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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룻기

룻 4장 9-12절(이상한 결혼식 축사) - 최태선

by Preacher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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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4장 9-12

이상한 결혼식 축사

최태선 목사 2004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좌절된 꿈)

 

커다란 울음소리.함께 아이는 태어납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보통 사람대로 평균적인 수명을 누린다면 칠 팔십.후에 그 아이는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그때는 또 다른 울음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어떤 기도를 드리게 될까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기도가 흘러나올까요? 이 어린아이의 삶에 어떤 꿈을 채워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까요? 그 동안 우리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하나님께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어떤 소망을 아뢸까요?

 

제가 어떤 분의 자신의 손자를 위한 기도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과연 여러분도 이 사람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한 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 주님 이 아기가 이 땅에 태어나올 때 함께 지고 나온 치명적인 죄의 짐을 벗겨주시옵소서. 용서하고 깨끗이 씻기는 당신의 보혈의 능력으로 이 아기를 치유하시옵소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사랑을 받아 당신을 알고자 하는 꿈 이외의 모든 꿈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될 골짜기를 지나도록 인도하시옵소서. 그에게 어두운 밤을 허락하셔서, 절대적인 공허와 외로움을 느끼게 하시고, 자신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을 갈망하게 하시옵소서. 그런 순간들마다 당신을 향한 이 아이의 갈망과 이 아이를 향한 당신의 갈망을 보여주시옵소서. 이 아이가 자신의 괴로운 영혼에 응답하시지 않는 듯 보이는 당신의 사랑에 온몸을 맡기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여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더 이상의 무너진 꿈은 허락하지 마옵소서. 그럼으로써 그의 삶이 행복하고 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부수적인 것들만을 원하는 그의 뜻대로가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하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기도문을 쓴 사람은 래리 크랩이라는 유명한 작가이며, 상담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이런 기도를 드리실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부귀와 성공과 건강함과 안락함과 편안함이 아니라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어두운 골짜기에서 좌절과 낙망과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고, 그러한 자신의 괴로운 영혼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온 몸을 내어 맡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실 수 있으십니까? 위기에 처해서도 그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와 상황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나아가 그 아이가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를 상상하며 그 결혼을 위한 축복 기도를 썼습니다.

 

“오 주여, 이들에게 이혼의 고통은 허락지 마시옵소서. 신뢰와 자비로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를 그들에게 주시옵소서. 당신이 안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옵소서. 그들에게 장수를 허락하시고, 금전적인 문제에서 자유롭게 하시며, 심각한 교통사고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질병에서 자유롭게 하시옵소서. 그들이 진정한 우정이 넘치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매력적인 특권으로 여겨지는 그런 교회에 출석하게 하시옵소서.“

 

여기까지는 평범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더 깊은 기도의 말을 생각하느라 고민한 후에 기도를 이어갑니다. 인간적인 소원을 넘어 믿음으로 용기 있게 기도하기를 바란 후에 그는 기도를 이어갑니다.

 

“여전히 나의 소중한 손녀인 이 젊은 아가씨가 다른 무엇보다 당신을 더 갈망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그녀로 하여금 당신이 준 사랑으로만 가득 채울 수 있는 갈망이 자기 마음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오 주여, 아무 쓸모 없는 시련으로부터 그녀를 막아주시고, 의미 없는 고통으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그러나 자신이 어떤 공허감과 절망을 느끼더라도 당신의 황홀한 사랑 가운데 안식할 수 있도록 힘을 부어줄, 그리고 당신의 꿈을 만나려는 마음을 줄, 좌절된 꿈은 모두 허락하소서.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에게 밝히 드러내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녀를 통해 그 일이 꼭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여 이 모든 일에 당신의 온유하심을 간절히 비옵나이다.“

 

그는 자신의 손녀가 좌절된 꿈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좌절된 꿈이 그녀를 하나님과의 황홀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고, 주님의 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도 이런 기도를 드리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의 길임을 그는 확신합니다. 어두운 골짜기, 좌절된 꿈,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갈망하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길목임을 그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꿈은 깨질지라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좌절된 꿈, 그것은 항상 더 커다란 그림의 한 조각이자 더 커다란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고통은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통은 기쁨을 향한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걸음입니다. 좌절된 꿈으로 인한 고통은 우리가 줄일 수 있거나 그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기회이자, 하나님의 가장 큰복을 얻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며, 하나님 그분과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통로입니다.

 

룻기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인생여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교과서입니다. 텅빈,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모든 꿈이 좌절된 한 여인의 인생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짧지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을 조명해주는 보석과 같은 한 권의 책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모든 꿈을 잃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모든 꿈들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두 며느리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방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어떤 기쁨도 꿈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라”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를 마라라고 부르라.” 마라는 쓴맛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경을 토로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1: 21 a) 그에게서 모든 꿈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모든 꿈은 좌절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하나님 탓이라고 말합니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분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우리 삶 속에 찾아오는 비극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 잡기 위한 훈련 때문이거나 그밖에 다른 이유 때문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비극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 비극을 막으실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향하는 나오미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행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절망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망을 향한 첫 번째 움직임입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조상인 오벳을 품에 안은 기쁨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룻기의 이야기는 단순히 우리의 인생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무참하게 깨어진 좌절된 꿈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무참하게 깨어진 좌절된 꿈들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뿐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개인적인 평화와 풍요로움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마음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여기는 좋은 삶, 곧 나이 드신 부모님 때문에 지나치게 상처입지 않고, 고통과 질병으로 너무 불편하지 않고, 일과 금전 문제로 너무 좌절하지 않는 좋은 삶 그 이상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있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예의 바른 자식들, 마음내키면 언제라도 놀이공원이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 이상의 것을 바라십니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언제 한 번 생각이라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과연 우리가 구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인격을 즐거워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채 그분의 복을 즐기기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 가운데 송명희 자매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안 요한 목사님 같은 분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고난과 좌절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알게 된 특별한 기회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꿈이 좌절된 것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우리도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두통을 앓습니다. 우리는 그 친구가 기분이 나아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덜어낼 수 없는 큰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과소평가 하는 것일까요?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기대가 왜 다른 좋은 것들보다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것 이상의 커다란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큰 집, 좋은 차, 행복한 가정, 넉넉한 은행 계좌 등은 본질적으로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것들을 배설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은 거듭난 영혼에게는 솔깃한 매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물을 바라보시는 시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시각으로 사물을 보려면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좌절된 꿈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 드린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께서 받아드리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장로들과 백성들의 이상한 축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래리 크랩의 아이를 위한 기도와 결혼식을 앞둔 자녀를 위한 기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의 결혼식장에서 장로들과 백성들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축복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축사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11) 이제 새로 신부가 되는 룻이 라헬과 레아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무심코 읽으면 이 내용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라헬은 처음에 자식을 낳지 못하였습니다. 레아는 자식을 낳았지만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라헬은 자신이 자식을 낳으려는 꿈이 좌절되자 자신의 계집종을 통하여 자식을 낳았습니다.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았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장로와 백성들은 룻이 라헬처럼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고, 그 꿈이 좌절된 것에 분개하여 보아스로 하여금 계집종을 통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고집을 피우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또 룻이 레아처럼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한 아이라도 더 낳으면 결국 남편의 사랑을 자신이 더 받게 되리라 생각하여 낳을 수 있을 만큼 아이를 낳기 바란 것일까요? 장로와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2)

 

처음의 축사가 조금 이상했다면, 이 부분은 그야말로 기이한 축사입니다. 그들은 룻이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아기를 갖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리고 베레스는 다말이 유다를 속여 성관계를 맺은 후에 낳은 쌍둥이 중 하나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창세기 38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유다와 다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로와 백성들은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엉망진창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이 이상한 축사는 좌절된 꿈을 통해서만, 세상의 다른 모든 갈망을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우리의 인생에 자리매김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축사입니다. 그 이상한 축사가 뜻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여보게 보아스, 자네는 사랑스러운 여자와 결혼했네. 난 자네에게 최고가 주어지기를 바라네. 그러나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거나, 룻이 라헬과 레아와 같이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이 계획하신 선한 것들이 일어나도록 일하실 것이라네. 어느 날 자네 삶이 너무 불행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자네가 볼 수 없는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자네를 향해 선한 계획을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게. 그 상황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편안해지는 것에 몰두하지 말기를 바라네. 이스라엘, 곧 야곱의 열두 아들이 라헬과 레아 같은 사람으로 인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그리고 이어진 더 이상한 축사는 이런 것입니다.

 

“자네의 삶이 온통 뒤죽박죽 될 수도 있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선한 것을 이끌어내신다는 것을 신뢰하게. 보아스 살다보면 일이 잘못될 때도 많다네. 에덴 이후로 새로운 하늘이 열릴 때까지 우리네 인생은 잘못된 길로 갔었고, 또 갈 것이라네. 유다와 다말을 보게. 그러나 그들의 후손은 메시아의 조상이 되지 않았는가? 자네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복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게. 삶이 산산조각 날 때,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지 말게. 그래 자네는 건강하고 부자이지. 그렇지만 하나님만이 참된 선한 것들의 근원이 되시네. 그리고 좌절된 꿈이 가져오는 고통만이 자신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제거할 수 있지. 보아스, 나는 자네가 깨어지기를 기대한다네. 왜냐하면 난 자네가 기뻐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일세.“

 

한 마디로 장로와 백성들의 이 축사는 그야말로 믿음의 축사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알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축사입니다. 그것은 처음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레리 크랩의 자신의 손녀를 위한 기도와 같은 내용입니다. 태어난 아이를 향해 “주여, 이 아이의 삶이 엉망진창 되게 하시고, 힘든 시기에만 일어날 수 있는 당신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 아이의 결혼식 때, “주여 어려움들이 이 아이의 삶에 달라붙어 어려움만이 밝힐 수 있는 선함을 발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래리 크랩과 같은 기도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로와 백성들의 축사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해할 것입니다. 그 축사가 보아스와 룻의 결혼식에 들려졌을 때, 나오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오미는 텅빈 자신의 모습, 좌절된 자신의 꿈을 통해 영적인 여행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녀는 좌절된 꿈이 주는 고통만이 육체를 억압하는 굴레를 무력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깨어짐만이 최고의 꿈이 꿈꿔지는 인간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누군가가 그 결혼식 후에 나오미에게 다가와서 “참 이상한 축사도 다있네요. 전 그 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나오미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다른 축사가 주어질 거예요. 이 땅에서의 삶에는 그 축사가 애정이 깃든 꼭 필요한 축사이지요. 내 귀에는 그 축사가 인간의 이기주의나 연약함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크고 영원한 목적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보아스와 룻의 지혜가 자라기를 바라는 장로님의 소원으로 들렸답니다. 장로님은 그들이 보거나 줄 수 없는 선한 것들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도록 만드는 모든 어려움들을 그들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바람을 갖고 있답니다. 나는 이제야 좌절된 꿈이 우리로 하여금 최고의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좌절된 꿈들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가장 큰 기쁨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전능자의 위대한 영광으로 향하도록 도와준답니다.“

 

저는 이 시간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룻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지난 일 년간 저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한 가지, 한 가지 기대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희 가족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주셨고, 저희 또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손쓸 수 없고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어두움을 뚫고 다가오고 계십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아직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저를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앞으로 저를 통해 행하실 모든 일들은 제가 느끼기에는 가장 처참하고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패가망신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거니와 저는 나오미의 텅빈 인생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넘치게 되었던 것처럼, 저의 인생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넘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기왕 죽을 바에는 같이 죽자는 물귀신의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여러분을 인도할 어두운 골짜기로 걸어가기를 고대합니다. 저는 그 어떤 수단, 곧 아무리 좋은 양육이나 영적 훈련, 혹은 심리치료나 화학요법도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복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제 저는 우리가 공허함을 체험할 때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자신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갈망으로 채울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고통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을 자각하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갈망을 신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제 자신과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좌절된 꿈이라는 쓰디쓴 자비를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우리 중 누구라도 상처받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기쁨을 체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 이제 어지니 교회는 무서워서 더 이상 못나오겠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우리 목사가 어려움에 빠지더니 이제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이런 생각이 드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좌절된 꿈은 최고의 기회입니다. 살면서 좋은 것들을 많이 받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시기는 그러한 복이 결코 줄 수 없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쉐퍼드의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던 새로운 사역에서 몇 년간 많은 낙심을 겪은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에 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것이 내 환경을 넘어 한 분만을 보는 것임을 알게 된다. 더 좋은 환경을 믿는 것은, 심지어 더 좋은 환경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도 참된 믿음이 아니다. 나는 모든 꿈이 소멸되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천국에서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고, 왕이신 내 친구와 가까이 사귀게 되고, 그리고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 그분에게 기쁨이 된다면 또 다른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할 때 내 육체는 가벼운 흥분이 휩싸인다.”

 

분명 데이비드는 좌절된 꿈들 한 가운데서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보아스와 룻을 향한 장로들과 백성들의 축사는 이상한 축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오미의 삶 안에 신비스럽게 채워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꿈이 좌절되었습니까?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분, 한 분만이 이 세상 그 어떤 귀한 것보다 더 값진 분임을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세상에서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여러분의 인생을 채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 자신들의 모든 소망을 깨뜨리고,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갈망하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좌절된 꿈들이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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