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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룻기

룻 2장 11-13절(축복의 서광이 비칠 때) - 피영민

by Preacher 2023.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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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장 11-13

축복의 서광이 비칠 때

피영민 목사 2016.11.20.

http://revpee.kjbc.or.kr/

 

서론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축복의 서광이 비췰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가끔 밤잠을 잘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고민이 있거나 억울한 문제가 있거나 분노가 일어날 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이죠. 그러면 밤이 아주 길게 느껴지고 새벽이 기다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동쪽에 서광이 비춰오고, 곧 해가 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와 함께 이렇게 인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태양은 떠오르고 좋은 하루! 좋은 아침!” 물론 지금은 이렇게 인사하지 않지만, 부부가 아침에 인사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이 트기 전 동쪽 하늘을 보면 어떻습니까? 빛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빛의 징조를 ‘서광’(Aurora)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윽고 태양이 떠오르면 밝은 아침이 됩니다.

 

룻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나오미와 룻의 삶은 어두운 밤과 같습니다. 유다 땅에 기근이 들어 나오미의 가족은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지만, 남편을 잃고 두 아들도 잃어 세 과부 밖에 남지 않은 비참한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어머니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네 어미에게로 돌아가라”고 권면했을 때, 오르바는 모압 지방에 그대로 남았고, 룻만 나오미를 따라 유다 땅으로 역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유다 땅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나오미와 룻은 생계를 유지할 방편도 없었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고, 먹을 곡식도 없고, 돈도 없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룻기 2장에 오면서 서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환한 대낮이 된 것은 아니지만 동이 틀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을 ‘축복의 서광이 비췰 때’라고 지어보았습니다. 룻기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돌보시고 복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룻기를 읽으며 주목해야 할 부분은 룻이 복을 받은 것을 통해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복 주시는가”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대책이 없는 나오미와 룻의 삶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려 복을 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며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룻기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진리이며,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수단을 통해 두 여인을 돌보시고 축복의 서광을 비춰 주셨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은 말씀을 존중하는 제도를 통해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 분의 말씀을 존중하는 제도와 문화를 통해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오미와 룻은 생존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는 것입니다. ‘이삭줍기’(Gleaning)는 육체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계속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이삭을 부지런히 주워야 합니다. 허리를 다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주워 재물을 모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굶어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삭줍기제도였습니다.

 

이삭줍기제도는 이방국가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레위기 19장 9~10절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도원이나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 주인들에게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추수할 때에 곡식 떨어진 것까지 주워 거두지 말라신 것입니다. 추수하다 떨어진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두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객이나 과부, 고아가 와서 이삭줍기를 통해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또 신명기 24장 19~23절에도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줍기 제도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농부가 곡식을 거두다가 추수단 몇 개를 잊어버리고 온 경우, 그것을 다시 찾으러 가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먹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무에서 열매를 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따뜻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부자도 복을 주시지만 가난한 사람도 먹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의 삶도 고려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이 범사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할 때가 있었습니다. 너희도 그렇게 어려울 때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가 죽지 않고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땅의 제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참으로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나라임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은 비교적 제도가 잘 정비된 나라입니다. 제도와 법이 좋은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1945년 해방 이후 독일의 법을 기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법은 다행스럽게도 이슬람교나 유교, 혹은 유대교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여 만든 법이었습니다. 독일은 개혁교, 루터교 등의 개신교가 꽃피운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존중하는 제도와 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은 독일의 법을 토대로 헌법을 제정하였기에 하나님의 법과 원리를 반영하는 문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일을 쉬는 문화, 부모를 공경하는 문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문화, 살인이나 절도를 방지하는 경찰제도 등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문화가 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제도들은 독일 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독일 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리와 법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저는 지금 대한민국의 국교를 기독교로 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원리는 종교의 자유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교를 믿을 수 있고, 불교를 믿을 수도 있고, 이슬람교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핍박하고 죽이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밭에는 가라지도 있고 알곡도 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가라지를 모조리 뽑아 버릴까요?”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종교도 있고, 저런 종교도 있고, 참된 종교가 있는 가하면 거짓된 종교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원리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회 아닙니까? 불자들은 절에 가고, 유교인은 제사지내고, 무당은 얼마든지 굿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국가입니다. 서로 핍박하고 죽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꼭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거나 대통령의 신앙이 좋아야 하거나 청와대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 등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통치자로서 통치만 잘 하면 됩니다. 정부와 종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정교분리입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영역이고, 신앙과 종교에 관한 일은 목회자들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종교전쟁이 있었습니다.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일입니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더 이상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지 말자는 내용의 조약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런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제도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공산주의의 법을 따르는 국가가 많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공산주의의 법이나 제도를 가진 사회라면 어떻겠습니까? 북한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이슬람을 국교로 한 사회였다면 일부다처제를 따르는 이슬람 국가처럼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고려시대처럼 불교를 국교로 한 사회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유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다면 어떤 상황이 되었겠습니까? 아마 지금처럼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이 좋은 제도와 법을 가지고 그 안에서 자유와 복을 누리며 마음껏 예배하고 선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여 복 받은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유와 복을 누리는 국가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을 존중하는 문화와 제도를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제도를 끝까지 지켜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Ⅱ. 하나님은 섭리적 활동을 통해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살아계셔서 성도들 배후에서 역사하시며, 그 삶을 인도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룻과 나오미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룻기 2장 1절에 난데없이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아스라는 인물은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의 섭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2절에 보면 룻이 이삭줍기를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누구 밭으로 가야 많은 이삭을 주울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3절에 ‘우연히’ 밭에 이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4절에 보니 ‘마침’ 보아스가 보리 추수하는 밭에 이르러 사람들을 격려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룻이 계속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사환을 불러 저 여인이 누군지 묻게 되었습니다. 사환이 “저 여자는 모압 여인인데, 남편이 죽고 유다 땅으로 이민 왔고,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삭을 줍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보아스는 사환의 설명을 듣고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10절에는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우연히’, ‘마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모든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은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룻이 어떻게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되었고, 보아스는 어떻게 룻이 일하는 시간에 밭에 갈 수 있었으며, 어떻게 룻이 보아스의 눈에 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모두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행한 일, 언어와 처신 모두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기본적으로 ‘섭리 신앙’입니다. 기독교인은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섭리하시며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로 인생을 세워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자유의지로 그런 일들이 가능했다면 저는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목사가 된 것입니다. 내가 가는 장소, 만나는 사람, 행하는 일, 경험하는 사건들 모두 하나님의 섭리가 미치고 있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들도 모두 하나님의 크신 손이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잠언 3장 6절에도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섭리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점쟁이가 알면 왜 점쟁이 노릇을 하고 있겠습니까? 미래를 알고 있다면 절대로 그 짓을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를 아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미래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섭리적인 활동을 통해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데 우리 눈에 보기 좋은 섭리도 있고, 아픈 섭리도 있습니다. 기쁨의 섭리와 고통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룻이 어떻게 유다 땅으로 올 수 있었겠습니까? 남편인 말론이 죽었기 때문에 유다 땅으로 올 수 있었고, 보아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부자였습니다. 룻에게 남편을 잃은 고통의 섭리가 있었지만, 보아스 에게 시집가서 다윗의 증조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섭리 때문입니다. 아픈 섭리가 없었다면 기쁨의 섭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아픈 섭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Ⅲ.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복을 주신다.

 

순종하는 사람 자체가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12절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모압 지방을 떠나 유다 땅으로 온 룻을 향해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개가 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성도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구덩이들로 가득합니다. 십자가 밑을 떠나면 구덩이에 빠져 뱀에 물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십자가 아래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온 룻에게 복을 주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축복할 때, 자기 자신이 룻에게 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보아스는 참된 신앙인이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친절하고 예절이 바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룻기’를 ‘보아스기’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고 주장합니다.

 

8절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내 딸’이라고 부릅니다. 보아스의 나이가 좀 많았던 것입니다.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하며 너그러운 성품을 갖고 룻을 배려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 “추수하는 소년들을 향해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젊은 여인인 룻을 특별히 보호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실제적인 사랑을 가지고 상대를 너그럽게 배려하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기회주의적이고 파렴치한 인격을 가져선 안 됩니다. 그런 인간은 상종할 가치가 없는 자들입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보아스는 연약한 룻을 보호해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은 겸손하며 감사할 줄 아는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만한 그릇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룻과 같이 복 받을 만한 큰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간장 종지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큰 그릇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복을 담을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복이 추상적으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룻의 경우는 사람 자체가 복이었습니다. 복이 사람의 형태로 온 것입니다. 그와 결혼하면 보아스가 가진 모든 재물이 룻의 것도 되는 것 아닙니까? 보아스가 신랑이 되었으니 그의 모든 소유가 룻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사람 복이 큰 복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굉장히 큰 복입니다. 저는 목회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끔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살아계실 때는 잘 몰랐지만, 가끔씩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엄청나게 큰 복입니다. 또 교회 와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 역시 큰 복입니다. 외로운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복은 사람의 형태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남에게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요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니까 풍랑을 만나 배에 탄 사람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손해가 자신에게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보아스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복이 됩니다. 보아스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복을 받으니 룻을 만나게 되었고, 룻이라는 여인에게 엄청난 복이 되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결론

 

룻은 성실한 여인이었습니다. 7절에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은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10절에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 복을 주시려면 주시고 말려면 마십시오”라는 태도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조롱하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룻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섭리 신앙을 가진 사람은 운명론자처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운명론자들에게 복 주시지 않습니다. 능동적인 자세로 일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려는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아스를 통해서 복을 주시고자 하셨을 때, 겸손하게 그 복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받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우리 친족 중에 기업 무를 자로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으니 프로포즈해 보라”고 권면했을 때, 룻은 “아닙니다”라고 하지 않고 어머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순종하여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복을 주십니다.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햇빛과 비를 주시고 공기를 주시며 먹을 것을 공급하십니다. 이것을 ‘일반 은혜’ 또는 ‘보통 은혜’(Common Grace)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더 큰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삶을 인도해 주시는 복과 영생의 복, 부활의 복, 천국의 복 등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특별 은혜’(Special Grace)입니다.

 

그러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특별 은혜를 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십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의 예표적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이것이 바로 축복의 서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구속의 대업을 이루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복을 받아 환한 대낮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복이 되어 주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에게 복이 되어 주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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