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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도서

딛 2장 11-14절(예수님이 대신하여) - 조영식

by Preacher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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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2장 11-14

“예수님이 대신하여”

조영식 목사 2014.2.2.일

김포한신교회 http://kimpohansin.onmam.co.kr/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0. 들어가는 글

 

설 연휴 마지막 날이자 2월 첫째 주일입니다. 설 명절에 잠시 교회를 떠나 고향에 다녀오면서 교회 안에 있을 때보다 교회에 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예수님 중심이 강한 교회일수록 성령으로 변화되는 능력이 더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성령으로 변화되는 능력은 약해지고 종교 활동에 치우친 사람들만 많아집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예수님 중심으로 세워지는 바른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도 예수님 중심으로 세워져서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음

 

예수님 중심으로 세워지는 교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말씀합니다(11절).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를 통하여 구원의 보편성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회적 지위,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디도에게 2장에서 늙은 남자(2절), 늙은 여자(3절), 젊은 여자(4절), 젊은 남자(6절), 종과 상전(9절)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성별, 늙음과 젊음의 나이, 종과 상전의 사회적 지위가 차별이 없음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공통점을 찾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에서 세상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차별이 생겨나고 복음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각자의 모습이 다를지라도 오직 예수님의 구원하심으로 차별 없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바울은 구원과 은혜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 될 수 있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딛3:5)를 말씀합니다. 이어서 그는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딛3:7)라고 합니다. 그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의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와 행위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바울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절)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모르고 선한 일을 하면 자신의 의와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알고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합니다(10절).

 

2. 구원 이루기 위해 양육을 받음

 

우리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12절)를 말씀합니다. 여기서 양육은 훈련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우리들이 은혜로 받은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계속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육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는 세상 것을 버리는 양육으로 경건하지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려야 합니다. 경건하지 않는 것은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고 세상 정욕은 욕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느 정도가 세상 욕심입니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가 기준입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필요한 양식입니다. 우리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가지는 것은 욕심이 됩니다. 야고보도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합니다. 우리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가지고자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정욕이 되어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양육으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을 가져야 합니다. 신중함은 자신을 향하는 것이며, 의로움을 이웃을 향하는 것이며, 경건함을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에서 신중함이 ‘늙은 남자’(2절), ‘젊은 여자들’(5절), ‘젊은 남자들’(6절), 그리고 “우리를 양육하시되”(12절)까지 네 번 나옵니다. 신중함이 NIV에는 "self-controlled"로 나옵니다. 자신을 향한 조절과 통제와 절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도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향한 "self-controlled"을 하지 않는다면 이웃과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외식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도 "self-controlled"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의 양육 받아서 "self-controlled"하는 경건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3. 양육을 받음으로 복스러운 소망을 가짐

 

우리는 양육을 받음으로 복스러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복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도 양육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13절)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14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죽어야 했는데 예수님이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14절)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바울은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대신하여 죽음으로 용서받은 것은 너무 좋아하면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은 외면을 합니다. 교회들이 너무 반쪽자리 구원만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주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절)고 합니다. 우리들이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주님께 속한 ‘자기 백성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하여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읽고 나서 제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던 글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웠던 목사로서, 나치에 잡혀 처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본회퍼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을 엮어 한 편의 시로 남겼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였는가? 목사였는가? 신학자였는가? 선지자였는가? 스파이였는가? 암살 공모자였는가? 그의 동료들이라도 그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회에 헌신하는 모습, 또는 그가 쓴 글들로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본회퍼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담아낸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적막한 물음은 나를 희롱한다.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시오니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또한 그는 교수형으로 순교하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라는 복스러운 소망을 가졌습니다.

 

지난주 고향에 내려가서 어릴 적 친구를 지나가는 길에 만났습니다. 대뜸 ‘남봉아’ 하면서 별명을 부르는 것입니다. 순간 여러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본회퍼의 글과 맞물리면서 “나는 누구인가? 주님이 나를 더 잘 알고,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음으로, 오직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복스러운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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