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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마가복음

막 16장 1-8절(갈릴리서 만나자) - 신만교

by Preacher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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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6장 1-8

갈릴리서 만나자

신만교 목사

화평성결교회 [의정부시] http://whttp://www.hpehc.org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 16: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막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막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 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막 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청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총장 갈레스피 교수가 은퇴를 하고 주일학교 유초등부 교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부활절 아침에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어요.” 이때 한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Is it true? 사실이에요?” 갈레스피 교수는 “yes, it’s true 그럼 사실이지.” 어린이가 “It’s impossible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대꾸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써 의심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증거들 중에 하나가 빈 무덤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다만 빈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이라도 중동 어느 지방에서 썩고 있는 예수의 시신이나 뼈 조각 하나가 발견된다면 기독교는 그 순간 끝입니다. 모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우리교회부터 문을 닫겠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신앙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시체를 무슨 수로 찾겠는가?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여러분, 다른 종교의 교주들이나 영웅들, 독재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무덤을 자랑합니다.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는 모택동의 무덤이 있습니다. 썩지 않게 방부제로 처리하여 지금도 죽을 때 모습 그대로 누워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가련한 사람이 됐습니다. 모스코바에 가면 레닌의 모습이 그렇게 돼있고 북한의 금수산 기념궁전에 김일성의 무덤, 얼마 전에 죽은 김정일의 무덤도 그렇게 보존돼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무덤의 크기로 생전의 권세와 위용을 자랑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렇고 중국 진시황능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세를 휘둘렀어도 결국은 죽음과 무덤을 자랑할 뿐입니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오늘 부활절은 죽음이 패하고 생명이 승리한 날입니다. 사단이 패하고 하나님이 승리하신 날입니다. 거짓과 불법이 패하고 진리가 승리한 날입니다. 예수님이 역전승(逆轉勝)하신 날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씨름할 때 체구가 작은 선수가 통쾌하게 이길 수 있는 기술이 바로 ‘뒤집기’ 기술입니다. 작은 선수가 큰 사람 밑에 들어가 허리를 지렛대로 삼아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역사상 최대의 뒤집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예수가 힘없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 전역에 퍼져갔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새벽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기쁜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반전인가? 예수 승리로 뒤집기 한판승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 이 엄청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시체를 훔쳐간 줄 알고 시체에 바르기 위해 가져갔던 향유 병을 앞에 놓고 절망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때,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이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막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 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처음 전해들은 여인들은 정신없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내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기도 하고 기뻤겠는가?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갈릴리서 제자들을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주님의 사역의 절정은 예루살렘입니다. 부활하신 곳도 예루살렘이요, 성령강림과 함께 초대교회 역사가 시작한 곳도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에 수차례 부활 후에 갈릴리로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 28: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아마 이때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

 

1. 거기서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름을 받고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잘못도 했고 허물도 많았습니다. 주님의 기대에 영 못 미쳤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허물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외로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가까이 있던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 제자공동체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만 해도, 메시야로 군림하여 로마 정부를 물리치고 새 나라를 건설할 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보며 너무 실망한 제자들이 고향을 찾아 갈릴리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다시 만나고자 하셨습니다. 왜요? 지난 허물을 덮고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시고자 하십니다. 무너진 제자공동체를 다시 재건하고자 갈릴리서 만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추억의 장소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갈릴리와 같은 추억의 장소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이 갈릴리입니다. 12제자 중 11제자가 이곳 갈릴리 출신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제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 갈릴리입니다. 이곳 해변 가에서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그 추억의 장소에서 주님이 다시 만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실패 가운데 있는가? 절망적인 상황인가? 주님을 멀리 떠나 있는가? 그래도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외면하지도 않으십니다.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인가? 처음 주님을 만난 곳, 주님이 처음 내게 찾아오신 곳, 난생 처음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고 예수를 믿던 곳, 그곳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릴리에서 다시 주님을 만나 새롭게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왜 갈릴리서 만나자고 하셨을까?

 

2. 실패한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첫사랑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을 좇으며 사역을 할 때 너무 신났습니다. 이곳에서 백부장의 신하를 고치셨고 갈릴리 들녘에서 산상보훈을 들려주셨습니다. 주님은 이곳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위를 걸으셨고 갈릴리 해변에서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추억의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게 첫 사랑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모양이 웬 말인가? 그 부인을 모른다고 부인하다니요.

 

그래서 주님은 이 갈릴리에서 실패한 사랑을 회복하시고자 하십니다. 갈릴리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갈릴리에 와있던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요21:15). 그때 베드로가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실패한 사랑을 갈릴리에서 회복했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어느 교회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거웠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신앙이 타성에 젖었고 형식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사랑을 잃고 만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아직도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사랑인가? 예수님께서 그 첫사랑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따분한가? 당신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했는가? 십자가 밑에서 감격해 본 일이 있는가? 십자가 밑에서 울어본 경험이 있어야합니다.

 

아내를 잃고 혼자되어 외동딸 하나를 키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딸이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딸은 그 아버지의 전부였습니다. 그 딸도 아버지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대학에 들어가서 사랑하는 이를 만났습니다. 목숨 바쳐 사랑할 이를 만난 것입니다. 아버지보다 그를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그가 누구였는지 아는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나의 딸을 내 품에서 빼앗아간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그가 나보다 내 딸을 더 사랑하였단 말인가?” 그 아버지가 후에 딸에 인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고백하기를 “내가 내 딸을 사랑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비하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사랑이었다.”고.

 

여러분은 이 같은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는가? 실패한 사랑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실패한 사랑을 회복하지 않고는 믿음생활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함께 부활의 송가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죽음을 정복한 승리의 노래입니다. 이제 우리는 슬픔의 노래를 부르지 맙시다. 부활의 송가를 부르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부활을 소망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요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말했습니다. “오늘 신문에서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들랑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로 옮겨 간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입성하는 날입니다.

 

이대 총장을 역임하신 김활란 여사는 “내가 죽거든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라. 천국문에 들어가는 환희의 노래,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다오.” 부탁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부활의 아침에 실패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역전의 송가를 부르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

 

3. 잃어버린 사명(使命)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이곳 갈릴리에서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고 전도자의 길을 나섰습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은 본래의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사명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잃어버린 그 사명을 되찾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환경 속에서 사명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하루하루 부딪히는 염려들 때문에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왜 사는지, 궁극적인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제자들도 공포의 십자가 앞에서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그 사명을 되찾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결국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잃어버린 사명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담대히 세상을 향해 나갔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였고 하나같이 복음을 위해서 순교자가 됐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불같은 박해를 피하여 빠져나오다가 예수님이 로마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예수님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 그때 주님은 “네가 버리고 떠나는 로마의 잃은 양들을 찾으러 간다.” 베드로는 그 시로 다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부활절은 사명의 자리를 되찾는 날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잃었던 비전과 사명을 되찾게 됩니다. 사명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명(使命) 소명(召命) 이 사명(使命)을 또 다른 말로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소명이란 부르심, calling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명을 받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소명(召命)이란 한자를 자세히 보십시오. 소(召)자는 칼 도변 밑에 입 구(口)가 있습니다. 소명(召命)이 무엇인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행하고 실천할 일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당신은 목을 내놓고 행할 일이 있는가? 무엇을 위해 목을 내놓겠는가?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해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갈릴리에서 여러분을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갈릴리는 다시 시작하는 곳이고 실패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곳이며, 사명(使命)을 다시 찾아 제자 삼는 사역을 시작하는 곳입니다. 영혼의 찬양 1장(‘가서 제자 삼으라’)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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