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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룻기

룻 4장 11-22절(모든 일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 피영민

by Preacher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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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4장 11-22

모든 일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피영민 목사 2016.12.25.

http://revpee.kjbc.or.kr/

 

서론

 

룻기의 기록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3,200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해 둔 아주 오래된 책입니다. 그러나 룻기의 내용과 신약성경의 내용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룻기는 구속자를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고, 신약성경은 구속자를 실체로써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와 신약성경은 그림자와 실체이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상 동일한 부분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은 “구약성경 안에 신약성경이 숨어 있고,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이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룻기의 내용 속에 신약의 진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룻기를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택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하나도 우연한 일이 없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세상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결코 대단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유명한 철학자, 왕, 정치가, 재벌, 장군 등이 아닙니다. 룻기는 지극히 평범함 사람들의 일상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사를 짓고, 밥 먹고 살고 죽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목적을 갖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오미, 룻, 보아스 등 모두 하나님이 위대한 목적을 갖고 사용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도 곤란, 어려움, 절망, 고통, 슬픔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해서 내 남편을 데려가시고 두 아들마저 데려가시느냐?”는 원망 섞인 질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나오미, 룻, 보아스가 겪었던 삶의 애환들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슬픔, 곤란, 좌절, 절망, 외로움, 고통 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룻기 주인공들의 평범한 일상사 가운데 큰 목적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가정에 대한 목적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룻은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삭줍기를 통해 겨우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룻을 보아스에게 연결시켜 주고 결혼하게 하셔서 오벳을 낳아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시는 인류 전체를 향한 위대한 목적을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룻기 마지막 4장의 내용은 족보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여기 기록된 족보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룻기라는 책의 중요성이 현저히 높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족보는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 1장의 족보와 그대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과 내용이 연결되어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5~6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 왕으로부터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었음을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범한 모압 여인인 룻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아스, 나오미, 룻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탄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3,200년 전부터 준비하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목적을 이루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룻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택한 백성의 모든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삶 어떤 작은 사건이라도 배후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길을 걷다가 넘어져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전봇대에 부딪혀 머리에 혹이 생겼어도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점심에 떡국을 먹은 것도, 짜장면을 먹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믿는 것이 성도의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삶의 모든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살펴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다 깨닫지 못하더라도 영원한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목적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성도의 위대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Ⅱ. 하나님의 목적은 택자들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도록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택한 백성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살게 하여 복을 받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룻기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다 잘 될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은 허무와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는 삶은 혼란스러운 삶의 연속에 불과합니다. 죽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룻기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영원한 멸망을 초래할 뿐입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 구속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택자들의 평범한 일상사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구속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룻이 누구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까? 보아스입니다. 그래서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라기보다 기업 무른 자인 보아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오실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를 만나기 전 룻의 인생은 참으로 슬프고 고달프고 비참했습니다. 모압 지방 시골에서 이방여인으로 태어나 자기 동네 남자에게 시집도 못 가고 외국에서 이주해 온 이방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게 되었습니다. 고달프고 슬프고 배고프고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이 보아스를 만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보아스의 사랑을 받은 룻은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룻의 일상사에 관여하신 목적은 보아스를 만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룻기 1장과 마지막 부분을 보면 획기적인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기근으로 시작되어 부요로 끝나고, 죽는 이야기로 시작되어 아기가 탄생하는 이야기로 끝나고 있으며, 외로움에서 사랑, 슬픔에서 기쁨, 절망에서 희망, 모압 지방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오직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보아스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일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조상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예표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고통과 슬픔, 기근과 어려움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소개 받고 구원이라는 위대한 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이생에서 복이 되고 내세에서도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일상사에 개입하시고 관여하시는 목적은 결국 예수님을 만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현세의 복을 많이 받고 누리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됩니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사망한 사람이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고, 죄로 인해 슬픔이 가득 찬 사람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고, 죄로 인해 심판 받을 사람이 심판이 면제되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되고,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영원한 소망을 얻게 되고,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 천국의 영원한 평안을 누리게 되고, 악령을 모시고 살던 사람이 성령을 모시고 살게 되는 엄청난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이도 이런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천국에 가신 허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놀라운 변화들을 경험한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하고 있는 우리도 이 사실의 산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 받아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증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의 궁극적인 해결자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의 일상사 배후에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어 그 분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인생, 예수님과 관계없는 인생은 한 마디로 말해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사십니까?” 그러면 “장가가려고 삽니다” 그러면 다시 “장가가서 뭐 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아이를 낳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낳아서 뭐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아이와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이를 잘 기를 수 있습니까?” 그러면 “돈을 잘 벌어서 기릅니다” 그러면 “돈 벌어서 뭐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잘 먹고 잘 살려고 아등바등하다가 늙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아무 관계없는 인생은 목적 없는 인생이고, 의미 없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망이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실패자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능한 분이 아니십니다. 계획하신 바를 완벽하게 이루시는 절대주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성탄절만 되면 온 세상에 평화가 임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습니다. 아무에게나 평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지 정치적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정치적인 평화를 누리던 시대가 있었습니까? 마지막 날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전쟁과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정치적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러 오신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목적은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자격 없고 공로 없고 또 예상치 못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자격이 없는데도 주시는 것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 이방 여인,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외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룻이 어떻게 오벳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이방 여인인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노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룻이 이런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살았다면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아무 자격 없고 공로도 없지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하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자격 있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급료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은 월급이지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줘야 할 것은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주지 않아도 상관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신약시대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확산될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대한민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복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자고로 나라가 잘 되려면 종교들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깨끗한 종교가 많아져야 나라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해방신학, 민중신학과 같은 공산주의적 이념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목회자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성경적인 목회자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룻이 은혜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룻은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이렇게 자격 없는 이방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때 성문에 앉아 있던 장로 10명이 보아스를 축복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4장 12절에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레스의 집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너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엘, 둘째가 오난, 셋째가 셀라입니다. 셀라는 늦둥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인 엘과 둘째 아들인 오난이 결혼을 하고도 아들을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자녀를 낳지 않으려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아들을 낳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로부터 메시아가 나와야 하는데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자 엘과 오난을 죽이셨습니다. 늦둥이 아들 셀라 하나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엘의 아내가 다말이라는 이방여인이었는데, 유다가 다말을 셀라에게 주지 않는 것입니다. 계대결혼시키지 않고 다말을 친정집으로 보내버립니다. 하나 남은 아들 셀라마저 잃게 될 것이 두려워 다말을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덧 양털 깎는 철이 되어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친정 동네인 딤나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곳에 가서 바람을 핀 것입니다. 딤나에 갔는데 동네에 창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여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창녀와 동침한 후 화대로 지팡이와 끈과 도장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딤나의 창녀는 유다가 친정집으로 돌려보낸 며느리 다말이었던 것입니다. 다말은 지혜롭게 돈을 받지 않고 징표를 달라하여 유다의 지팡이와 끈과 도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잉태했다는 소문이 퍼져 불에 태워져 죽임 당할 순간이 왔을 때,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받은 징표들을 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창 38:25).

 

유다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며느리 다말이 잉태하게 된 것을 알고 “네가 나보다 의롭도다”라고 말하며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첫째가 ‘깨뜨리고 나왔다’는 뜻의 ‘베레스’이고, 둘째가 팔에 빨간 줄을 묶고 나왔다고 해서 ‘빨간 줄’이라는 뜻의 ‘세라’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유다의 아들 중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사람이 바로 이방 여인 다말이 낳은 ‘베레스’입니다.

 

10명의 장로들은 보아스를 축복하며 “베레스의 집안과 같이 되어라”, 또 룻에게 “예수님의 조상이 된 다말과 같은 여인이 되어라”고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방 여인들이 여러 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과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런 여인들은 자격 없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전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속함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 확산될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받게 됩니다. 모압 여인 룻이 이렇게 큰 은혜를 받게 되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방 여인 룻이 예수님의 조상이 될 것을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예상치 못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아들이 여럿이라도 장남이 물질의 복을 다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종종 예상치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인은 아담의 장남이었지만 복을 받지 못하고 차남인 아벨이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은 이스마엘인데, 이도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태어난 이삭이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인 르우벤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서모를 겁탈한 죄질이 악한 자였습니다. 그 대신 넷째 아들인 유다가 그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들은 그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현세의 복, 내세의 복을 다 받고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택하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자격 없고, 무가치하고, 예상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택하셔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룻은 예상치 못한 복을 받았고, 나오미도 예상치 못한 큰 복을 받았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살다가 10년 만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나오미를 향해 “네가 정말 나오미가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민 갈 때 그렇게 예뻤던 나오미의 몰골이 상해 있었기에 그 때 그 나오미가 맞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도 그녀가 정말 그 나오미가 맞는지 확인해야 했을 정도로 나오미는 피골이 상접해진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나오미 역시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큰 복을 받게 되자, 룻기 4장 14~15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여인들은 손자 오벳을 안고 있는 나오미를 보고 감격했습니다. 나오미는 노년에 큰 어려움 중에 있었지만 일곱 아들보다 나은 며느리 룻으로 말미암아 물질의 복도 받고, 자손의 복도 받고,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집안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복이 풍성해 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결론

 

룻기는 보아스와 룻의 관계를 통해 간단히 네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단계는 보아스를 모르는 룻(1장)입니다. 2단계는 보아스를 소개받은 룻(2장)입니다. 3단계는 보아스에게 청혼한 룻(3장)이고, 마지막 4단계는 보아스와 결혼해서 행복을 누리는 룻(4장)입니다.

 

룻은 인간의 예표고, 보아스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2016년 성탄절을 맞이해서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룻기의 네 단계 중 몇 번째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인가?”입니다. 당신의 소속은 룻기 몇 장입니까? 1,2장에 소속된 분들은 모두 3,4장으로 나아가서 현세의 복, 내세의 복, 구약의 복, 신약의 복, 건강의 복, 물질의 복, 영생의 복, 부활의 복을 다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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