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예레미야

렘 20장 7-11절(불붙는 것 같은 마음) - 안효관

by Preacher 2024. 3. 10.
728x90
반응형

렘20장 7-11

불붙는 것 같은 마음

안효관 목사 2020-02-16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현재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한 중국 의사 리원량(李文亮, 1985-2020)이 결국에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한시중심병원에서 안과의사로 근무하던 그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한 것을 알고 지난 해 12월 30일 SNS에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경찰로부터 허위사실을 올렸다고 소환되어 경고와 훈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계속 돌보다가 그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2월 7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우한교회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졌고, 최근 그의 ‘마지막 메시지’라는 글이 SNS에 올라왔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글은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어문강사 ‘핑위원’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여 쓴 것이라고 합니다. 조금 긴 글 중에서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동이 트지 않았지만 나는 갑니다! 가야 할 시간, 나루터는 아직 어둡고, 배웅하는 이 없이 눈가에 눈송이만 떨어집니다. 그립습니다. 눈송이가 눈시울을 적십니다. 캄캄한 밤은 어둡고, 어두움에 집집마다 환하던 등불조차 떠올릴 수 없습니다. 일생 빛을 찾았습니다. 스스로 반짝인다 자랑했습니다. 온힘을 다했지만 등불을 켜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어젯밤 눈바람 무릅쓰고 나를 보러 왔던 여러분! 가족처럼 저를 지키며 밤새 잠 못 이루던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본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나에게 그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나에게 태평한 세상에 소란피우지 말라며, 도시 가득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이 보이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전 세계가 지금의 안녕을 계속 믿게 하기 위해 나는 단지 마개 닫힌 병처럼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렇게 천하는 다시 북적거렸습니다. 누구도 몰랐습니다. 거대한 비극이 곧 성문을 잠그리라고는. 이후 하늘이 대노하고 산하는 시들고 나는 병들었습니다. 내 가족까지 모두 병들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어젯밤 눈 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내 머리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착하지, 나와 같이 가자. 인간은 가치가 없어!’ 이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비록 인간은 빈한하고 하늘은 따뜻한 곳이더라도 말이죠. 저승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기 두렵습니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와 만나기를 꿈꿨습니다. 아들일지 딸일지 태어나면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사람의 물결 속에서 나를 찾을 것입니다. 미안하다, 아이야! 나는 네가 평범한 아버지를 원했음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평민 영웅이 되었구나... 봄이 와 벼락이 칠 때 만일 누군가 나를 기념하려는 이가 있다면 나를 위해 작디작은 비석 하나 세워주기 바랍니다! 우람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왔다 갔음을 증명해 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름과 성은 있었지만 아는 것도 두려움도 없었다고. 내 묘지명은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하여 말을 했다’(他爲蒼生說過話).”

 

리원량은 경찰에 끌려가 ‘사실과 다른 내용은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훈계서(반성문)에 서명한 후에야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발은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경찰의 위협과 협박에 훈계서를 써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아내와 5살 난 아들, 그리고 6월에 출산예정인 아이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바람처럼 어쩌면 그의 묘비에는 ‘그는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하여 말을 했다.’는 짤막한 글이 새겨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전염병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감염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하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말함으로서 공안으로부터 위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에 그는 그것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세상에는 때로 알려지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알려져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불안과 불편을 초래하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려져야 할 것들이 오히려 감춰지고 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지만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에는 엄청난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런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선포하고 있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나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귀를 막고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예레미야와 당시 백성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직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남 유다의 마지막 선왕(善王)이었던 요시아가 주전 609년 므깃도 전투에서 애굽과 싸우다가 죽은 이후, 남 유다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유다는 어느 쪽에 손을 잡아야 할 것인지를 놓고 두 패로 나뉘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전통적인 강호인 애굽이 세계의 지배자로 재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애굽과 손을 잡아야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친 애굽파이고, 다른 하나는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 제국이 엄청난 기세로 세계 정복을 나서고 있기 때문에 바벨론과 손을 잡아야 나라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친 바벨론파입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누구와 가까이 하고, 누구의 힘을 등에 업어야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남 유다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애굽도, 바벨론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누군가와 친해져야 한다면 애굽 대신에 바벨론과 손잡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그나마 고통이 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이 시대에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떠난 남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벨론에 항복하는 게 그나마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친 애굽파인 여호야김 왕이나 왕의 측근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종교지도자들조차도 예레미야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예레미야 20:1절 이하에 보면,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성전의 총감독’이라는 말은 성전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로, 대제사장 다음 가는 지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종교적으로 최고의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런 종교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예레미야를 붙잡아 때리고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무엇이라 외쳤기에 당시 최고 종교지도자가 예레미야를 그렇게 붙잡아서 때리고 나무고랑에 채워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까? 예레미야 2장부터 25장까지는 여호야김 왕 시대에 외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모두 예레미야가 외친 12편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8-19장은 예레미야의 8번째 예언입니다. 그 예언에서 예레미야는 온 우주와 인류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절대 주권아래 놓여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 그릇을 깨뜨려버린 것처럼 나라를 세우고 망하게 하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옹기를 사가지고 이스라엘 지도자들 앞에 가서 그 옹기를 깨뜨립니다. 옹기가 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백성과 이 나라를 그렇게 깨뜨리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멸망이라는 심판을 내리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협박했습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나무 고랑을 씌워 성전에 있는 감옥에 가둔 이유도 그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는 말, 자신에게 축복이 된다고 생각하는 말은 잘 듣습니다. 반면 자신들에게 비판적이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하면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비판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면 자신을 미워해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말이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복을 주신다, 평안케 하신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어려움을 제거해 주신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멘’합니다. 그런데 죄를 회개하라는 내용이나 잘못 믿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말씀을 할 때에는 별로 ‘아멘’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왜요? 별로 듣고 싶지 않거든요. ‘일주일 내내 바쁘고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힘들게 살아왔는데, 주일에 교회에 와서조차도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옛말에 있는 것처럼 입에 쓴 약이 병에 좋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입니다. 듣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요청하시고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들어야 합니다. 나를 바꾸고,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건강해집니다. 때로는 듣기 싫은 말, 내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기대와 너무나도 다른 삶을 많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최고의 권력자인 왕도, 최고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도 예레미야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백성들의 눈이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죽이진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못하도록 협박하고 위해를 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외쳐진 그 말씀이 자신들이 원하는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외친 예레미야를 협박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 협박과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예레미야는 결코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협박이 가중될수록 예레미야의 외침은 더욱더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의 입을 막으려 할수록 예레미야는 더욱 소리 높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왜 그렇게 외쳐야 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잘 압니다. 지금 자신이 외친 그 말씀이 백성들이나 지도자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말씀을 외친 자신이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외친 말씀이 조국 유다의 파멸과 멸망에 대한 말씀이기에 종일토록 사람들에게 치욕과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조롱을 당하고, 치욕과 모욕을 당하고, 더 나아가 협박과 살해 위협을 당함에도 자신이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왜 그렇게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은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외친 말씀은 심판과 멸망, 파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산다’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꾸만 강대국들의 눈치만 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백성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산다는 예레미야의 외침은 듣지 않고,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만 가지고 ‘예레미야가 우리 조국의 멸망을 외치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을 오해하는 것도 답답하지만, 더욱 그의 마음을 불붙는 것 같이 만드는 것은 멸망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백성들 때문입니다. 도대체 깨달음이 없습니다. 파멸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평안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레미야와 같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도 남아 있습니까? 불의 앞에서 침묵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함으로 내게 혹 어떤 손해가 오고 어떤 위협이 가해진다 하더라도 정의를 위해서 외쳐야 한다는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내 형제, 내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불붙는 것 같은 마음, 불의와 타협하며 왜곡된 길을 가고 있는 우리 시대를 향해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외치고 싶은 불붙는 것 같은 마음, 아니 그렇게 외치진 못해도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나만이라도 정의의 길, 올바른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불붙는 것 같은 마음, 그런 마음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늘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감동이 되고 마음이 끌리는 대로 결정하는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역시 너무나도 자주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우리 시대를 향하여 불붙는 것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있는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보십시오.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레미야도 조롱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모욕당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협박을 받거나 살해 위협을 받지 않고 평안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셔도 그만 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짐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불붙는 것 같은 뜨거움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에 불붙는 것 같이 견딜 수가 없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려고 해도 내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이 나를 격동시킵니다. 그래서 도저히 세상과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유혹이 아무리 달콤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죄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불붙는 것 같은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선교사님들입니다. 그런 불붙는 것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선교사님들처럼 먼 이국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그런 불붙는 것 같은 마음은 간직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힘이 됩니다. 그런 불붙는 것 같은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마음으로 살 때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조롱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붙는 것 같은 마음으로 살 때에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 불붙는 것 같은 마음으로 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불붙는 것 같은 마음, 그 뜨가움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 마음으로 사십시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