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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룻기

룻 1장 1-5절(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 안효관

by Preacher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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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장 1-5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안효관 목사 2021-01-17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이솝 우화에 우리가 잘 아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굶주린 여우가 포도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포도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지만, 여우는 그 밭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갈 구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구멍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멍이 너무 작아 당장 들어갈 수 없고, 2-3일을 굶으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우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포도에 침을 흘린 나머지 억지로 3일 동안을 굶어서 몸뚱이가 가늘어진 다음에 포도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간신히 포도밭에 들어간 여우는 맛있는 포도를 실컷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여우는 들어갔던 하나 밖에 없는 구멍으로 나오려니 너무 배가 불러서 그 구멍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배는 불렀으나 울타리 속에 갇히게 된 여우는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포도원을 빠져나올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들어올 때와 같이 가느다란 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탐스러운 포도를 옆에 두고도 먹을 수 없는 괴로움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지만, 다시 3일을 굶고 전과 같이 허기진 몸으로 가늘게 해서 포도밭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첫 번째로 이솝 우화에 여우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우를 영특한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영특한 동물인 여우가 이솝 우화에서는 종종 어리석은 짓을 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때때로 어리석음을 범하고 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포도밭에 들어간 여우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아무리 욕심을 부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에는 우리 손에 아무 것도 없는 모습 그대로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움켜쥐었다고 하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움켜쥔 그것들이 어느새 내 손에서 다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돈을 벌기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하지만,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 하면 가족들은 내게서 한없이 멀어져 있습니다. 무언가 내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는데 때론 그 노력이 부질없는 짓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곤경에 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공이 그렇고, 출세가 그렇고, 우리가 그렇게도 갈망하는 부가 그렇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재물에 대한 욕심에 엄청나게 끌어 모으려 하지만, 결국에는 빈손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지난 해 10월 우리나라 최고 갑부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죽고 난 다음 항간에 이런 유머가 떠돌았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나 저승에 가자 먼저 세상을 떠난 정주영 회장이 마중 나와 아는 체를 하며 ‘여보게 돈 5천 원만 꿔주게나?’라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돈 한 푼도 없는데요.’ 그때 정주영 회장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네도 빈손으로 왔는가? 나도 빈손으로 왔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무척이나 아등바등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게으름을 피우며 인생을 대충대충 사는 것보다 그렇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더 좋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고 그것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느 순간엔가 나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나는 빈털터리가 되고 마는 순간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포도밭에 들어간 여우가 눈앞에 있는 달콤한 포도에 취해 마음껏 먹어보지만, 포도원을 나설 때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 참 인생을 힘들게 살았던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살던 시대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알려줍니다. 여러분,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가 어떤 때입니까? 사사시대라고 하면 우리의 머리에 어떤 이미지가 그려집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사기 2:10절에 그 상황을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조차 알지 못한 세대가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거짓된 우상을 섬겼고,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듯이 그 시대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사사기 17:6, 21:25) 어쩌면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씀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과 더불어 가장 암울한 시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농사를 지어놓아도 이방 민족들이 와서 다 빼앗아 가버렸기에 늘 마음 졸이며 농사를 지어야 했고, 마음껏 먹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기근으로 인해 흉년까지 들었으니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사사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는지를 오늘 본문은 재미있는 방법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가족이 살던 곳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뜻은 ‘떡집’입니다. 떡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먼 이국 땅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마지막 곡식이 남아 있는 곳이 떡집입니다. 사람들이 마지막 남아 있는 곡식으로 먹을 것을 만드는 장소가 떡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큰 흉년이 들었는지 떡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먹을 양식인 떡을 찾아서 떡집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에서 당시 그들의 모습을 아주 회화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떡집을 떠난 가족의 가장이 엘리멜렉이라고 소개합니다. 엘리멜렉이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엘리멜렉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가 그에게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을 가진 그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어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단순히 정치적인 통치자인 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없었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부모는 그 아들의 이름을 엘리멜렉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살아야 할 엘리멜렉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데, 엘리멜렉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떠나 곡식이 풍부하게 난다는 모압이란 나라로 이사를 가버린 것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이 가장 비신앙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를 간 모압 땅에서도 그 가족에게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모압 땅에 거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 남은 가족은 어머니와 두 아들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남은 두 아들도 그 땅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결혼을 했는데, 그 아들들마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두 아들이 자식도 낳지 못하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이유가 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말론이라는 이름은 ‘병약하다, 쇠약하다’는 뜻입니다. 기룐이라는 이름 역시 ‘수척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환자, 비쩍 마른 놈’ 그렇게 짓고 싶었겠습니까? 어쩌면 두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허약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허약한 두 아들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두 아들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얼마 동안이나 결혼생활을 했는지 모르지만, 두 아들 모두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마저 낯선 이방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모압 땅에 산지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흉년에 먹을 것을 찾아 나선다고 낯선 이방 땅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가장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울타리가 사라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슬프고 힘든 일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는 사이 장성한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을 함으로서 그 가정에 잠시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이내 근심으로 바뀌고 맙니다. 결혼한 아들들에게 자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야 결혼을 하고서도 일부러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s족)이 있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했고, 반면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은 저주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깊었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여간 큰 근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에게는 아들 둘이 결혼을 했는데 둘 다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에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한 두 아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두 아들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와 두 며느리뿐입니다. 참으로 기고한 삶입니다. 그 중심에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모압 땅에 이사를 왔고,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남편을 잃어야 했습니다. 허약한 모습이던 두 아들이 결혼을 하긴 했지만 자녀가 없어 애를 태우다가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즐거움, 기쁨, 아름다움’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인생이 되어야 할 나오미에게 기쁨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 나오미에게 기쁨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절은 이렇게 한 단락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나오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앞서 3절에서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나았습니다. 비록 의지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의지할 두 아들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두 아들마저 떠나고 나오미만 남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두 며느리가 남아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남자가 없는 가정은 울타리가 없는 가정과 같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버팀목이 되어줄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남편에 이어 두 아들까지 세상을 떠난 후에 뒤에 남은 나오미는 그저 홀로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해줄 이 하나도 없는 존재로 남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정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이 가정이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원인은 떡집을 떠났다는데 있습니다. 이 가족이 고통을 겪게 된 첫 번째 이유는 고향인 베들레헴을 떠난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도 종종 나오미의 가정처럼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를 떠나 이동하면 더 좋은 환경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면 좀 더 자유롭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모 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농촌보다는 도시로 가면 그래도 먹고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방보다는 대도시의 삶이 더 멋지고 화려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삶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방대학보다는 인서울 대학에 들어가야 취업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수도권대학에 가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공부하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고통과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인생에 큰 경험이 되기도 하고, 그런 도전을 통해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살면서 결코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결코 떠나서는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믿음으로 산다고 내게 복이 오진 않아!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 오히려 손해만 볼 뿐이야!’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가 때로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 할 때 성공의 때가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려 할 때 세상이라는 큰 벽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핑계를 대고 아예 믿음의 방식,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믿음을 따라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품을 떠나버립니다. 내가 욕망하고 내가 꿈꾸는 것을 이루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20세기 최고의 영성신학자인 헨리 나누웬은 그의 책 『탕자의 귀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멀리 달아날수록 ‘사랑하는 아이야’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기는 더 어려워지고, 음성을 듣기 힘들어질수록 세상의 교묘한 술수나 파워 게임에 말려들기 쉽습니다... 안전한 집에 있다는 확신이 옅어지면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아 보이는 이들에게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합니다. 호감을 얻고, 성공하고,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실패하면 이미 그런 위치에 오른 이들을 질투하거나 원망합니다. 요행히 성공하면 이번에는 남들이 샘내거나 해코지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의심이 많아지고, 방어적이 되며, 간절히 소망하는 걸 얻지 못하거나 이미 가진 걸 다 놓치게 될까 노심초사합니다.”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는 말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우리를 향해 ‘사랑하는 아이야!’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서 나옵니다. 내가 가진 힘이 다 빠졌을 때 다시 일어나 뛰어갈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떠날 때, 하나님의 품에서 점점 멀어질 때 우리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식을 더 따라가려 하고,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다가 상처를 입기도 하고, 원망과 분노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늘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금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것을 다 잃고 홀로 남은 나오미에게 희망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다시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실패의 자리, 고통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이야기가 룻기입니다. 그 과정에 하나님께서는 룻이라는 딸보다도 더 귀한 며느리를 동행하게 하셨고, 아들보다 더 든든한 보아스라는 청년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다윗 왕의 조상이 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고 홀로 있던 나오미이지만,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삶을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한 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는 말씀은 참 가슴 아픈 표현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면서 가졌던 두려움, 낯선 땅에서 사랑하고 의지했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아들이나 하나하나 자신의 곁을 떠났을 느꼈을 절망과 통곡, 그 모든 것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 때 나오미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절규했을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남겨졌다.’는 말 한 마디로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만 홀로 남겨진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가족이 내 곁을 떠나기도 하고, 때로는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등 돌리고,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지기도 합니다. 나만 홀로 남겨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 때가 우리에겐 기회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나오미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우리 곁을 떠났을지라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반겨 맞으시기 위해 두 팔을 벌리시고 그 자리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큰 부자 할머니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손녀의 손을 잡고 시내에 나갔습니다. 할머니를 보고 불쌍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마를 주고 가는데, 또 다른 이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에도 돈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할머니는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함께 갔던 손녀가 말합니다.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할머니는 손녀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을 흉보던 말도 다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란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만 남아 있으면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 홀로 남겨진 자리, 그 자리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자리입니다. 예수님만이 내게 남아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다 사라졌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돌아갈 아버지의 품,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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