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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베드로전서

벧전 3장 8-17절(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 이삼규

by Preacher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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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3장 8-17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이삼규 목사 20181209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벧전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이나 물질이나 권세를 믿고 삽니다. 반면에 교회에 찾아오고 예수님을 믿어 보겠다고 하는 이들 중에는 고통과 눈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사는 동네가 어디입니까? 팔 학군이라는 강남이지요. 아파트 한 채가 몇 십억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동네 사람들은 다 행복할까요?

 

옥한흠 목사님이 지은 ‘안아주심’이라는 책에 보면 사랑의 교회가 강남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 중에 교회 다시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고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 사람들 중에 고생하는 사람이 더 많아 보입니다. 신앙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주님을 의지하며 인생을 영위하는 자는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라면,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인 지체들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형제로서 살펴야 합니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 먼저 한 마음으로 동정하라고 권면합니다. 성도들이 현재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하면서 품어주는 것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한 형제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남처럼 대하지 말고 가족으로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불쌍히 여기라는 것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도우라는 뜻입니다. 겸손하라는 것은 자신 더 낫다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낮은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권면을 좀 더 깊게 살펴봅시다.

 

1)다 마음을 같이하여-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한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누가 뭐래도 ‘일치’입니다. 물론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일치를 말합니다. 이것을 잘하면 교회가 서고 지체들도 평안합니다. 교회 안에 왜 분쟁이 일어날까요? 한 마음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공감, 사랑, 긍휼-이 세 가지 덕목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면 이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비뚫어지면 그 어떤 것도 곡해나 오해로 이어집니다. 이 시대 교회 갈등의 큰 원인이 바로 ‘몰이해’의 마음 습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그 은혜의 마음으로 서로를 긍휼히 여기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이해가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요13:34)은 그분의 ‘대속적 사랑’을 본 받는 것입니다. ‘대속’은 ‘내가 죽음으로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공감과 긍휼로 구체화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에게 베푸는 한 가족입니다.

 

3)겸손-그럴 때 나타나는 마음 자세가 겸손입니다. 겸손의 기본 개념은 내가 아래로 내려가는 섬김의 마음입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상대방을 윗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첫째, 둘째, 셋째 덕목을 모두 ‘겸손’으로 보았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진심으로 섬기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가장 낮은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그분이 선생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겼으니 그들도 서로 말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상대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하고 돕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서 상대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은 자신이 더 능력 있거나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형제를 섬긴다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 예배만 드리면서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했다고 편협한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지체로 맺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지체를 다 살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가까운 몇 명이라도 그러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잘 알지 못하는 지체라 할지라도 그의 어려움을 공개석상에서나 간접적으로 듣게 될 때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도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지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진심으로 동정하고 겸손히 도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사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베풀 때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베풀다 보면 그 사랑을 악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을 빌어 줘야 합니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상대가 자신의 사랑을 악용했다고 해서 똑같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아 주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우리에게 녹록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와 의식을 따르다가 인본주의에 빠지는 모순을 보입니다. 분명히 세상은 본질적으로 교회 편이 아닙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무시하고 세상의 가치로 교회를 재단하기가 쉽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지 않고 ‘소금과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을 택하는 것입니다. 악이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는 보통 악으로 맞받아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악에게 집니다. (동영상 : 손양원목사)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손양원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지 않았습니까! 용서까지는 해도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정말로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는 섭리를 구사하십니다(창50:20, 롬8:28). 사람들이 죄를 지어 망쳐 놓은 것을 하나님은 선이 되는 방향으로 운전해 가십니다. 마치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길을 잘못 든 우리를 다시 최선의 경로로 인도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에 협력해야 합니다. 세상이 욕을 하면 오히려 축복하고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베드로는 성도의 삶을 거론하면서 누구를 생각하며 화평을 구하라고 했습니까? 의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화평을 구하며 복을 비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은 실제로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 풍성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성도는 그로 인해 화평을 누린 자로서 악을 선으로 갚으며 복을 누리고 그 복을 나누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악에 대햇 악으로 보응하면 안 됩니다. 악인에 대한 보응은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선을 행함으로 주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주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절제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하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을 떠올려야 합니다. 화평을 위해 모욕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며, 채찍질 당하신 그분으로 인해 내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이제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는 성도인 것을 믿으며 보복하는 대신에 복을 비는 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화평을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옳은 길을 가기 때문에 고난이 찾아옵니다. 물론 악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 고난은 부끄러운 고난이지만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은 값진 것입니다. 주님이 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은 악으로 악을 갚는 ‘악순환’을 끊으라는 말입니다. 악순환을 끊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내가 악으로 되받아치고 세상이 악순환을 끊어줄 것이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악으로 받아칠 만한 상황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할 때 ‘악순환’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세상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선을 받아 줄 정도의 ‘선’은 세상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벧전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다가 선이 돌아오지 않고 고난이 계속 닥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그래서 결론은 앞의 구절들과 똑같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악순환을 끊을 수도 있고(13절),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17절).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선을 행하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악순환을 끊는 우리의 선행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대해 질문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선한가요?” “당신은 어디서 그 선함을 얻었나요?” “왜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그 믿음을 지키나요?” “그 믿음이 무엇인가요?”

 

교회에 와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의 80퍼센트 이상이 무언가 다른 것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특별한 계기가 찾아왔을 때, 또는 삶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 그리스도인들을 기억하고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 박해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계속 선을 행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을 품고 그리스도인들을 달리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괴롭히면서도 속으로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잘 준비해야 합니다. 복음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들이 이유를 물어올 것입니다. 내게 묻지 않아도 나중에 다른 곳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계십니까? 선한 양심을 갖고 비방하는 자들로 부끄럽게 하십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고난을 각오하며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선행을 멈추지 않는 자가 마지막에 누릴 기쁨은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입니다. 천국이 바로 저들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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