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6장 1-8
갈릴리로 돌아가자
김창진 목사 2018.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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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 여인이 안식 후 첫날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주일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이 장사되신 무덤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주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입니다.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막6:3). 살로메는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이 세 여인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몸에 향품을 바르려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우리나라는 장례를 치룰 때 시신의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 향을 피우듯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장례를 치루면서 시신에 향기 나는 기름을 부패한 냄새를 중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세 여인은 이미 장례가 끝난 후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이 계신 무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헌신적 신앙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세 여인이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면서 걱정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까?” 왜냐하면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여인들이 옮기기에는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무덤 앞에 도착하니, 무덤을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은 벌써 굴려져 있었고, 무덤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너무 놀란 세 여인은 혹여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을까 급히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는 있어야할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한 흰옷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흰옷 입은 청년을 천사라고 합니다(마28:5-7). 흰옷 입은 청년이 말합니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16:6-7)
그리고 마가는 장면을 바꿉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후의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합니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급히 무덤을 나와 달려가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9-10)
이 두 장면에서 공통의 말씀을 있습니다.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왜? 하필?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 왜?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만나십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만나 주셨습니다.
1. 세 번 제자들을 만나 주시는 예수님
▶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와 또 한 제자들를 만나 이야기하고 식사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홀연히 떠나신 뒤에야 자신들과 이야기 나누며 식사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 또 한 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당하자 마가의 집에 모여서 유대인들을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축복하시면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요20:19-22) 하시면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도마는 직접 손에 못 자국을 보고,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에 넣으며, 창자국난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요20:25)고 합니다.
▶ 그 일 후 8일이 지난 후 도마와 모든 제자들이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한 번 나타나셔서 평강으로 제자들을 축복하신 후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하십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처음 만나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너희를 나를 보리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갈릴리는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장소요,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했던 장소요, 충성했던 장소요, 무엇보다 예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첫 사랑의 장소입니다.
2.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심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4:18-22)
어부에게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부친과 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단 어부인 제자들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 마가복음 2장에 가면 세관에 앉은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세리 마태는 세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인 세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막2장).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에 있는 마을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곳에 어디입니까?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있어서 첫사랑의 장소요,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의 장소입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커다란 기대를 합니다. 어부로서 배를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심지여 부친까지 져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그들에게 커다란 믿음의 모습을 기대하게 되지만 그 기대는 곧 무너지고 맙니다.
3. 기대를 져 버린 제자들
마가복음은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 부름 받은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은 거의 매장마다 실망스런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 3.1 마가복음 4:35-41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갑니다. 그때 큰 광풍이 일어나 큰 파도가 치고 배에 물이 들어옵니다. 제자들을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깨우며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그때 예수님이 바다와 바람에게 명령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말씀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 집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어찌 믿음이 없느냐”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대체 저 분이 어떤 존재냐?”라는 겁니다.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적과 기사를 보고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 3.2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마가복음 6:45-52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시고 밤 사경쯤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며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령인가?’하고 소리치며 무서워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은 여기서 그쳤지만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사건을 덧붙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몇 발짝 못가고, 바람을 보며 무서워 물에 빠집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6장을 계속 읽어보면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6:51-52) “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합니다. 이 사건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이 벳새다 들녘에서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12바구니나 남긴 사건입니다. 시간적으로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부르게 먹고 12바구니나 남긴 기적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신 것과 베드로가 물을 걷다가 빠진 사건으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그 마음이 둔하여 졌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마음이 둔하여 졌다”는 의미는 “무언가 그 눈을 가리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립니까? 요한복음 6:15을 보면 오병이어 기적 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이런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자들의 눈을 가린 것은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이 임금이 되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 3.3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둔하여진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의 했던 일을 보면 더욱 실망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 살로메를 통하여 예수님께 청탁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막10:37)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모든 제자들이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둔하여졌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0:41을 보면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결국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됩니까?
▶ 3.4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의 군졸들에게 잡힐 때에 다 도망칩니다. 마가복음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니라.” 어떤 제자는 자신이 덮고 있던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벗은 몸으로 도망칩니다. 예수님과 마지막 저녁을 먹으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막14:30) 베드로가 힘 있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 말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을 다 도망칩니다. 그나마 베드로가 대제사장에게 잡혀간 예수님을 보려고 갔지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저주까지 하며 부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둔하여 졌기 때문입니다”
▶ 마음이 둔하여진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마가의 집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게 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들려온 소리는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너희가 나를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낙심가운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자 함께 있던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예전의 부름을 받기 전의 어부로 돌아가겠다는 말입니다.
4. 첫사랑의 회복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갈릴리에서 그물질을 하던 제자들, 그러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그물의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 말씀 따라 그물을 오른 편에 던졌더니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습니다. 무엇을 연상하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한 그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았습니다. 그 때의 일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 가운데는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야 이 갈릴리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지 않았니... 바로 여기가 내가 너를 부른 부름의 장소요.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의 장소가 아니니... 이제 일어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부르심의 모습을 회복하거라.”
그리곤 묵묵히 예수님 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 이 말씀은 베드로의 모습을 책망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고, 베드로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처음 사랑을 회복 시켜 주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 사랑을 회복한 제자들은 오순절이후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신 부르심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 외에는 모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회복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음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영적 애씀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고 말씀합니다.
▶ 요한계시록 2장에 나타나는 에베소 교회를 기억해 보십시오.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께 책망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심히 없던 것 아닙니다. 인내와 수고가 없던 것 아닙니다. 게으르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도 견뎠습니다.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에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갈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그래서 고린도전서13:13은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없는 믿음은 자기를 나타내며, 사랑이 없는 믿음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갈릴리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모든 것을 헌신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갈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5. 우리의 갈릴리
그럼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처음 신앙 생활하던 곳입니까?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곳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는 말씀은 갈릴리라는 장소를 통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케 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갈릴리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의 갈릴리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뜨거운 마음을 어디서 회복해야 합니까?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고기를 잡던 바닷가였다면, 우리에게는 갈릴리는 내가 예배하며 섬기는 교회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하는 이 교회를 통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영적 애씀이 내가 예배하며 섬기는 교회에서 있지 않는다면 어디서 그 마음을 회복하시겠습니까? 어디에서 처음 사랑을 유지하겠습니까? 우리의 갈릴리는 바로 이 곳 내가 신앙 생활하는 교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그 때의 모습들이 날마다 드러나야 합니다.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제자들처럼 마음이 둔하여 집니다. 둔하여진 마음에는 세상의 욕망과 욕심이 자리 잡고, 그렇게 마음이 둔하여진 채로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나타내는 것이고, 내 자랑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한 일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처음 사랑이란 순서적으로 첫 번째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최고의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처음 사랑이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가장 뜨거운 마음입니다. 그 사랑을 회복하고 유지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어디서요? 지금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처음 사랑이 날마다 회복되고 유지되어서 주님을 위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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