굴 안쪽에 다윗이 숨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굴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건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사울을 죽이자고 속삭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 왕이 눈치 채지못하게 몰래 그 뒤로 가서는 사울 왕의 겉옷자락을 베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사울 왕의 겉옷자락을 벨 때 다윗의 마음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통쾌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겉옷자락을 베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다윗이 겉옷자락을 벤 이유는 사울 왕에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당신의 생명이나 당신의 왕위를 결코 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사울 왕의 겉옷자락을 베엇을 때 왜 마음이 아팠습니까?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사울의 겉옷자락을 벨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던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요.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겉옷자락을 베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왕궁으로 끌여들여 죄를 짓고 맙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임신한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삼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간음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세요?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의 겉옷자락을 베어낼 때에는 너무나도 마음 아파했던 다윗입니다. 그런데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를 때에는 다윗에게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간음죄를 저질렀고, 그 죄를 덮기 위해서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일 때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이런 죄를 저질렀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도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이 말입니다.
골리앗을 죽이려 갈 때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런 놈은 결코 가만두어서는 안 되다는 불같은 뜨거움이 그의 가슴에서 솟구쳤습니다. 그랬던 다윗입니다. 사울왕의 겉옷자락을 벨 때에도 비록 그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사람의 겉옷자락을 벨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랬던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죄를 지었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그런 죄를 짓는단 말입니까?
다윗에게 변한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했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던 다윗의 그 마음이 변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했을 때가 다윗이 인생 역사에서 가장 번성하고 가장 평안한 때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다윗과 밧세바와의 범죄가 있었을 때 다윗의 나이가 약 50세 전후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30세에 왕이 되었으니까 왕이 된 지 약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그 사이에 다윗이 왕이 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도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 승리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니까 불만이 사라졌습니다. 정치도 참 잘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사무엘하 8:15)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는 말은 모든 백성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평안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늘 전쟁에 승리를 거두었고, 수많은 나라가 다윗 왕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안정되었고 다윗은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다윗에게 유혹이 찾아온 것입니다. 밧세바와의 사건이 있을 때에도 암몬과 전쟁을 치르고 있긴 하지만, 왕이 직접 출전하지 않고 요압 장군에게 전쟁을 맡겼습니다. 왕이 전쟁에 나서지 않아도 다 이긴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평안하고 형통할 때 다윗에게 유혹이 찾아왔고, 다윗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평안하고 무엇 하나 걱정거리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형통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만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는 그 힘든 시기에는 사울 왕의 겉옷자락만 베어도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의 신앙을 민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마음 아파했고, 실수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삶에 여유가 생기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형통한 때에 그의 마음은 신앙에 대해서 무디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디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죄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다윗만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는 다윗 왕 이후에 가장 훌륭한 왕이라는 평가는 받는 왕입니다. 역대하 29:2절에서 히스기야 왕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렇습니다. 히스기야도 다윗 못지 않게 훌륭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생애에 아주 큰 두 가지 위기가 있습니다. 그는 그 위기를 모두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 첫 번째 위기는 앗수르의 침공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세계의 패권을 휘두를 만큼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도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막강한 제국인 앗수르가 18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히스기야가 통치하고 있는 남 유다를 침공해 들어온 것입니다. 당연히 남유다에게는 그 앗수르 군대와 맞서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항복하라’고 보낸 편지를 들고 하나님의 전에 찾아가서 하나님 앞에 앗수르가 보낸 편지를 펼쳐놓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모욕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천하만국에서 참 하나님되심을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천사를 보내시어 앗수르의 군대를 하루 아침에 멸하시고 남 유다를 건져주십니다.
강대국 앗수르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히스기야에게 큰 병이 생긴 것입니다. 그 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그 병으로 인해 히스기야는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셔서 죽음을 준비를 하라고 알려주십니다. 이제 히스기야의 생명이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시고 나를 살려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거 아세요? 하나의 위기를 넘어가면 또 다른 위기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도 그랬습니다. 이 두 위기를 극복한 후에 히스기야에게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건 이전에 닥친 두 번의 위기와는 다른 종류의 위기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의 큰 위기를 겪은 후에 히스기야는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 말씀한대로 히스기야의 부와 영광은 지극했습니다. 부와 영광이 지극했다는 이 표현은 역대하 1: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솔로몬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최고의 부와 명광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도 그랬습니다. 물론 솔로몬만큼은 아닐지라도 두 위기를 극복한 후에 히스기야는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위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귀영화를 누리길 원합니다. 부귀영화 주어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귀영화라고까지 표현되지는 않을지라도 지금보다 좀 더 부와 영광을 누리길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내일도 오늘만큼만 벌고, 내일도 오늘처럼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들보다 조금 나아졌을 때에는 일시적으로 그런 생각을 갖기도 하지만 일평생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히스기야를 생각해 보십시다. 나라가 망할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또 다른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귀영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라를 잃는다면 자신이 유다의 왕이라는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큰 두 개의 위기에서 히스기야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군다나 그 큰 두 개의 위기를 겪고 나서 부위영화까지 주셨습니다.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감사한 일입니다. 히스기야는 매일같이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감사의 말을 수없이 쏟아놓아도 결코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기였습니다. 무엇이 위기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히스기야가 누렸던 부귀영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잘 읽어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금은보화를 저장해 둘 창고를 새로 지어야 할 정도로 온갖 금은보화가 많아졌습니다. 그 금은보화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갑자기 더 큰 창고를 지어야 할 정도로 그 많은 금은보화가 어디서 생겨난 것입니까? 오늘 본문 29절에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그 많은 금은보화를 어떻게 주셨단 말입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스라엘 땅에서 금광이 발견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고침 받은 후에 주변 나라들이 히스기야에게 가져다 준 것들입니다. 그 막강한 앗수르를 무찌른 히스기야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나라에서 히스기야에게 선물의 명목이든 뇌물의 명목이든 주변 나라에서 가져다 준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쳐주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변나라에서 가져다 준 것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히스기야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히스기야의 신앙의 마음이 점점 무디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라가 평안하고 정치가 안정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게 잘 풀려질 때 신앙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범죄한 것처럼, 히스기야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신앙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부귀영화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이 잘 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시험하십니다. 오늘 본문 31절입니다. 바벨론에서 사신들이 히스기야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부귀영화를 주시고 히스기야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자신이 얻은 모든 금은보화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히스기야가 금은보화를 보여주면서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거야!’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렇게 말했다면 시험 통과입니다. 합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하 20장의 말씀이나 이사야 39장의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그 모든 것들을 바벨론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만약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금은보화를 보여주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말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것을 다 바벨론에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히스기야가 그 금은보화들을 보여주면서 자기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추고 자기가 드러났습니다.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5절에서는 ‘히스기야의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면 우리는 누구나 그것이 자신에게 큰 위기의 순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내 힘으로 극복해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로 풀어갈 수 없는 문제가 내 앞길을 막고 있을 때 그것이 위기임을 우리는 직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형통해지고 우리가 계획한 일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잘 풀려지고 있을 그 때가 위기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복받는 그 순간이, 그리고 그 복을 누리며 사는 그 순간이 이전보다 더 큰 위기의 때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부귀영화에 취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왜 우리에게 위기가 됩니까? 왜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위기입니까? 우리의 삶이 형통할 때가 모두 위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릴 때가 언제나 위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인도하실 때 우리의 신앙적인 감각을 잃어버리면 그 때가 위기입니다.
그 위기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실 때입니다. 어려움과 고난만이 시험의 때가 아니라 형통하고 평안할 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내 삶에 풍요가 주어졌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질 때, 내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잘 풀려질 때, 삶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하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신앙적 감각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그 때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밧세바 사건 이후 다윗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도 하나님의 시험의 때에 그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당대에는 그 부귀영화를 여전히 누렸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의 후손의 때에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당하고, 그들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겼던 성전도 다 무너지고, 그 나라에 있던 모든 금은보화를 다 바벨론에 빼앗기도 말았습니다.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삶에 힘들 때가 위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 감각이 무디어질 때가 위기입니다. 내게 큰 어려움이 닥쳤다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이 풍요로워질 때가 더 큰 위기이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망하고 맙니다. 주님 사랑하는 신앙의 감각을 잃어버리지 말고 사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풍요를 주실 때 감사함으로 누리고,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실 때 그 기쁨이 우리의 삶에 지속되게 하십시다. 내 삶에 위기는 고난을 통해 오는 것 아니라 풍요를 통해 옵니다.
'구약 -------------------- > 역대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하 24장 15~27절(요아스의 배은과 완고함이 빚은 참극) - 김준범 (0) | 2023.06.26 |
---|---|
대하 26장 3-5절(주님을 찾는 동안에는) - 문기태 (0) | 2023.06.22 |
대하 32장 24-31절(인품의 시험) - 문기태 (0) | 2023.05.31 |
대하 33장 11-13절(코람데오(Coram Deo)의 사람들) - 배혁 (1) | 2023.05.19 |
대하 33장 10~13절(므낫세, 하나님께로 돌이킨 큰 죄인) - 김준범 (0) | 2023.05.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