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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민수기

민 30장 1-5절(서원과 성도의 책임) - 안효관

by Preacher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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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30장 1-5

서원과 성도의 책임

안효관 목사 2019-06-2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1865년 4월 14일 밤 10시 13분 경, 노예해방을 위해 치룬 미국의 남북전쟁(The Civil War)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한 남자에게 저격을 당합니다. 그날은 미국이 4년간 62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남북전쟁이 끝난 지 불과 5일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날 밤 링컨 대통령 부부는 워싱턴 DC에 있는 포드 극장(Ford's Theatre)에서 공연되는 ‘우리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이라는 희극을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통령 부부는 헨리 래스본(Henry Rathbone, 1837-1911) 소령과 그의 약혼녀인 클라라 해리스(Clara Hamilton Harris, 1834-1883) 양과 함께 극장 2층에 마련된 귀빈석에서 앉아 있었습니다. 대통령 주변에는 경호팀이 따로 없었고, ‘존 프레드릭 파커’라는 경찰관 한명이 지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극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 전 짧은 휴식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링컨 대통령은 부인 메리 토드(Mary Todd Lincoln, 1818-1882)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나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유럽 여행을 한번 하고, 그 다음으로 축복받은 땅 가나안 지역 성지순례를 해보고 싶소. 특별히 예루살렘 땅을 걸어보고 싶구려. 그 곳은 예수님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주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지 않소. 주님이 직접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골고다의 언덕, 거룩한 땅, 예루살렘을 말이오.” 그리고 2부 공연이 시작되면서 연극의 재미있는 장면에서 관중들의 폭소가 터지는 순간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1838~1865)라는 청년이 링컨 대통령에게 접근하여 그의 머리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고

 

(사진1)

 

링컨은 그 다음날인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링컨 대통령을 저격한 부스는 젊은 미남배우로 당시 상당히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흑인을 해방시킨 링컨을 증오했고, 남북전쟁 중에는 남부의 첩자노릇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전쟁기간 중에 남부 지지자들과 함께 링컨 대통령을 남치한 후 남부군 포로들과 교환하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링컨 대통령이 해방된 흑인들에게까지 투표권을 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링컨을 암살하기로 결심했고, 그날 그 결심을 실행하여 링컨 대통령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을 저격한 부스는 2층 귀빈석에서 무대로 뛰어내리면서 라틴어로 ‘폭군들은 항상 이렇게!’(Sic semper tyrannis!)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장을 빠져나와 도주한 암살범 부스는 12일 후 한 농장에 숨어 있다가 자신을 포위한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려다가 사살 당했고, ‘부질없고 부질없도다!’(Useless, useless!)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암살범 부스가 링컨 대통령에게 총을 쏜 그 시간, 링컨 대통령의 경호를 맡았던 경찰관이 대통령의 하인과 마부를 데리고 연극장 근처의 한 술집에 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 때 대통령의 경호를 맡았던 그 경찰관이 술집에 가지 않고 ‘대통령의 경호’라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을 너무 일찍 잃는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대통령의 경호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술집에 가는 실수를 저질렀고, 역사적 비극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설마!’라는 생각에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책임에 대해서 중요성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는지 생각하지 못하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우리 자신에게만 손해를 입히거나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때로는 누군가에게도 치명적인 아픔이나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대통령의 경호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했던 경찰관과는 달리 끝까지 책임을 다함으로 후대에 큰 유익을 준 경우도 있습니다. 세계 3대 용병부대 가운데 하나인 스위스의 용병은 아주 용감하고 충성심이 강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을 지키는 용병은 스위스 용병입니다.

 

(사진2-스위스 용병 바티칸 근위대. 근위대의 복장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바티칸에서는 오직 스위스 용병들만 고용하고 있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Karl V)가 바티칸 교황청까지 쳐들어왔을 때 당시 바티칸을 지키고 있던 다른 나라 용병들은 다 자기들 살겠다고 도망을 쳤는데, 스위스 용병은 187명 중 147명이 전사하면서도 교황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교황청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교황청은 스위스 용병들에게만 바티칸의 수비를 맡기고 있습니다. 500여 년 전 자신들의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교황청을 지켰던 선배들 덕분에 스위스는 신뢰의 나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바티칸을 지키는 유일한 용병으로 채용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 스위스 용병들은 혁명군에 맞서 국왕 루이 16세(Louis XVI) 부부가 있는 궁전을 지키다 700명이 전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군은 스위스 용병들에게 도망칠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용병들은 “아직 계약기간이 남았다”며 궁전을 지키다가 모두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고 살면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만, 스스로 책임감을 버리면 신뢰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면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특별히 신뢰를 얻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도 중요하거니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도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신뢰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결코 신앙인답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신뢰를 얻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서원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서원이라는 것이 그렇게 많이 강조되거나 중요한 신앙의 요소로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성서시대에 서원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거나 어떤 일을 행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맹세에 합당한 제물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서원에는 반드시 그 서원의 증표로 어떤 일을 삼가는 행동이나 무언가를 하겠다는 약속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 서원의 모습이 성경에(특히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외갓집인 하란으로 피난을 가던 도중 벧엘에서 서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이 머물던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먼 길을 가던 야곱이 벧엘에 이르러 돌을 베개 삼아 누워 자다가 꿈을 꿉니다. 그 꿈에 하늘에까지 닿아 있는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이 땅을 너에게 주리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야곱은 하나님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으로만 알았다가 비로소 그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곳에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리고는 비로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함으로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이곳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내가 얻은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서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은 하란에서 돌아온 후에 그가 서원한 대로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전제물을 드림으로 그의 서원을 이행했습니다.

 

사사기 11장에는 사사 입다가 서원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 전쟁하러 가면서 이렇게 서원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사사기 11:30-31) 그리고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면서 아버지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입다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자신이 서원한 것이기에 그 서원대로 사랑스런 외동딸을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서원은 그렇게 자신이 말한 대로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걸 말씀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2절) 앞서 말씀드린 야곱이나 사사 입다의 예처럼 서원이라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쉬울 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 서원해 놓고, 그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하나님과 한 약속을 스스로 깨뜨려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살곤 합니다. 우리 옛말에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급하니까 무슨 말이든 다 해놓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온 후에는 자신이 한 약속이나 말을 뒤집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힘들고 뭔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뭐든지 다 할 것같이 약속해놓고,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좋아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하나님과 한 약속을 내팽개쳐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장사를 하는데 너무나도 장사가 안 되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장사가 잘 되게 해 주시면 제가 십일조도 드리고 십일조만 아니라 십에 2조도 그리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에게 복을 주셔서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잘 된 것은 기쁘고 좋은데 십일조를 드리려고 하니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투자해서 더 큰 장사를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은 장사가 잘 되면 십일조만이 아니라 십에 2조도 드리겠다고 기도했기 때문에 더 많이 드리는 것이 아까웠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번뜩이는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번 돈뭉치를 손에 가득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이 돈을 몽땅 하늘로 던질테네 하나님께서 가져가고 싶으신 대로 가져가시고 나머지는 저에게 다시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하늘로 돈다발을 모두 던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져가셨을까요? 이것이 우리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거짓된 욕망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서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앞에 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과 한 약속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입다는 자신이 하나님께 한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 시집도 가지 않는 외동딸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칩니다.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입니다. ‘내가 왜 그런 서원을 했을까?’ 하고 수도 없이 자책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딸 대신에 자신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한 약속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도 그는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약속에 대해서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실한 분이신 것처럼,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 역시 신실하신 하나님을 닮아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 하고, 사람들에게도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신실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신실하지 못하다면 그건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가치에 따라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만 정직하고 사람에게 정직하지 못하는 것은 바른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직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도 정직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사람들에게 향한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그게 바른 신앙입니다. 그걸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에 따라오는 행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믿음의 내용과 행동하는 삶의 내용이 다른 것은 거짓된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책임적인 존재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따라 말하고, 내 믿음으로 나오는 말에 부합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쉽지 않을지라도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혹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그 말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시편 15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이어 말씀하면서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서원한 것이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일지라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에 주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한 약속인 서원조차 지키지 못한 사람이 사람과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이라면 먼저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당신과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운데는 혹 ‘나는 하나님과 약속을 한 적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삽니다. 하나님께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공식적인 약속도 있습니다. 세례 받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서약했습니다. 평생 하나님만 믿고 섬기기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교회에 유익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말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목사는 목사안수를 받을 때, 장로님이나 안수집사님이나 권사님은 임직을 받으실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약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공식적으로 서약한 그 서약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아니 내가 어떤 서약을 했는지, 무어라고 서약했는지 기억이나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말을 다 들으시고 우리가 한 그 말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수기 14:28)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으로만 간직했던 생각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편 139:1-4)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한 약속을 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어쩌면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만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약속을 우리 스스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기에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을 미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킬 때까지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한 말조차 스스로 책임질 줄 모른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약속한 것이 있으면 그것 또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한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며 내가 손해가 되어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사람과 한 약속도 내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신실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 신실함을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사십시다.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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