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1장 12-20
긍휼을 입은 성도의 바른 태도
이삼규 목사 20190929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던 한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6세 때 엄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 아빠는 아이가 7세가 되던 해에 새엄마를 맞았습니다. 아이는 이 일을 겪으며 마음의 문을 닫았고, 행실도 삐뚤어져 갔습니다. 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장성한 아이는 노예 상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해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파선되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위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악한 죄를 지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간구는 응답되어 그는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자신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내가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이 사람은 바로 영국 성공회 신부이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라는 찬양시를 지은 ’존 뉴턴‘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를 목회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들은 젊은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지침을 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는 그 당시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외적으로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딤전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다른 교훈이 교회 안에 유입될 수 있다는 우려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양적 성장에는 질적 성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여러 곳에 교회가 세워지기는 했지만 아직 신학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변론만 만들어내는 헛된 말이 많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이야기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일을 막기 위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정립될 필요가 절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전의 모습과 긍휼을 입은 성도의 바른 태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믿음의 선한 싸움을 바로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입기 전 바울
바울이 보낸 편지를 보면 항상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독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구합니다.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만큼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바랐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긍휼을 알기 바랐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엘레오스”입니다. 그 의미는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생각하다, 동정하다, 자비를 베풀다, 자비를 보이다, 자비롭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긍휼을 베푸셔서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던 것을 봅니다.
막 5: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긍휼’은 어떤 방법으로도 갚을 수 없는 구원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은 비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어떤 것인지 아는 만큼 우리의 죄가 얼마나 극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기에 ‘괴수’(프로토스)라는 말은 ‘첫째의, 최고의, 처음에’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둘째가라하면 서운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런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바울은 긍휼을 입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비방자(블라스페모스)-‘욕하는, 중상적인, 모독하는, 비방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성질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2)박해자(디옥테스)-‘핍박자, 박해’를 의미합니다.
3)폭행자(휘브리스테스)-‘난폭한 사람, 오만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긍휼을 입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단어가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의 긴 설교가 등장합니다. 그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
그때 무리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행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 순교 사건의 주동자가 누구였습니까?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혈기 방장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사건을 앞장서서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보다 더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사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긍휼을 입기 전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긍휼을 입기 전에 어떤 모습을 갖고 살아오셨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모태신앙이었고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흥집회나 이런 때 내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교만이지요. 하나님을 잘 몰랐기에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긍휼을 입은 까닭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신 까닭이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알고 지은 죄를 ‘고의적으로 지은 죄’ 즉 ‘고범죄’라고 말합니다. 법정에서도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는 처벌이 달라집니다. 물론 알고 지었든지 모르고 지었든지 죄는 죄입니다. 그러나 알고 지은 죄는 선처의 여지가 없습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모르고 지은 죄는 그래도 용서해줄 선처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잡아다가 형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에게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열정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무슬림들이 자살 폭탄테러를 감행할까요? 남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죽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그들이 이슬람을 위하여 순교하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교하여 천국에 들어가면 예쁜 여자들을 여러 명 데리고 살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자랑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인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신 중요한 이유입니다. 나만 잘 믿고 천국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2019년 다니엘 기도회 말씀 강사님들이 선정되었습니다. 귀한 간증을 해 주실 분들을 많이 섭외하였습니다. 그분들의 간증과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참모로 권력의 최정점에 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중에 교도소 선교회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찰스 콜슨은 [백악관에서 감옥까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공허한 삶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이 얼마만큼 암울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 것이나 다 믿습니다. 이 세상 온갖 허탄한 것들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해 거기에 인생 목표를 걸고 살아가기에 그 삶은 허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빛과 어둠을 구별할 줄 알고 생명과 사망을 구별할 줄 압니다. 또한 거룩함과 죄를 구별할 줄 압니다. 만약 우리의 삶 속에서 빛과 생명과 거룩함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습니까?
긍휼을 입은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긍휼을 입은 까닭 가운데 두 번째가 바로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1)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AD1095년 교황 우르반 2세 때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주가 원하신다!”라는 지도자들의 한마디에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해 군인들이 벌 떼처럼 몰려왔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전쟁이 하나님이 맡기신 전쟁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선한 싸움은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이 말한 교훈은 앞에서 나온 내용, 즉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하는 내용과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치러야 할 영적 전쟁을 의미합니다.
2)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목적을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목적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큰 목적을 성취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은 어떤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선한 싸움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세상 싸움은 싸우는 사람이 드러나지만 선한 싸움은 주님이 드러납니다. 물리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영적인 싸움과 물리적인 싸움을 혼동해서 세상에서 말하는 승리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 영광을 마다하고 십자게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승리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래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현혹되어 거짓과 죄를 좇아 죽음을 향해 가던 죄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힘입어 믿음으로 구원의 큰 복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으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 순간 내게 긍휼을 베푸신 주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진리의 말씀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의 본보기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고백이 무엇입니까?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긍휼을 입은 성도로서 바울의 최후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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