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룻기

룻 3장 1-9절(기업 무를 자에게 나아가라) - 피영민

by Preacher 2023. 7. 16.
728x90
반응형

룻3장 1-9

기업 무를 자에게 나아가라

피영민 목사 2016.12.11.

http://revpee.kjbc.or.kr/

 

서론

 

교리사는 기독교 교리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문인데, 교리사의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서로 모순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구원해 주신다면 인간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실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인간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면 왜 인간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룻기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 오벳을 낳게 된 것, 다윗의 조상이 된 것, 이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 일들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주권적인 개입하심이 있습니다. 룻기는 주권자 하나님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보아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넷째 아들인 유다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후손으로 태어나셔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조상인 보아스는 유다의 후손이자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메시아를 가리켜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뿔이라고 했습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이자 다윗의 뿔이 된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신데, 보아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조건에 합당한 인물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 인구 중 절반이 남자인데, 그 가운데 룻이 성경에 예언된 인물을 만나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수천 번, 수만 번을 생각해 봐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길을 오다가다 만나 연애를 해도 우연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하물며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기 3장은 룻이 기업 무를 자인 고엘에게 먼저 나아가야 했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신 일이지만 룻 역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과 결혼은 룻이 먼저 보아스에게 적극적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룻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하나도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을 이루실지라도 인간에게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간의 책임 영역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룻이 기업 무를 자에게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절에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할 곳은 룻이 재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오미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보리타작이 진행되는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으로 하여금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라고 말했습니다. 타작마당은 일반적으로 타작할 때 겨를 날려 버려야 하기 때문에 바람이 잘 부는 곳에 있었고, 알곡을 모아둘만한 넓은 장소여야 했습니다.

 

주인은 타작마당에 모아 놓은 알곡을 지키기 위해 알곡 옆에 자리를 깔고 누워 밤을 보냈습니다. 도적이 와서 훔쳐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타작마당에서 밤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관습을 잘 알고 있던 나오미는 룻에게 오늘 밤 타작마당으로 가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가지 말고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새 옷을 입고 보아스가 누울 때 발치의 이불을 들고 들어가서 그 안에 누우라고 말했습니다.

 

행실이 정숙한 룻으로서는 이러한 시어머니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 밤중에 외간남자가 자고 있는데 그 발아래 눕는 일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가 명하시는 대로 다 지켜 행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6절에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은 시모가 시키는 대로 기업 무를 자에게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고 있는데 난데없이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오는 여인을 보고 놀라 물었습니다. 9절에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은 북한의 기쁨조들이 미인계를 이용하듯 불법한 태도로 접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지금 기업 무를 자에게 합법적인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남편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며, 당신은 기업 무를 자니 나와 결혼해서 내 남편의 이름을 이어주고 잃은 땅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합법적인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식으로 결혼을 요청하는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인 룻이 한 밤중에 외간남자인 보아스에게 나아가 프로포즈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 39~40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가장 슬픈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오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죽으면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님께 나아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고 나아가기 싫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데, 먼저 예수님을 믿어 불효를 저지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술 담배와 같은 것을 끊지 못해서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또 기독교인들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 경우 예수님께 나아가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불효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해서 천국을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더라도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술 마시고 담배 핀다고 지옥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사기를 당했을지라도 고작 그런 일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기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가 결혼해 주시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구속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영생도 받고 부활도 하고 영원히 천국에 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Ⅱ. 룻이 기업 무를 자에게 나아가는 것은 능동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룻이 계대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짝사랑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냥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여자에게 청혼하는 일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30세 된 과부에게 청혼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60대를 ‘틀딱층’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틀니를 닦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여자에게 청혼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아스의 감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네가 시어머니를 잘 봉양한 것도 인애로운 일인데, 나이 많은 내게 기업 무를 자라고 청혼한 것을 보니 그 인애가 처음보다 더 하다는 표현입니다. 젊은 남자를 좇지 않고 나이 많은 내게 시집을 오겠다고 하니 자비로운 여인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더구나 보아스는 기업 무를 책임 1순위의 사람이 아니고 2순위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보아스가 먼저 청혼을 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룻이 복을 받으려면 능동적으로 기업 무를 자에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룻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많은 문제들을 갖고 살아갑니다. 물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도와주시고, 저것도 도와주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기에게 다가오셔서 도움 주시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기만 해서는 절대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수동성을 강조하지 않고 적극적인 능동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0~31절에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면 지옥을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빌립보 간수의 질문에 사도 바울은 ‘능동적으로 믿으라!’고 대답합니다.

 

또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생이 피곤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사람은 다 구속자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속자에게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2절 후반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게 왜 돈이 없을까? 하나님께 돈을 주시도록 기도해 봤습니까? 생각보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구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고 늘 간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 모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동사들입니다. 구원과 복은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복 받는 사람들은 능동적인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에서 유학하며 목회를 했습니다. 당시 목회하던 교회에서 사례비로 1,000달러를 주셨는데, 그 중 400달러가 집세로 지불되면 사실상 한 달을 600달러로 생활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유치원 갈 때가 되어 등록금을 알아 봤더니 한 달에 500달러가 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애당초 유치원 보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저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내는 마태복음 7장 7절 말씀을 굳게 믿고 유치원 원장을 계속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상종도 않더니 몇 차례 찾아가서 만난 결과 공짜로 유치원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회자 형편이 어떤 지 충분히 알기에 사정을 봐준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끄러워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아내는 지속적으로 찾아가 아들을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저는 그 때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을주 집사님이 성경 배부하는 기드온이라는 기관에서 회장으로 섬기고 계십니다. 한 번은 유럽에 가셨다가 호텔에서 가지고 갔던 성경을 나눠주셨는데, 아내 된 권사님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면박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배부의 사명을 갖고 있던 이 집사님은 그렇게 갖고 있던 성경을 다 나눠주셨고 일정을 마쳐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려는데 승무원이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집사님 부부를 퍼스트 클래스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 배부하는 큰 일을 하는 분이시라고 집사님 권사님을 1등석으로 안내해 좋은 대접을 받으며 귀국하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법은 구속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복을 주시려면 주시고, 안 주셔도 그것으로 족합니다라고 하지 마시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서 복을 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인인 룻이 보아스에게 한 밤중에 나아가는 일은 신변의 위험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과부가 화장을 하고 새 옷을 입고 나가면 동네 총각이 보따리에 싸서 납치해 갈 위험도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한국에도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니 안정상의 위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위험도 있습니다. 만약 보아스가 룻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숙한 여자인줄 알았더니 한 밤중에 와서 늙은 남자인 내게 이런 짓을 하느냐고 박대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룻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아마 젊은 여인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속자 되신 예수님께 접근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감수해야 할 위험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일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절당할 이유도 없고 상처 입을 위험도 없습니다. 주저할 필요도 없고 수동적으로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게 되는 것입니다. 1월 첫 주 양수리 수양관 산상집회 때, 독일인 에릭 홀저펄이라는 목사님이 강사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분으로 전 세계에서 유명한 분이십니다. 목사님은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씨의 딸 이민아 목사님을 고쳐준 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동섭 협동 목사님이 통역을 맡아 수고해 주실 텐데, 우리 모두에게도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거리끼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믿고 행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큰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Ⅲ. 보아스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한 세 가지 중요한 이유

 

첫째, 보아스는 룻의 필요를 능히 채워줄 능력이 있었습니다. 룻은 죽은 남편의 이름과 땅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아서 말론의 이름이 계속 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땅을 다시 찾아올만한 돈을 가지고 있었고, 비록 나이 들었지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속자 되신 예수님은 성도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능동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능한 자에게는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 봐야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둘째, 보아스는 룻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고, 극도로 칭찬했습니다. 그러니 나오미는 룻이 청혼해도 보아스가 결코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약속했습니다. 13절에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리 여섯 되를 시모인 나오미에게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보리죽을 끓여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청혼 승낙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리를 받고 보아스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18절에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이제는 아무 할 일이 없으니 일이 성취될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과 사랑을 보장해 주십니다. 보리 여섯 되가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로마서 8장 32절에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도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무엇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들도 내어주신 분께 무엇을 주지 않으실까봐 주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자세를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능력도 있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도 하셨으며, 채워주실 충분한 호의도 갖고 계십니다.

 

셋째, 보아스는 룻의 필요를 채워줘야 할 법적인 의무도 있었습니다. 물론 기업 무를 순위에서 1순위는 아니었지만 1순위자가 포기할 경우 2순위자로서 기업을 무를 책임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순위자에게 기업 무를 기회를 준 이후 스스로 책임을 이행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줄 책임이 있으실까요?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자격이 없지만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돌보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약속대로 이행하셔야 할 의무를 갖고 계신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먼저 능동적으로 나아갔듯이 우리를 도와주실 구속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구속자에게로 먼저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의 책임 다할 것을 요구했던 것처럼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도록 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금번 특별새벽기도회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설교 중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1년 52주 매 주일 십일조 헌금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시골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께 매 주일 수입을 주셨다고 간증하셨습니다. 또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다 잘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어려서부터 코 막힌 아이들을 향해 “흥해라! 흥!”이라고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는 재밌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흥(興)해라! 잘 되거라!” 이런 말을 많이 해서 아이들이 잘 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해도 적극적인 말, 능동적인 말을 많이 하면 잘 된다는 우스갯소리였지만, 이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줄 능력이 있으시고, 의지도 있으시며, 의무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다리고만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만 해도 복이 오는 것입니다. 사기꾼을 가까이 하면 사기만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까이 하면 복을 받게 됩니다. 룻기 3장은 성도들이 주저함 없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으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장입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구속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