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2장 18~25
베드로와 회심-예수신경의 이야기 (4)
이준원 목사 2017.4.5.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예수신경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 출생증명서와 운전면허증
많은 사람들은 회심이 한 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보면 회심(conversion) 또는 구원이라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생명의 삶>에서도 구원의 세 가지 단계 또는 차원을 말하면서, 받은 구원(영), 받는 구원(혼), 받을 구원(몸)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이 구원을 받는 ‘받은 구원’, 그 후부터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인 ‘받는 구원’,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마침내 우리의 몸까지 변화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받을 구원’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회심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 2:12, 새)
어떤 사람에게 회심은 출생증명서(birth certificate)와 같은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 회심은 운전면허증과 같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한 번이지만, 운전은 평생 하는 것입니다. 회심에 관하여 우선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내가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고, 이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이며, 이것은 평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신경은 둘 중 어느 것에 가깝습니까? 예, 운전면허증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출생증명서와 운전면허증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출생증명서는 내가 특정한 날짜와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받는 증명서이기도 합니다. 반면 운전면허증은 단순히 자동차를 운전해도 좋다는 허가증입니다.
만일 회심이 출생증명서와 비슷한 것이라면, 우리는 유모차에 누운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아기들을 생산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회심이 운전면허증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인생길을 개척하여 나아갈 수 있는 어른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신경은 삶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신경을 통한 회심은 인간의 삶 전체를 다 포함하는 전인적인 회심입니다. 이러한 전인적인 회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2. 베드로는 언제 회심했는가?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고(수제자라고도 하고), 또 나중에 초대교회의 중요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베드로는 과연 언제 회심한 것입니까? 그 점에 대해 다섯 개의 장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소개받았을 때 (요 1:35-42)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유대교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세례 요한은 안드레와 다른 제자와 서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안드레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하면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소개시킵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2)
베드로는 이때 회심한 것입니까?
2) 많은 고기를 잡은 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했을 때 (눅 5:1-11)
하루는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라는 분이 와서 자신의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아 배 안에서 무리에게 가르칠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가르치기를 마치신 예수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놀랍게도, 어부 베드로는 목수인 예수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됩니다. 이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눅 5:8, 새)
이때가 베드로의 회심의 순간입니까?
3)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했을 때 (마 16:13-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데려가셔서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로부터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결정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마 16:16, 새)
그렇다면 베드로가 회심한 것이 바로 이때입니까?
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요 21:15-22)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서 심문을 받는 동안 사람들에게 ‘너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냐?’ 하고 세 번이나 추궁을 당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부인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셔서 그에게 예수신경을 새롭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요 21:15, 새)
예수님은 이때 세 번을 연속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세 번 모두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바로 이때 회심한 것입니까?
5) 오순절 성령을 받았을 때 (행 2장)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은 오순절(칠칠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120명이 오순절에 한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데 성령이 불같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베드로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고 여러 지역의 언어로 방언을 하며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성도들을 가리켜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때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 모든 것은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이미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강력히 도전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2-33, 36)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베드로의 회심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외에도 두 가지 사건들이 더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환상 가운데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것을 본 교회의 비전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교회들에게 쓴 두 개의 서신서입니다.
이처럼 여러 장면들이 있는데, 회심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순서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예수님 사역의 초기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회심했다고 할 것이고, 회개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많이 잡은 후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장면이 회심의 순간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교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 회심한 것이라고 할 것이고, 자비를 강조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가 진정으로 회심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반면, 은사주의자는 베드로가 위로부터 성령의 불을 받았을 때 회심했다고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회심했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즉 그가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언제 받았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회심의 신비가 있습니다. 회심 또는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사건들이 베드로의 회심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과 비슷해서, 자신이 회심한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생생한 기억으로 감격스런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같은 날 받은 자신의 출생증명서와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중간에 믿었다고 해도, 그때부터 회심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 점점 성장해 간 베드로
베드로에 관한 성경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회심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 즉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1) 베드로는 예수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요 1:35-42).
2) 베드로는 예수가 자기와는 다른, 엄청나게 우월하신 분임을 깨닫는다(눅 5:1-11).
3) 베드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데,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듣는다(마 16:13-20).
4)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당해야 함을 깨닫는다(요 21:15-22).
5) 베드로는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한다(행 2장).
6) 베드로는 예수가 단지 유대교에서 말하는 식의 구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주님이심을 깨닫는다. 그리고 예수신경이 모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다(행 10장).
7) 베드로는 예수의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델로 받아들인다(벧전 2:18-25).
예수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서 시작하여 그분을 자신의 삶의 모델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히 성장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델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사환(종)들에게 권면하기를,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못된 주인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하면서(20),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1-24절)
이처럼 베드로는 분명히 신앙에 있어 성장했지만, 그의 성장은 일관적이지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에 관해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자신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지만, 어떤 때는 옆길로 새기도 하고 뒤로 넘어지기도 합니다. 만일 한 사람이 회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면, 다시 말해 그분의 본성과 인격, 또 성자와 성부의 관계 및 성자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과 승천 같은 신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성장하는 것처럼, 그분께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회심은 그가 예수님을 이해하며 점진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담대함 역시 성장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회심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성장했음을 봅니다. 위의 1~7번까지 베드로가 등장하는 본문들 중 첫 네 개를 보면,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대체로 개인적인 것들입니다. 하지만 5번부터 7번까지의 베드로의 삶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공적인 장소로 나아갑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그는 실제로 로마에까지 갔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공적인 삶의 단계에서, 베드로는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의 권력자들을 존중하고,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벧전 2:1-17).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변호할 준비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벧전 3:15-16, 새)
베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대 교회의 전승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베드로의 ‘공적인 고백’에서 십자가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자신이 감히 그분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달릴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죽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회심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를 성장시키는지, 그리고 회심이 어떻게 개인적인 용기를 공적인 용기로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놀라운 모범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쯤에는, 동료 갈릴리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을 회심시킬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삶을 마칠 무렵에는, 어떻게 복음으로 로마 제국을 향해 나아갈지를 생각했습니다.
4. 우리는 어떻게 성장해나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베드로처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교회라는 주님의 몸을 중심으로 해 나가는 공동체적 신앙생활인데,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수도의 차원 정도로 신앙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신앙은 교회 중심의 신앙이지, 개인주의적인 신앙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앙에는 개인적 차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인주의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인 박영돈 교수님의 글이 도움이 됩니다. 그분의 글을 조금 쉽게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
성경은 개인의 구원과 신앙을 중요시하지만, 성경에 개인주의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성령의 첫 열매는 교회입니다. 성령님은 새 언약의 영으로서, 그분의 일차적인 사역은 새 언약이 이루어진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과거 이스라엘을 잇는 새로운 언약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세상을 해방시키며, 모든 민족을 축복하고 온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고 통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광대한 구원 역사인데, 그것을 오직 나만을 위한 구원으로 축소시킨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신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오직 개인 구원의 틀에 가두어 버리게 되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풍성한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그 공적인 차원과 대사회적인 미션을 잃어버리고 지극히 사적이고 종교적인 게토 속에 유폐되어 버립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혁교회는 중세 교회의 제도주의 속에 억압된 구원의 개인적인 측면을 새롭게 부각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주의 영성을 조장한 것은 아닙니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떠나서는 진정한 구원과 영적인 성숙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언약과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성령 사역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개인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주십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령은 개인을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 불러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또한 만물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의 파트너가 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섬길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이끌리는 신앙생활은 개인의 구원과 경건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며 새롭게 하시려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나아갑니다. 우리 아버지의 관심사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며, 그분의 비즈니스가 자녀인 우리의 비즈니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역도 하고 섬김도 하고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입니다.
******************
그렇게 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갔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은 순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회심의 과정은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닮기 위해 살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베드로처럼 처음에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는데, 점점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면서 다른 지체들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VIP를 섬기고, 또 주님을 모르는 민족들을 섬기는 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방법은 아주 다양하며, 사람마다 공적인 영역에서 영성이 나타나는 모습이 다릅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먼저는 우리 지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정말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며 섬기기 원합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에서 사역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약 -------------------- > 베드로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벧전 2장 4~10절(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 - 이준원 (0) | 2023.07.04 |
---|---|
벧전 2장 1-3절(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라!) - 이삼규 (0) | 2023.06.28 |
벧전 3장 18-22절(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물세례) - 권율 (0) | 2023.06.21 |
벧전 3장 8-17절(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 이삼규 (0) | 2023.05.30 |
벧전 5장 5-7절(겸손으로 염려를 물리치라) - 이준원 (1) | 2023.05.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