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1장 12-17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시는 하나님
권율 목사 2016. 9. 28.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청년부 [부산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사람들은 누구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도덕성이라고 할 때, 내가 생각하는 도덕성의 기준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성의 기준이 분명 다릅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특정한 기준이 작용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일을 마무리했지만, 상대방이 보기에는 전혀 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때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과 나의 기준이 다르다는 차이가, 내가 더 노력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 친구가 성적 좋다는 기준이 100점이라면, 나도 그 친구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100점을 받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부작용을 훨씬 더 많이 일으킵니다. 내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상대방을 사정없이 공격하거나 은연중에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일과 도덕성에 대한 내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해서, 그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탁월한 존재임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기준에 대한 그런 역기능은 사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서로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상대방에게 없는 것을 내가 가짐으로써,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나약함을 부추기며 자기 발전을 이루어갑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곧 성공한 삶이라고 이 세상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신앙의 원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은혜의 법, 은혜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로마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은혜는 세상의 모든 상식을 뒤집어 놓습니다. 세상은 기준을 외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기준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기준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기준은 하나님이 설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는 더 이상 그 어떤 기준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도덕성의 기준이나 다른 사람이 가진 도덕성의 기준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차이를 가지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타락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향해서도 자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오늘 본문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은혜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14절에서 그런 사실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설정한 모든 기준을 무너뜨리지만, 이와 동시에 독특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기준이 제시되면, 비록 내가 거기에 못 미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그 기준에 도달한 것처럼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신다고 말씀합니까?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단어 사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를 충성되이 생각하신다”가 아니라, 분명히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신앙의 본질을 좌우하는 문제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뱉는 진실한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실제로 내가 주님께 충성되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실제로는 내가 주님께 충성된 것은 아닌데, 주님이 나를 충성된 자로 너그럽게 봐주신다는 뜻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실제로는 충성되지 못한 나를 주님이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나를 그런 존재로 귀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한동안 저는 바울의 이런 고백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교회 역사상 사도 바울만큼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사람이 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죽도록 두들겨 맞고 수없이 감옥에 갇히며 여러 번 죽을 뻔한 위대한 사도가 그런 고백을 한다는 사실이 참 의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15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위대한 사도인 그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우두머리 죄인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그런 고백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자신을 두고 그저 겸손하게 평가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겸손하게 포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유치한 사람들처럼 겸손을 가장한 자기 교만에 사로잡힌 자의 말이 절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이 주님께 충성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13절에서 보듯이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늘 인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에 얽매여 죄 의식에 늘 빠져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에 자신의 어떠함을 떠올리며 현재 변화된 자신의 모습이 오직 주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감사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바울의 현재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위대한 사도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대적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며 복음을 전할 때, 그 현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장사하고 통곡할 때도 바울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성도들을 감옥에 넘긴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행8:1-3).
과거에 그렇게 악랄했던 그가 어떻게 해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까? 14절에 나오듯이, 오직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3절과 16절에서 고백하듯이, 바울 자신이 주님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직 주의 은혜, 주의 긍휼 때문에 현재 자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은연중에라도 자기가 주님께 충성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거의 자기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모태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나왔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채 억지로 예배에 참석했던 자기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같이 모태신앙이 아닌 분들은 이전에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세상의 원리를 따라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그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바울처럼 이전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가 아니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죄인이요 악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세상이 보기에는 고상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부패한 행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본문의 바울처럼,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겨 주신다”는 말처럼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도 없습니다. 여겨 주신다는 말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간주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까?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4:3). 실제로 그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는 여전히 죄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그를 ‘의인’으로 여겨 주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12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이 주님께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충성되지도 않은 자신을 주님이 충성된 자로 여겨 주셔서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어떤 상태에서 사도의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까? 주의 몸 된 교회를 박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부활의 주님이 빛으로 그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마침내 사도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단 한 번도 교회에 충성한 적이 없는 그를 충성되어 여겨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충성했기 때문에 사도직을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그에게 다만 은혜를 베푸시어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12절 처음에 나오는 대로, “그를 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은혜의 원리가 있습니다. 충성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의 기준을 설정해 놓으시고 그 기준에 도달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다릅니다. 은혜는 우리더러 기준에 도달하라고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없이 부족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기준에 도달한 것처럼 여겨 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군대 교관처럼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제가 볼 땐 그런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성의 기준을 제시하시고, 우리가 거기 도달하지 못했을 때 우리를 책망하시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 기준에 통과되어야지만 우리에게 비로소 직분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은 잘못된 환호성을 지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충성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신다고 오해하기까지 합니다. 충성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은 충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유함 가운데 더욱 충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충성에 대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언제나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할 것입니다. 아무리 헌신하고 노력해도 늘 부족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실망스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내가 다른 성도들만큼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늘 힘겨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신다고 생각되는 그 기준에 도달하려고 또다시 자신을 쉴 새 없이 몰아붙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바로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내가 비록 완벽히 충성되지 못해도 충성되이 여겨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그런 강박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답게 그의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충성할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최선을 다한 충성이라도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의 원리로 보면 하나님은 그런 충성이라도 실제로 온전히 충성한 것처럼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충성을 두고 부족하다며 자책하지 않습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충성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시는 복음의 원리는, 내가 충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은혜에 감사하며 자유함 가운데 주님께 더욱 충성하도록 나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의 분량대로 주님께 충성하는 나의 부족한 모습을, 충성되이 여겨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또다시 더 큰 충성의 단계로 나아가려고 스스로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누가 더 잘 충성하는가를 지켜보신다고 제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육신의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서로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해서 어떤 기준에 도달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세상의 원리에 속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께 “주님, 이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1: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과 너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베드로 너는 나를 따르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바로 그 한 영혼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라는 사도의 고백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복음, 예수님이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그 기쁜 소식을 오늘 우리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바울은 바로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자기가 더 큰 죄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는 이상한 의에 사로잡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가 복잡한 분들이 회심해서 간증할 때 그런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전에 자기가 죄악에 빠져 힘들게 살아온 것을 내세우며 지금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삼아 말하는데, 자칫하면 자기 과거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마치 자신의 과거가 더 힘들었고 자신이 더 큰 죄인이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간증이 되기 십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두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은혜를 경험한 성도답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 있는 순간, 더 이상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영혼만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임재를 체험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상태에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사6:5)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이처럼 은혜를 체험한 성도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극도로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 중의 괴수였던 우리를 이제 자녀 삼으시어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나는 부족하고 충성스럽지 못함에도, “네가 충성되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충성의 높은 경지에 오르려는 강박증을 떨쳐 버리고, 한 영혼에게 집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남은 한 주간도 우리 주님의 은혜를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경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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