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4장 1-12
성취된 구속의 다섯 가지 진리
피영민 목사 2016.12.18.
서론
지난 시간 우리는 룻기 3장의 말씀을 통해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한 데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들을 낳아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잇게 해 주시도록 간청하는 의미였고, 둘째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갖고 있던 기업의 땅을 다시 돈을 주고 사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룻의 청혼에는 이름과 땅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름과 땅은 매우 중요합니다.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땅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네 이름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땅과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천국에 땅과 이름이 있는가 없는가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룻기 3장에서 룻이 요구한 것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내게 천국의 땅과 천국의 이름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보아스가 청혼을 수락합니다. 보리 여섯 되를 나오미에게 보냈습니다. 보리 여섯 되는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증표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보리 여섯 되를 받은 나오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룻기 3장 18절에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룻기 4장은 나오미가 언급한 ‘이 일’이 성취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기업 무르기를 성취하는 것, ‘구속의 성취’(Accomplishment of Redemption)입니다. 룻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땅도 없고 이름도 없었던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죄인들을 예표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을 구원해서 땅도 주고 이름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구약에서 룻은 신약의 죄인들을 예표하고 보아스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해 구속을 성취하는 것이 룻기 4장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룻기 4장의 내용을 통해 구속의 성취, 성취된 구속에 관한 다섯 가지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우리가 얻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구원은 100%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3장 18절에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너는 이제 보아스에게 청혼한 것으로 네 할 일을 다 했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속의 성취는 보아스가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을 잇는 것, 땅을 도로 찾아주는 것도 모두 보아스가 할 일이고, 이제는 네 할 일을 다 했으니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청혼하는 것 이외에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의지로 땅을 회복할 수 없고 이름을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룻기 4장에 나타난 구속의 성취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보아스가 계획한 것이고 주도하는 것이며 성취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100% 보아스가 다 이룬 것입니다.
성경적인 구원관에 있어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선행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100%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가 있는가 하면 타락한 기독교도 있습니다. 타락한 기독교의 특징은 인간의 선행이 천국 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50% 담당해 주시고, 인간의 선행과 공로 50%가 더해져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 구원에 일부분 기여하거나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기독교는 구원이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공로로 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을 성취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속의 계획’(Planning of Redemption)을 이루시고, 성자 예수님은 ‘구속의 성취’(Accomplishment of Redemption)를 이루시고, 성령 하나님은 ‘구속의 적용’(Application of Redemption)을 이루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부 하나님은 택자를 예정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택자를 위해 죽으셔서 죄 값을 다 갚으시고, 성령 하나님은 택자들에게 이 구속의 진리를 믿게 하시고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계획하시고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0.00001%도 기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속죄하는 일에 죄인들의 피는 조금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일에 인간의 지성은 0.00001%도 공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요나서에 참으로 위대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은 이 일이 누구로 인함인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고, 제비 뽑힌 요나를 잡아 바다에 집어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집어 삼키게 하셨고,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삼야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요나 2장 9절은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문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말미암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노력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천국 가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국 가는 모든 구원의 성취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Ⅱ. 우리가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다
구약의 계대결혼은 죽은 사람의 형제들이 지는 의무입니다. 형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은 반드시 형수와 결혼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대결혼의 의무입니다. 동생은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죽은 남편인 말론의 동생이 아닙니다. 룻의 죽은 남편인 말론의 아우는 기룐이지만, 그도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니 보아스는 사실상 계대결혼을 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없었습니다. 자발적으로 기업을 무를 수 있었지만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대결혼해야 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보아스는 기업 무를 순위 1순위가 아니라 2순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룻의 청혼을 받았을 때, 정중히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거절한 보아스를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고, 신발을 억지로 벗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의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른 이유는 단지 자발적인 본인의 선택으로 동정심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추진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스스로 룻을 구속하고, 스스로 계대결혼하고, 스스로 말론의 땅을 사서 그 아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한 일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7~18).
혹자는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고 피 흘려 죽임당한 것이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할 필연적인 의무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보면 꼭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을까요?” 이런 질문은 건전한 질문이 아닙니다. 질문 자체가 아주 좋지 못한 전제가 깔려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전제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음을 증거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고, 우리 인간은 모두 공평하게 복음을 들어야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누구도 내게 복음을 들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불특정 다수를 구원해 주셔야 할 의무를 갖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런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으면 왜 나를 지옥에 보내시겠느냐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야 한다면 그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그 어떤 의무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 역시 인간을 반드시 구속하셔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속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보아스가 다 이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공짜로, 거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
Ⅲ. 우리가 얻은 구원은 구속자 편에서 대가를 치르고 성취된 것이다
구속자는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룻이 한 것은 단지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었습니다. 청혼만 하고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공짜로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룻과 결혼했습니다. 우선 땅값을 지불했습니다.
보아스는 성문 앞에 나아갔습니다. 성문은 쉽게 말하면 법정과도 같은 장소입니다. 재판석이 있는 곳이 성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기업 무를 1순위의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로 성문 앞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를 불렀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이름을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중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가 그를 불러 앉힌 후, 장로 10명을 청해서 함께 앉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증인들 앞에서 기업 무를 1순위의 사람에게 묻는 것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사유지를 관할하고 있지 않느냐? 물론 땅을 팔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소유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사용권을 다시 찾아와야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이 되기까지 땅의 사용권을 매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유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소유지의 관할권은 나오미가 갖고 있었지만, 사용권을 되찾아와야 했기에 보아스는 기업 무를 1순위의 사람에게 당신이 그 땅의 사용권을 되찾아 오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법으로 보면 상속자가 없는 경우 기업 무를 자가 땅을 되찾았을 때, 그 땅의 소유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부인에게 땅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땅의 소유권을 취할 수 있었기에 그는 그 땅을 무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4절에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부연설명을 합니다. “당신은 나오미가 팔은 땅을 다시 사는 경우 룻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주고 당신이 산 그 땅을 그 아들에게 상속해야 한다. 그래도 기업을 무르겠느냐?” 그러자 가만히 생각하더니 기업 무르는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4절에서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더니, 보아스의 부연설명을 듣고 수지타산을 고려해 본 결과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을 알게 된 그는 곧 무르지 않겠다고 돌변한 것입니다. 그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6절에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최종결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발에서 신을 벗는데, 이는 권리를 포기하고 양도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2순위자인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는 땅값을 지불하고 땅을 되찾아 가지고 있다가 룻과 결혼해서 아들 오벳을 낳고 오벳에게 그 땅의 소유권을 모두 상속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룻이 지불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보아스가 다 지불하고 기업 무르기를 성취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지불한 것이 없지만,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땅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없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에 빠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매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 흘리시는 대가를 치러주셨습니다. 이것은 은과 금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대가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이 이런 희생을 대신 치러주셨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Ⅳ. 우리가 얻은 구원의 핵심은 영생을 얻는 것이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해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남편, 재물, 평안, 기쁨, 행복 등 많은 것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복을 다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게 된 것은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0절에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과 땅을 얻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없어졌던 땅, 깨어졌던 이름을 잇게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때 필요한 땅과 주민등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갔을 때, 땅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이름이 천국에 주민등록 되어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땅과 이름은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공짜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생하는 복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이 세상의 필요한 모든 복을 받고 누리게 됩니다. 건강도 얻고, 부자도 됩니다. 술을 끊으니 부자가 되는 것이죠. 술과 담배를 끊게 되니 건강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건강과 같은 현세적인 복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복의 핵심은 내세의 복입니다. 죽어서 갈 곳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에 가면 거할 곳이 있습니다. 천국에 내 이름과 내 땅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며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Ⅴ. 우리가 얻은 구원은 절대적 확신을 주며,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것을 비밀리에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성문 앞 법정에서 기업 무를 권리를 획득했습니다. 증인 2명만 있어도 충분할 것을 장로 10명을 데려다 놓고 기업 무를 1순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9~11절에 보면 ‘증인이 되었다’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업 무를 1순위의 사람이 자기 발에서 신을 벗어 “나는 더 이상 기업 무를 권리를 찾지 않고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자 공적, 법적인 절차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아스가 구속하는 모든 과정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법적인 인준 절차를 합법적으로 밟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 것은 결코 취소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인준을 받으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주시하셨고, 인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침례를 받고,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두 번이나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인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인준의 절차가 마치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받아주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구속사역은 공적이고 법적인 인준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죄인들의 죗값을 모두 치러주셨고, 다시 빼앗기거나 취소될 수 없는 영원한 영생의 선물을 값없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거래는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결론
룻이 보아스로 말미암아 현세의 복, 내세의 복을 다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현세의 복, 내세의 복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현세와 내세의 복을 받을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이 복을 거저 받았습니다. 공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짜로 주지 않으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하여 아내가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예수님을 영적인 신랑 삼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을 받는 일보다 시급하고 중차대한 일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장례식장을 가 보면 고인에게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었는지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앉아서 대통령하고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살아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죽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죽음은 득달같이 찾아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홀연히 소천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죽음은 어둠 속의 비수처럼 날아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죽음은 그렇게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를 준비했는가입니다. 천국에 내 이름과 내 땅이 있는가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어떤 집을 지었는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에 갈 것인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는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판가름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상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좋은 집을 짓고 살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 것만 바라보고 살면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 좋은 집을 짓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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