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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룻기

룻 2장 14-23절(축복의 동이 틀 때) - 피영민

by Preacher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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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장 14-23

축복의 동이 틀 때

피영민 목사 2016.12.04.

http://revpee.kjbc.or.kr/

 

서론

 

유다 땅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떠난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은 지난 10년을 살면서 큰 슬픔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집안에 세 과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슬픔 외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타향살이를 끝내고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나는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유다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여호와의 날개 아래 피하러 온 두 여인을 품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룻기 2장의 전반부는 축복의 서광이 비취기 시작한 경우에 해당하고, 후반부는 축복의 동이 트기 시작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아직 환한 대낮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서광이 비취고 동이 텄을 따름입니다.

 

축복의 서광은 룻기 2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 보아스의 등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절 후반에 ‘기업을 무를 자’로 소개되고 있는 보아스는 드디어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나오미가 보아스의 이름을 듣고 그는 우리의 근족이고,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은 벌써 축복의 동이 트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기업 무를 자’(Redeemer)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Ⅰ. 나오미와 룻에게 ‘기업 무를 자’가 필요했던 이유

 

우선 나오미와 룻은 양식이 없었습니다. 먹고 살 것이 없었습니다. ‘이삭줍기’라는 성경적인 제도를 통해 겨우 생존의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굶어죽을 염려는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14절에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떡 조각을 초에 찍어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떡을 그냥 먹으면 맛이 없는데 초에 찍어 먹으면 아주 맛이 좋습니다. 저는 1986년에 미국 유학을 가서 한 달 만에 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담임목회자를 대접하겠다고 데려간 레스토랑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맥도날드’였습니다.

 

닭고기 조각을 튀겨서 만든 치킨 너깃이라는 것을 시켜줬는데, 그것을 소스에 찍어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소스를 난생 처음 먹어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스의 이름을 물으니, ‘Sweet & Sour’라고 했습니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라는 것이죠. 닭고기 튀김조각을 소스에 찍어 먹어도 그렇게 맛있는데, 떡을 초에 찍어 먹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일품이었겠습니까? 거기다가 보아스는 볶은 곡식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곡식도 그냥 먹으면 딱딱하고 맛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볶으면 어떻습니까? 굉장히 고소하고 맛있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친절한 호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15~16절에 “롯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추수할 때 일부러 이삭을 많이 흘리라고 주문했습니다. 룻으로 많은 이삭을 주워갈 수 있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17절에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 저녁까지 주워보니 보리가 한 에바 가량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에바는 환산하면 22L나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한국식 도량형으로 보면 열 두 되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쌀 심부름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한 되를 사면 저희 온 가족이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는 양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밖에 없는 가정에 열 두 되는 수십 일을 먹을 수 있는 양이었을 것입니다. 여자 둘이 반 되도 먹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팔아서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룻과 나오미에게 큰 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루만 열심히 일해도 생활비가 나오고 반찬값을 벌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 두 되나 되는 엄청난 양의 이삭을 주워온 룻을 보고 나오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제야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구나! 우리 삶에도 축복의 동이 트게 되었구나!”

 

나오미는 룻에게 물었습니다. 19절에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라는 이름을 들은 나오미는 즉시 말을 합니다. 20절에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가 보아스를 두고 ‘기업 무를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고, 생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생활비를 얻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필요, 즉 더 깊은 필요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업 무를 자 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깊은 필요였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가지고 있는 깊은 필요는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자기 가문의 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남편 엘리멜렉에게 땅이 있었지만 이제는 팔고 없는 땅을 도로 찾아오는 일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보면 천국에 들어갈 자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깊은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 룻이 계대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게 되면 죽은 남편 말론의 이름을 근거로 대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보면 천국의 시민으로서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깊은 필요가 나오미와 룻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두 가지 깊은 필요는 아무나 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리로 채울 수 있는 필요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기업 무를 자 만이 채울 수 있는 필요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속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문제, 좋은 학교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직한 후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보면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정말로 만족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필요들만 충족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은 정부가 구성되어 좋은 대통령이 좋은 정치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면 모든 백성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착각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부로 바꿔 봐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잘 먹고 잘 살고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더 깊은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필요는 바로 영적인 필요입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닙니다. 밥만 잘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개는 어떻습니까? 밥만 주면 꼬리를 흔들며 그렇게 좋아합니다. 돼지 역시 고민이 없습니다. 밥 먹고 뒹굴면 그만입니다. 인간은 개나 돼지가 아닙니다. 저는 여태껏 돼지가 고민해 봤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돼지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를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먹고 마시는 문제만 해결되면 하등의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용서 받아야 할 필요, 양심의 평안을 얻어야 할 필요, 삶의 목적을 알아야 할 필요, 내세에 대한 필요 등과 같은 더 깊은 필요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필요들은 가시적인 세계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비가시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해결되는 영적인 필요들입니다. 돈이나 집이나 직장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필요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적인 필요가 채워져야 할 깊은 필요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런 필요들은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을 구약의 용어로 ‘기업 무를 자’라고 하고, 신약의 용어로 ‘구속자’ 또는 ‘속량자’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Redeemer’라고 합니다.

 

그러면 룻기에서 기업 무를 자는 누구입니까? 보아스입니다. 보아스가 예표하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의 깊은 영적인 필요들을 채워줄 수 있는 구속자이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청종해야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돈과 양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인 깊은 필요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해결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기업 무를 자이시고, 구속자이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다른 구속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들을 존경합니다. 그 분들은 위대한 철학자요,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나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가? 0.0000001%도 기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구속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고다마 싯다르타 역시 존경합니다. 인간의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한 그가 어찌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주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의 깊은 필요를 채우지 못합니다. 조금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마호메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Ⅱ. 나오미와 룻에게 ‘기업 무를 자’는 어떤 일을 하는 존재인가?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은 룻기 2장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서 “그는 우리의 근족이니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푸는 자라고 했습니다. 생존한 자는 차치해 놓고, 사망한 자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망한 자의 이름을 회복시켜 주고, 사망한 자의 땅을 회복시켜주는 책임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업 무를 자는 사망한 자에게까지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는 아무나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친척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보아스를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라고 했고, 근족이라고 했습니다. 친족만 기업 무를 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친족 기업 무를 자’(Kinsman Redeemer)라고 부릅니다. 아시다시피 ‘Kin’은 친족을 의미하고 남자가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Kinsman’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업 무를 자는 우선 친족이어야 하고, 남자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업을 무를 순위도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 1순위가 되고, 그 다음이 2순위가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보아스는 1순위 기업 무를 자가 아니라 2순위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순위 친족이 기업 무를 책임을 포기하면 2순위에 해당하는 사람이 기업을 무르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합니다. ‘고엘’은 아주 의미가 풍성하고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고엘은 크게 네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토지 무르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짜로 분배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너희 후손 대대로 기업을 삼고 타인에게 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도 너무 가난해 지면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땅을 팔면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었을 때, 원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땅값은 희년이 가까워 오면 떨어지고, 희년으로부터 기간이 오래될수록 땅값이 비쌌습니다.

 

그러니까 고엘은 희년이 되기 전이라도 가까운 친족이 값을 지불하여 땅을 잃은 친족에게 땅을 도로 찾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땅을 산 사람은 돈을 받고 땅을 도로 팔아야 했습니다. 토지만큼은 다시 팔지 않겠노라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토지 무르기입니다. 레위기 25장 24절에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노예된 자를 해방시킵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군가의 종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해서 사람의 종이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땅을 팔고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먹고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노예로 팔려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자기 동족을 노예로 쓸 때 안식년 7년이 되면 반드시 풀어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7년이 되기 전이라도 가까운 친척이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된 자를 해방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고엘의 역할은 노예된 자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47~48절에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부요하게 되고 그 곁에 사는 너희 동족은 빈한하게 됨으로 너희 중에 우거하는 그 이방인에게나 그 족속에게 몸이 팔렸으면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째, 계대결혼을 합니다. 계대결혼은 형이 결혼을 해서 살다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경우 동생 중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과부된 형수와 하는 결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죽은 형의 아들로 대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형의 땅도 그 아들에게 주는 것, 이것이 바로 계대결혼입니다. 계대결혼으로 형의 이름을 이어주는 자를 고엘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25장 5~10절에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 중 결혼하고자 하는 여자가 있는데, 형수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서 계대결혼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기업 무를 순위가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1순위 사람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어 수치를 당하면 책임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해서 계속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 보수합니다. 고엘은 ‘피의 복수자’라고도 불렀는데, 친척이 고의적 살인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가까운 친척이 살인자를 찾아가서 억울하게 죽은 친척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대신 복수해 주는 것입니다. 살인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경찰제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민수기 35장 19~21절에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와 같은 고엘제도가 있었습니다.

 

고엘은 잃어버린 땅을 회복시켜 주고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고 끊겨진 대를 이어주고 악인들에게 당한 어려움을 복수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보면 천국의 자리를 확보해 주고 천국의 시민이 되게 하고 마귀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억울하게 당한 핍박과 환란을 복수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고엘인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고엘은 인간의 깊은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만큼 큰 복이 없습니다. 어디서 이런 필요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상가, 정치가가 채워줍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깊은 영적인 필요는 우리의 고엘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엘은 신약의 용어로 ‘속량자’라고도 했는데, 이는 돈을 내고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은 반복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속량하셔서 구속자가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

 

구속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돈으로 갚은 것이 아니고 은이나 금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갚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는 영생할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Ⅲ. ‘기업 무를 자’는 기업을 무른 후에 어떤 존재가 되는가?

 

기업 무를 자는 계대결혼을 통해 형제의 이름이나 땅이나 신분을 회복해 주는 것으로 책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구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이제 떡에 초를 찍어 먹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것은 모두 다 네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룻은 떡이나 볶은 곡식을 얻어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아스가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무른 보아스는 이제 계속해서 룻을 돌보아 주고 자녀를 낳고 사랑하며 인격적인 교제를 갖고 살아갈 책임이 있고, 룻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아스를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닮아야 할 모범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서 홍해를 가르시는 것으로 임무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광야 생활 가운데 계속 돌보아 주고 먹을 것, 마실 것을 주고 옷도 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신발도 해지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인 사랑과 돌봄으로 자기 백성을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거하면서도 특별히 약하고 눌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돌보아주셨습니다.

 

성도들은 구속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계속 사랑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사랑을 받고 살아가기에 외롭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인 신랑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분이 우리의 신랑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해 주신 목적입니다. 구속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속한 사람의 목적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과 돌봄을 받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갈 동물이나 짐승들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깊은 영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적인 필요는 우리의 고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워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난 사람은 이 깊은 영적인 필요를 채움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큰 복은 이 구속자를 만나고 그를 믿고 의지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방황하는 인간에게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은 흑암 중의 빛이고 저주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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