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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장 22-27절(바울의 선교계획과 구제) - 이건기

by Preacher 202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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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5장 22-27

바울의 선교계획과 구제

이건기 목사 2017-05-28

다운교회 http://www.downchurch.org/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를 말했다. 복음의 제사장 직분으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또 이방인 전도사역과, 정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고 했다. 계속해서 앞으로 선교계획에 대하여 말했다. 자신이 여행할 행선지를 밝히면서, 그 여행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22-32).

 

1. 로마 방문 계획(22-23).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에 가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비전을 주었다. 바울은 명령을 받으면, 즉시 행동하는 사람이다. 행동파 사람이기에, 받으면 바로 옮기려 했는데, 여러 번 막혔다. 우리도 주의 일을 하려 하는데, 선교가려고 하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 결혼하고, 취직하려고 하는데, 그 길이 막힐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막힐 수 있다. 그럴 때 주님이 막힌 길을 풀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사역이다. 하나님은 항상 시간과 때를 가지고, 우리를 훈련시킨다.

 

비전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주는 시간과 때에 움직임은, 더 중요하다. 섣불리 판단하고 움직이면, 문제가 커진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손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성급히 하갈을 통해, 애를 낳았지만, 사라를 통해 나오는 자손이어야 했고, 그래서 이삭의 자손과, 이스마엘 족속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전쟁하고 있다.

 

내 생각대로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 계획을,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바울이 로마교회 방문계획을 연기한 것은, 그의 선교정책 때문이었다. 바울은 순서상, 먼 지역 로마보다, 가까운 지역부터 먼저, 전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가까운 지역을 전도할 때까지, 로마교회 방문을 연기해야 했다. 그러나 가까운 지역에, 복음전하는 일을 마쳤다. 따라서 로마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후에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이제 로마교회를 방문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3가지 이유가 있다.

 

①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23上)고 했다. 바울은 지중해 동부, 선교사역을 완수했다. 그러면 이 지역에 사는 사람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나? 아니다. 사실 이 지역에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바울의 사명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다. 로마 도로를 따라, 중요한 전략적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고, 그 후에 그 지역은, 교회 장로들과, 성도들에게 맡겼다. 이 지역에 교회를 설립했기에, 먼 로마교회로 가기를 원했다.

 

②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파니아, 스페인)로 갈 때에, 로마를 방문하기 원했다’(23下). (1:11上)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바울은 간절히, 로마교회 성도들을 보기 원했다. 이방인의 사도였기에,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은 후에, 그곳을 방문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강렬한 소원은, 바울의 소원이라기보다는, 그의 안에 계신 성령님의 소원이었다. 성령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믿음이 굳건하기 원한다는, 비전을 주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은, 성취될 필요가 있었다.

 

③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23下). 로마교회 방문을, 원함은 그 당시 땅 끝으로 생각했던 ‘스페인전도 사역의, 디딤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교회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보내주다’(프로펨포)는 교회가 “선교사들을 선교지로, 파송하는 일”을 말한다. 바울의 계획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스페인의 선교사로, 파송해주기를 원했다. 보내주다(프로펨포)는 “어떤 사람의 여행을 위해, 음식, 돈, 동행자, 여행 도구 등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사도행전에서는, 선교사역에 필요한 설비와, 재정을 공급하고, 그의 여행길을 동행하거나, 안내할 사람을 구해 주는 일을 의미한다(행20:38, 21:5). 이러한 이유로, 로마를 방문하기 원했다.

 

2. 구제할 문제로,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25-26).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바울은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는, 무엇을 하러 가라고 했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섬기러 가라는 것이었다. 이방인 교회들이,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 구제를 ‘성도를 섬기는 일’(코이노이아) 했다. ‘섬기는 일’(디아코니아)은 ‘집사, 종’(디아코노스)과 어원이 같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 종이 아니지만, 종과 같이 섬기는 일을 말한다.

 

바울은 가난한, 유대의 기독교인들을 구제하는 일을,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루살렘 지역 기독교인들은, 매우 가난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 (행11:28-)에 선지자 아가보가, 예루살렘 교회에 대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 그때 구제헌금을 걷어, 큰 흉년(대기근)으로 인해, 경제적인 곤경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시작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얼마를 기쁘게 연보했다.’고 했다(26). 이 헌금은 마게도냐 성도들에 의해, 주도되어, 사도를 도왔다.

 

(고후9:1-2)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그리스는 아가야 지역과, 마게도냐 지역으로 나뉜다. 아가야 지역은, 그리스 본토 남쪽으로 아덴, 스파르타, 고린도도 포함된다.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쪽 지역을 말한다. 베뢰아 빌립보, 데살로니가 포함된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가서, 아가야 성도들이 이미 1년 전부터, 구제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그의 말을 듣고서, 열심히 구제사역에 참여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기쁘게 연보’했다.

 

‘연보’(코이노니아)는 원래 ‘동료의식, 상호교류, 자선, 참석, 교통, 교제, 분배, 우정’이다. 바울은 성도들의 연보를 ‘동료의식, 공동의 교제’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교회 성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들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도 “자기 재산을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4:32)고 기록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가족과 나라를 초월해서, 경제적으로 하나 되어 있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은, 이러한 연보(코이노니아)에 ‘기쁘게’ 참여했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가난 중에도, 기쁜 마음으로 헌금에 동참했다. 그들은 편안하고, 풍부한 속에서, 구제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환난의 많은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사정을, 정말 잘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려운 중에서도, 어려움을 만난 성도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구제사역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가야 성도들은, 약간 사정이 달랐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헌금에 동참했지만, 도중에 지연되었다.

 

하나님의 일 보다, 자신의 일에 우선권을 두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후에, 이 소식을 듣고, 아가야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구제사역을 지체하지 않도록 부탁했다(고전16:1-4, 고후9:1-5). 비록 아가야 교회의 구제사역이 약간 지체됐지만, 구제사역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구제사역에는, 바울도 큰 역할을 했다. 바울은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 헌금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롬15:25-, 고전16:1-, 고후8-9장).

 

이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고린도에서 로마를 지나서, 바로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다. 예루살렘을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을 선택했으며, 무려 3,000km이상을 더 여행해야 했다. 참으로 힘들고 위험한 길이지만, 이러한 수고에 기쁨으로 참여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3. 구제를 기쁘게 한 이유(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구제를 기쁘게 한 이유는, 빚을 갚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 빚을 갚는 것이다. 영적인 섬김을 받고, 육적으로 갚는 것, 이것이 섬김의 방법이다. 우리는 모두 빚 진자다. 부모님, 전도자, 그들의 도움으로 내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빚 진자다. 이방인 성도들은 어려운 중에, 기쁨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 우리도 남을 도울 때, 기뻐하며 도와야 한다. 억지로 하면 안 된다. 기쁘게 할 때, 하나님이 받으신다. 그때 차고 넘치게 해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으로 하고, 이러한 일로 인해서, 자랑할 필요는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빚을 졌는데, 빚을 갚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도들로부터, 영적인 빚(복음)을 졌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이방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자를 파송하고, 여러 가지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희생으로, 이방인들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들이 어려움을 만난 예루살렘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은, 영적인 빚을 갚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방인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그들을 경제적으로 도운 것에 대해서, 자만할 필요는 없었다.

 

이방인 교회 성도들이 보낸 헌금은, 그들이 받은 영적인 빚에 대한, 겸손한 보답이었다. 그러므로 구제에 참여한 성도들에게,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않도록, 권면을 했다. 구제를 하면서 생색내거나, 우쭐해하는 일은,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돕는 일은 ‘공동재산’을 나누는 것이며, 자신이 진 빚을, 갚는 일이다. 우리 주님 앞에 은혜와 사랑을, 거저 받았는가? 아니면 돈을 주고받았나? 우리는 거저 받았다. 우리가 선할 때 받았는가? 아니면 아직 죄인이었을 때 받았나? 준비되지 않았을 때, 거저 받았다.

 

내가 무엇을 해서 받았으면, 어떤 대가로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은 선물로 주셨다. 따라서 거저 받았으니, 기쁨으로 거저 주어야한다. 내 것으로 생각하면, 나눌 수 없지만, 하나님이 거저 준 것이기에, 공짜로 받았기에,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거저 받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엄청난 값을 치렀다. 거저 받았기에, 값어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다. 그러나 엄청난 값을 대신 치룬,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 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다. 이를 깨달았기에, 빚졌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것을 나누려고 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누군가에게 빚 진 것이다. 어떤 분이 복음을 전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빚을, 갚아야 한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빚을 갚는 삶을 살라 한다. (갈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힘든 자들에게는, 도와줄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멋진 인생이다. 빚진 사람은, 갚아야 된다. 우리 다운교회 성도들은,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은혜롭게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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