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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모데후서

딤후 4장 9-18절(데마의 배신이 주는 교훈) - 이준원

by Preacher 2025.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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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4장 9-18

데마의 배신이 주는 교훈

이준원 목사 2013.9.18.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데마는 누구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데마라는 사람은 성경에 몇 번 안 나오는, 잘 안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를 통해 우리가 끌려들어가기 쉬운 시험의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데마라는 이름 자체의 뜻은 ‘인기가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짐작되며, 바울의 전도를 받아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바울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습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몬 1:24)

 

동역자라는 말은 생명까지 같이 나누며 주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어떻게 보면 피를 나눈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를 가진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정도의 관계입니다. 아무에게나 ‘동역자’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닙니다. 형편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동역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빌레몬서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은 데마에 대해 미래가 기대되는 사역자로, 또 평생 신뢰하며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곳에서 데마에 대해 나옵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골 4:14)

 

이 골로새서 말씀과 조금 전의 빌레몬서 말씀을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먼저, 빌레몬서에서는 네 명(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모두 “나의 동역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붙이고 있는데, 골로새서에서는 누가에 대해 “사랑을 받는 의사”라고 특별한 묘사를 하는 것에 비해 데마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 없이 그냥 이름만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대충 적어놓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는 모두 골로새의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입니다. 연대는 빌레몬서가 1-2년 앞서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와 데마는 원래 영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동역자였는데, 그 1-2년 사이에 누가는 영적으로 계속 발전했고 데마는 퇴보했거나 정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빌레몬서에서는 누가보다 데마가 먼저 나오는데, 골로새서에서는 데마의 이름이 뒤로 가고 누가의 이름이 앞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이름을 순서대로 쓰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인물을 뒤에 쓰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위치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책임의 정도에 따라 이름의 순서가 정해집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이 기록된 곳들을 보아도 그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항상 가장 앞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뒤로 가서 가룟 유다와 붙은 적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름은 항상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또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안디옥에서 사역하던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파송하라고 하셨을 때, 처음에는 선교 여행에서 “바나바와 사울”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바나바의 이름이 먼저 나왔을 때는 안디옥 교회의 다섯 명의 지도자들 중에서 바나바가 가장 앞에 있는 위치였고(요즘으로 하면 담임목사였고), 사울은 맨 마지막 위치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교여행이 진행되면서 사울이 바울로 바뀌고 또 바울이 바나바보다 먼저 이름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 전도를 위하여 유대인식 이름인 사울이 아니라 헬라식 이름인 바울로 쓰게 되었기 때문이고, 또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는 바울이 바나바보다 더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그 사람의 위치나 역할에 따라 이름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데마의 이름이 빌레몬서에서는 누가보다 앞서다가 골로새서에서는 누가보다 뒤로 가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데마가 영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데마는 영적으로 퇴보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병이 든 모습을 보여줍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0절)

 

바울은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년은 홀로 감옥에 갇혀서 언제 사형을 당할지 풀려날 수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아주 불안하고 고독한 처지였습니다. 바울이 감옥 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많은 성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와 물질로 협력을 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날짜가 점점 길어지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 병에 걸려서 입원하면 처음에는 가족들이 정성을 다해 간호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자주 찾아보고 격려하며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병이 몇 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간호하는 사람이 지쳐버립니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점점 줄고 나중에는 거의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힌 지 한두 달 되었을 때에는 정성껏 돌봐줄 수 있지만, 몇 년 동안 계속 갇혀 있게 되면 다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순교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그런 표현을 합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15)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4:16)

 

많은 사람들이 바울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타락하여 떠났다거나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1-12절)

 

10절의 그레스게와 디도는 그냥 각각 갈라디아와 달마디아로 갔다고 합니다. 또 누가는 유일하게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기고는 자기가 에베소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데마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분명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을 계속해서 전파하기 위한 목적 아래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마만큼은 그 목적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등지고 떠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마는 분명히 신앙에 있어 실패한 사람입니다. 중간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후(AD 57년경)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벨릭스와 베스도, 그리고 아그립바 앞에서 2년간의 재판을 마친 뒤 가이사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에서 투옥된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때(61-63년경), 데마는 바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 복음 전파 사역으로 그의 이름이 소아시아 지역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아, 데마는 초기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의 2차 투옥 때 세상을 사랑하여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2. 데마가 실패한 원인

 

데마가 완전히 믿음에서 떠나 배교자가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어떤 학자는 데마가 실패한 원인에 대해 그의 믿음이 복음의 양지만을 찾아서 따라다닌 믿음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복음의 양지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 얻게 되는 세상의 여러 좋은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얻는 것들이 참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삽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 죄의 본능에서 해방되고, 기쁨과 감사가 따라오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음의 양지이며 유익인데, 데마는 거기에만 집착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데마는 처음에 바울이 감옥에 갔을 때도 따라갔을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데마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인해 좋은 것이 올 때에만 그렇게 열심히 따랐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힘들어질 때는 그 자리를 회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가진 믿음의 결정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데마가 왜 예수 믿어서 좋은 것만 추구하고 예수 믿어서 안 좋은 것이 오면 도망갔습니까? 기본적으로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큰 것이 바로 돈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겁니다. 대체로 주님을 잘 따르던 신자가 믿음의 길에서 뒤로 물러가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돈에 대한 사랑입니다. 돈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딤전 6:10, 새)

 

돈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하게도 만들고 비굴하게도 만듭니다. 사람의 마음을 나뉘게 합니다. 또 돈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며,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너무나 분명합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경고합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3:5)

 

그런데 돈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돈을 사랑하여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와 헌금입니다. 지금 자신의 헌금생활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돈을 사랑하는지, 헌금을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한 세상의 정욕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주는 편리, 세상이 주는 욕심, 세상이 주는 이득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미가 신앙생활의 기쁨보다 더 좋다는 말입니다.

 

‘나는 혹시 데마와 같은 사람은 아닌가?’ 이 시간 자기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고 엄청난 일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에게 유익이 없고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 느끼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뛰쳐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유익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일 뿐, 정말로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복음의 양지만을, 예수 믿는 유익만을 찾아다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를 왜 믿느냐고 물으면, 예수 믿어서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신앙생활이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 믿어서 고통이 온다면 그들이 믿으려고 할까요? 예수 믿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장이 되고 손해도 본다면 그래도 믿으려 할까요? 거기에서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행복이라고 여겼던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기준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향한 마음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없었다면, 머리로는 믿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믿은 것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세상을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은 없음을 밝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언젠가 끝이 있는 것을 붙잡는 인생, 지나가는 것을 붙잡는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37-40, 새)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저번에 한 번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식이냐 하면, 마치 “주님, 주님은 제게 첫째이십니다.” 하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이것과 같습니다. 만약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보, 당신은 나에게 Number One이야. 나는 당신을 가장 사랑해. 그리고 Number Two는 미스 김이고, Number Three는 미스 박이고, Number Four는....” 이런 식이라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리고 넘버 투는 미스 김이고, 넘버 스리는 미스 박이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믿음의 길을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허무이고 파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거기에 네 종류의 토양이 나옵니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입니다. 그 중에서 데마는 돌밭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눅 8:6, 13)

 

데마는 마치 씨가 바위 위에 떨어진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뜨거운 햇볕을 받은 바위가 따뜻하니까 금방 싹이 났다가 말랐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서 쓰지 않은 말을 사용합니다.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데마와 같이 감정적인 기복이 심한 신앙, 미지근한 신앙의 특징은 습기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만나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삶에 눈물이 메마른 것입니다. 눈물이 없는 신앙은 불행한 신앙입니다.

 

제가 고등부 시절에 주일 오후에 축구시합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축구를 좋아하지만 그때는 좋아하기도 했고 지금보다 훨씬 빨랐습니다(날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왜 그렇게 담당 전도사님의 설교가 길게 느껴지는지, 빨리 끝나고 나가서 축구를 해야 하는데 너무 지겨웠습니다. 예배가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렸지만, 주일날 오후에 골프대회가 있다고 하면, 골프를 좋아하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이상하게 다른 때보다 더 길게 느껴질 것입니다. 골프의 재미가 예배드리는 감격보다 더 좋은 겁니다.

 

이런 것은 작은 예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세상의 재미를 좇다가 망한 신앙이 데마의 신앙입니다. 데마는 로마에 가서 바울을 수종들 때 로마 감옥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로마의 휘황찬란한 영광을 본 것입니다. 반면 감옥에 갇혀 있는 초라한 바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은 결국 돈과 성공과 권력이다. 신앙이 아니다.’

 

데마에게는 네로가 예수님보다 더 커보였고, 하나님 나라는 로마에 비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번영을 누리는 로마의 귀족들이 바울보다 훨씬 지혜롭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데마가 바울처럼 예수를 따라가게 되면 로마에서 보는 저 부귀영화를 다 포기해야 하고, 게다가 바울처럼 저렇게 감옥에 갇히고 고생해야 하겠기에, 그는 결국 예수님보다 세상의 영광을 택한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삶

 

교회 안에도 참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기예보를 듣고 날이 더워지거나 비가 많이 내리거나 눈이 좀 온다고 하면, 아예 교회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편하게 믿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교회 안에 조금만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모습이 정말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값이 많이 지불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기에,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이 세상의 전부를 다 바쳐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합니다. 돈과 쾌락과 성공과 이 세상의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나라의 영광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충성되게 살다가 주님께로 가서 마지막 천국 문 앞에 서면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했다! 끝까지 잘 참고 견디어냈구나. 그러한 너에게 이제 내가 주려고 하는 영광이 얼마나 큰지, 자 들어와서 보거라. 세상에서 잠깐 살면서 사람들이 누리는 그런 영광과 비교해 보거라. 그것과 이것이 비교나 되겠느냐?” 바울이 바로 그 영광을 보았고 다른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저 없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선택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엡 1:17-19, 새)

 

평균적으로 제 나이를 볼 때, 저만해도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적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 앞에 설지는 모르지만, 데마처럼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서는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앞날에 주신 영광을 미리 내다보며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있는데 어떻게 조그마한 문제에 걸려 쓰러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조그마한 감정 때문에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도 바울과 같은 이러한 고백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6-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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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점검과 기도

- 세상을 사랑하는 점은 없는가? (돈, 정욕, 재미 등)

- 세상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만 사랑하며 주님만 따라가겠다고 결단하는 기도를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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