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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예레미야

렘 20장 7-9절(영혼을 향한 가슴앓이) - 신만교

by Preacher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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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0장 7-9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

신만교 목사

화평성결교회 [의정부시] http://whttp://www.hpehc.org

 

(렘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지난 주일에는 북이스라엘 왕국, 아합왕 시대에 예언 활동을 하던 엘리야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남유다 요시야 왕 때 소명을 받아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예언 활동을 하던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솔로몬 왕, 아들 대에 가서 남북으로 갈라져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로 양분돼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운명이 거의 기울어지기 직전 때였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고 귀족들은 살해되었으며, 백성들은 3차례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왜 선민의 나라 유다가 이렇게 망하게 되었는가?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신앙적인 부패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공공연히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나라의 우상을 행음하듯 섬겼습니다. 나라에 공의가 사라지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미 우상 숭배로 인하여 멸망하였지만 아무런 교훈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교훈을 애써 지우려고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외치고 다녔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우리의 심판의 몽둥이로 쓰실 것이다.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산다. 여호와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이 있다.”

 

이때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레미야는 왕과 백성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백성들은 되레 예레미야를 ‘반역자’라고 비난했고 ‘매국노’란 오명을 뒤집어 씌어 구덩이에 집어 던졌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의 뺨을 때리며, “너만 하나님의 선지자냐”고 폭언을 일삼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쏟아지는 온갖 욕설을 듣기도 했습니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좋은 얘기도 두 번, 세 번하면 잔소리가 되는데, 계속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외치니까 아예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의 왕따가 되었고 날마다 욕을 당하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렘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애 3:14 )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 거리가 되었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로 인해 눈이 짓무르고 그의 가슴은 하얗게 타버린 재같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예레미야 애가’라는 슬픈 제목이 붙은 책이 있듯이 그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애 1: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결국 예레미야는 굳게 결심을 하였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리라고.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으리라고.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도도 하나님의 말씀 전하다가 이런 결심을 한 적이 있는가? ‘다시 전도하지 않으리라. 효과도 없고 욕만 먹는 전도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예레미야가 꼭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 전하다가 심한 핍박을 받을 때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전도를 포기하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핍박도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결심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 예레미야는 말씀 선포를 포기했다가 다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요? 본문 9절입니다.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포기가 안됩니다. 여러분,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가 안 되는 것 있지요? 예를 들어 ‘짝 사랑’ 같은 것. 예레미야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불같아서 마음속에 담아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 자꾸 뚜껑이 열리지요.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이 골수에 사무치므로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되레 기진하여 죽을 지경이 됐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마음에 불붙는 경험이 있는가? 진짜 신앙은 불의 경험입니다. 초대교회의 산실이었던 오순절에도 불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가슴을 사로잡는 뜨거운 불의 역사였습니다. 타락한 시대의 특징은 불이 없다는 점입니다. 냉냉 하고 무감각합니다. 말세 신자의 특징입니다. 이런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가슴을 불이 있는 성도가 행복한 성도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예레미야가 부럽지 않는가? 우리 마음에도 이런 불이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불붙는 마음, 골수에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전도가 포기가 안됩니다. 사도바울도 비슷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사도바울은 전도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득불’의 헬라어는 ‘아낭케’(ANATKH)인데, ‘강제로’의 뜻입니다. 전도는 ‘강제로’라도 해야 할 일입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강제로 하게 만듭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와 같은 마음, 바울과 같은 마음을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불을, 이런 은혜를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그 무엇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했는가?

 

2.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말씀이 부딪혀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쳐야할 말씀을 계속 그 마음에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랐습니다.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은 불과 같아서 마음속에 담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차고 넘쳤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컵에 물을 한 번 부어 보십시오. 다 차면 흘러넘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흘러넘칩니다. 끊임없이 공급받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입술을 통해서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불과 같아서 감추어둘 수 없습니다. 말씀은 사라지거나 증발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사도들을 위협하면서 더 이상 예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

 

(행 4:19)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전파되고 있는가? 우리 안에 가득한 말씀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가? 아니라면 말씀을 받는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도 예레미야와 같은 뜨거움이 없다면 어딘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불같은 말씀이 여러분을 통해서 선포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의 말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지상명령이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최고 최상의 명령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의 명령이므로 결코 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상관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전시(戰時)에는 즉결재판에 넘겨 사형을 당합니다. 지금은 영적인 전시입니다. 주님께서 복음 들고 돌격 앞으로 하면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 했으니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명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지상명령을 거역하고 어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겠는가?

 

전도는 하나님의 어명(御命)과 같습니다. 자고로 왕의 명령인 어명은 반드시 복종합니다. 어명을 내리면 그 누구라도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 ‘사약을 받으라!’는 어명도, ‘삼족을 멸하라’는 어명도 그대로 시행합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역하고 어찌 복 받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반대와 저항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탁된 것은 복음입니다. 전도는 ‘복음’(福音), ‘기쁜 소식’ ‘good news’를 전해주는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은 저항이 적습니다. 여러분 중에 핍박이 무서워서 전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누가 핍박을 하는가? 대개가 부끄러워서 못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바울의 고백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전도가 원어로는 ‘유앙겔리온’입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로마시대 때 전쟁에서 승리를 알리는 나팔소리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승전보를 알리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승전보 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는가?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광복의 소식, 얼마나 기쁘고 가슴 벅찬 소식인가? 복음이 바로 이런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게 됐습니다.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복음을 기쁘게 전파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무엇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외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을까?

 

3.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고 하였는가?

 

(렘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권유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권유하다’라는 말은 ‘설득하였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설득 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말씀을 선포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 사람은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면 찾으러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를 노방전도자로 만든 한 마디의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아는가?” 자식을 잃은 부모가 어찌 자식을 찾으러 길로 나가지 않겠는가?

 

전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드리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이겠는가? 잃은 자식을 찾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언젠가 손자를 잃어버린 어느 할아버지가 TV 앞에서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집안은 우리 손자 잃어버리고 풍비박산이 되었고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인들 중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은 수 십 년을 아버지와 같이 살았어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동생을 찾아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어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새가족을 뵈도 반갑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런 교인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길에서도 복음을 외칩니다. 눈먼 장님이 낭떠러지 절벽으로 가고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기차 네루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기차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 위급한 지경에 소리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복음 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무엇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외치지 않을 수 없게 했을까?

 

4.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가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면, 아버지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도들에게 가장 요청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앓이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경제적 문제보다 잃어버린 영혼의 문제입니다. 전도는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영혼의 위험성 때문에 전도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보다 더 소중한 영혼이 죄로 인하여 멸망을 받게 될 심각성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영혼의 실상을 보는가? 당신의 마음에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가 있는가? 사도바울의 동족의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를 보십시오.

 

(롬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전도자가 전도지를 건네면서 “당신은 영혼이 돌아갈 곳을 준비 하였나요?” 물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지만 그때 이후로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영혼! 영혼! 영혼이 돌아갈 곳!’ 이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는 영혼이 돌아갈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드디어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영혼을 맡아줄 분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보며 전도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사명감과 뜨거운 구령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내 주변의 불신 영혼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런 영혼에게 구원의 복음을 들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의 불신 부모와 사랑하는 자녀들을 영원한 지옥에서 건지려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정상적인 신앙인인가? 진짜 불타는 지옥을 믿는가?

 

어떤 권사님이 4아들 앞에서 임종을 하는데 세 아들에게는 ‘Good Night!’ 하고 유독 넷째 아들에게만 ‘Good Bye!’ 라고 인사를 하였답니다. 여러분, 전도가 천사가 흠모할 직분인 것을 아는가? 전도는 천사에게도 맡기지 않은 특권입니다. 전도가 왜 특권인가? 빛이 한 생명 안에 들어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을 보는 일, 즉 한 영혼이 사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을 보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전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맛 볼 수 있는 최대의 감격 중의 감격입니다.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 어떤 도전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귀한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그 영혼을 품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결코 미루지 마십시오. 바로 다음주일입니다. 담대히 복음을 전하십시오. 성령께 그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를 구하십시오. “보라 지금이 그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그의 구원의 날이로다”

 

셀교회의 아버지 랄프 네이버 목사가 이런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간호사였는데, 아내를 통해 한 의사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랄프는 이 사람을 어떻게 주님께 인도할까 늘 생각을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렇지. 성경책을 사서 생일날 주면서 성경공부를 함께 하자고 해야지.” 그래서 성경책을 사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때 마침 아내가 임신을 했고 해산할 때까지 그 의사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그 의사와 야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령께서 랄프의 마음에 복음과 영생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야구이야기가 안 끝났기에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랄프는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를 위해 영국에 갔다 3주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침대에서 그의 아내가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여보, 왜 울어요” “그 의사가 죽었어요.” “아니 어쩌다가?” 수상스키를 타다가 떨어졌는데 다른 보트가 그 사람을 지나가서 몸이 잘라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랄프의 선반 위에는 성경책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 의사의 장례를 랄프 목사가 집례 하였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그 집에 가서 가정부의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그 의사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언젠가 그가 당신과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는 놀랐습니다. 그날 밤 성령께서 내가 이미 저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말하라 했는데 그는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랄프는 자신의 생애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하며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다음주일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천하보다 더 소중한 영혼을 구시고자 하십니다.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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